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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의병 전투지(면천읍성)
면천읍성은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및 관군과 전투를 벌인곳이다. 당진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최구현이 모집한 의병이다. 충청남도 당진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 단체이며,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대난지도와 소난지도를 의병의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일본경찰대와 수비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등 해상을 이용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최구현(1866 - 1906)은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하고, 1906년 2월 통감부를 개설하자,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각처에 포고하여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로부터 370여명의 의병이 모았다. 그는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서 이 의진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결사항전을 다짐한 36명의 의병과 함께 당진 소난지도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 이주를 준비하던 중 7월 5일 새벽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어 면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2월 23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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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신 추모비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원(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박창신(1895-미상)은 평안북도 창성 출신이고 충청남도 당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학생이다. 박창신은 면천보통공립학교 3.10 만세운동 당시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원용은과 함께 4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나,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며 1년 넘게 감옥 생활을 하였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202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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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은 추모비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원(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원용은(1902-1951)은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학생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여 면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고 사전 거사계획을 세워 전교생에게 주지시키는 등 3.10 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역할 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주교도소에서 4개월간 옥고을 치루고 학교에서 퇴학 당한 후, 공주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입학식 날 제적당하였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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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난지도 의병총
소난지도 의병은 홍원식이 인솔하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항일부대이다. 소난지도에 근거지를 두고 당진 일대의 육지에 상륙하여 일본주재소나 관아를 공격하였으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홍성 경찰분서에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08년 3월 13일, 15명으로 구성된 추격대를 편성하여 소난지도에 파견하였다. 의병은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경찰대에 항전하였으나 탄약이 고갈되어 추격을 받게 되었다. 동굴 속에 몸을 숨겼으나 5명이 희생되었고, 집중 총격을 받아 36명이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의병들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으나 행방불명되었다. 그 결과, 일본경찰대 15명에 의해 소난지도 의병 100여 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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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구현 항일독립대의비
최구현(1866-1906)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軍部) 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계기로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면천, 당진, 고덕 등지로부터 모인 370명의 의병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6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기존에 주둔하던 홍원식 휘하의 의병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합류한 김태순과 차상길 휘하의 의병까지 결합하여 장기적인 항일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병은 사산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그는 면천 감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 무렵 출옥할 수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06년 12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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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구현 묘
최구현(1866-1906)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軍部) 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계기로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면천, 당진, 고덕 등지로부터 모인 370명의 의병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6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기존에 주둔하던 홍원식 휘하의 의병 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합류한 김태순과 차상길 휘하의 의병까지 결합하여 장기적인 항일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병은 사산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그는 면천 감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 무렵 출옥할 수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06년 12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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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묘
정주원(1870-1925)은 충청남도 당진의 유생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분노하고 항일 의병투쟁에 신명을 모두 바쳐 국권을 수호하리라 다짐했다. 1907년 의병대장이 되어 8월 경기도 안성 의병회의에 참가하고 그해 9월까지 용인, 안성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한 뒤, 그 중 300여 명의 1개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다음 해 7월까지 당진, 서산, 부천 등을 누비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1908년 7월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해안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그해 9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11월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다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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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섭 집 (필경사)
심훈(1901-1936)의 본명은 심대섭이며, 경기도 시흥 출신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심대섭이고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를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하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그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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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섭 묘
심훈(1901-1936)은 경기도 시흥 출신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심대섭이고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를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하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그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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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기념관
심훈(1901-1936)은 경기도 시흥 출신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심대섭이고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를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하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그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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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집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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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한 묘
성재한(1860-1906)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1904년 한일의정서가 발표되자 예산, 홍성, 보령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몰두할 것을 결심하고 민종식 휘하 의병이 되었다. 의진의 운량관(군량 운반의 일을 맡았던 직책)으로서 홍주입성전에 참가하였고, 5월 9일 탈환 작전을 전개하였다. 형세가 기울기 시작하고 성을 넘어 피신할 수 있었으나, "나는 중한 책임이 있다. 이 문부들을 안고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하고 성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성재한은 이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