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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석 추모비
이근석(1898-1975)은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이근석은 1919년 3월 20일 강경 장날을 이용한 2차 강경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송재기·이근오·이봉세 등과 함께 결의, 자신의 집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쓸 태극기 300여 개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이근석 등은 심암리와 화정리 주민 70여 명을 규합하여 옥녀봉에 올랐다. 이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장에 온 군중을 합세시키면서 강경장 내 윗시장으로 진입하여 만서정(萬西町)으로 이동하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 벌였다. 이근석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19년 4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 2월 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19년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0월 형을 선고 받고, 또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0월 형을 확정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근석은 출소 후 1923년 3월부터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심암리 지역에 채운학원(彩雲學院)을 설립하여 주민들의 문맹퇴치와 청소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이에 일제는 1925년 이근석의 채운학원을 강제 폐교하였나, 이근석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932년 3월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지역에 신풍학원(新豊學院)을 다시 설립하여 학생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해방 후에도 공민학교(현, 기민중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근석은 1975년 7월 3일 77세로 별세하였다.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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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애국지사기념비(심암1리)
이 마을 출신인 애국지사 4인(송재기와 이봉세, 이근석, 이근오. 송재기를 제외한 모두가 전의 이씨 일가친척이다)과 강경 만세 시위를 기념하고자 세웠다. 1919년 3월 20일, 농사를 짓던 채운면 심암리 주민들이 강경 옥녀봉에서 500명이 만세를 불렀다. 상시장을 통과할 때 시위 군중은 1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독립운동은 이근석이 3월 이후 수차례 3·1운동 소식을 듣고, 또한 매일신보를 보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심한 데서 시작되었다. 3월 16일 이근석의 집에서 이근석, 송재기, 이봉세, 이근호와 협의하고 그 곳에서 17~18일 이틀 동안 태극기 300개(~500개)를 만들었다. 이 시위에서 송재기, 이근석, 이봉세, 이근오 등은 공주 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1년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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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필 기념비
유진필(1885-미상)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에서 퍼져나가자 뜻을 모아 논산시장일에 궐기하기로 결의하고, 5일 오전 4시, 공회당에 모여 간단한 점검 후에 논산 우시장에서 여러 지역의 부락민과 합세하여 오전 9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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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희 묘
남성희(1868-1941)는 대호지 4.4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의령남씨 충장공파 성암종회의 묘역 모셔져있다. 취송 남상은 선생이 차남이며 독립군으로 활동한 남상학은 장남이다. 대호지 4.4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주민들이 1919년 4월 4일 천의장터에서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대호지면 유생인 남주원·남상돈·남상락·남계창 등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한 후, 대호지면 이인정 면장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여 4월 4일에 5일장이 열리던 천의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천의 주재소의 일본 순사를 공격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쳐 120명에 달하는 독립유공자가 서훈되었다. 대호지면의 대표적인 집성촌인 의령 남씨 충장공파의 후손들이 세운 도호 의숙 유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었으며 대호지면사무소 이인정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구체화하고, 천도교 세력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호지면은 당시 궁벽하고 외진 곳이었지만 주민들은 일제의 억압에 맞서 치밀하면서도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은 독립을 지향하는 당진 지역 주민의 항일 의식이 치열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대호지 4.4독립운동 선열유족회를 비롯한 각계의 노력으로 4.4운동이 새롭게 발굴되기 시작한 결과로서 성암 남성희 선생이 1919년 4월 24일 서산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은 사실이 인정되었다. 199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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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은 묘
남상은(1894-1974)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과 정미면 천의장터 만세시위 주도하였다. 어린 시절 도호의숙(桃湖義塾)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의 독립만세시위에 부친(父親)인 남성희(南星熙)와 함께 참여하였다. 친형인 남상학(南相學)은 김좌진(金佐鎭)의 휘하에서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 설립에 참여하고,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전하였다가 생사 불명되었다. 1919년 3월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세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고,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열기가 서산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1919년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훈(姜泰壎)·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회합을 갖고 독립 만세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다음 날인 3월 27일 다시 모여 김동운이 “(장날인)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위해 면민 각호 1명씩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해 구장들에게 배포하고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라고 실행 방안을 제안하였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수선을 위해 집합하라는 내용의 면장 명의로 된 공문을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고지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6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 대열을 갖추고, 대열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7km 떨어진 천의장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천의주재소(天宜駐在所)의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천의주재소로 달려갔다. 행동총책 송재만과 함께 행동선봉대원 및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을 구타하고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 이후 홍성헌병수비대에 붙잡혀 서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도 부자가 모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독립군으로 활동한 남상학이 친형이었기 때문에 일제 경찰로부터 계속 사찰을 받았다. 해방 후인 1971년 대호지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대호지 기미독립운동약사를 편찬하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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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거리 표지석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이에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진 창의사에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거리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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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정 공적소개비
이인정(1859-1934)은 충청남도 서산 사람으로, 대호지면장으로 있으면서 대호지 4.4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당시 이인정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송재만(宋在萬) 등이 이 독립만세시위를 하기 위하여 자신 몰래 면장 직인을 사용하여 도로보수 부역이란 명목으로 1919년 4월 4일 면민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제지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날 모인 면민 앞으로 나아가 "오늘 모이게 된 것은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것"이라며 시위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고, 앞장서서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천의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정오경에 이인정은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2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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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리마을비
조금리는 대호지4.4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이다. 대호지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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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대호지4.4만세운동)
창의사는 대호지 4.4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약 9미터)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가를 제창한 뒤, 총책 송재만의 선서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정미면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여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투석전으로 대응하며 천의 왜경주재소가 파괴되고 많은 왜경들이 생포되어 구타당했다. 그러나 4월 5일에 출동한 왜경과 다시 충돌하여 사상자 5명이 발생하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었다. 이 운동으로 현장 학살된 인물이 송봉운 등 3명, 옥중에서 고문치사 당한 인물이 이달준, 김도일 등 3명, 수형인이 5년에서 8월까지 37명, 태형 90도 이상이 90여 명에 이르는 치열한 만세운동으로 인근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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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순국선열영세추모비
대호지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3.1운동은 대호지 4.4만세운동이다.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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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승전목 전투지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일컫는데, 총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개혁을 위한 것이고,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승전목은 면천면 면천로와 당진읍 도곡길 사이의 좁고 가파른 계곡으로 어떤 병력도 통과하기 어려운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1894년 11월 21일 한명순, 이화심, 박용태, 김현구 등이 이끄는 내포 지역의 2만여 명의 동학군이 10시부터 15시 30분경까지 총과 화전으로 아까마즈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89명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동학군 3명이 전사하였으나, 일본군의 78명분의 배낭, 상하 겨울 내의, 밥통, 구두, 쌀자루와 휴대식량 321식분, 탄약 612발 등을 손실시키는 결실을 이루었다. 이 전투는 동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 이후 면천읍을 점령하고 22일 예산군 고덕면 구암포까지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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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0일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
3월10일 학생독립만세운동은 면천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원용은은 면천 보통학교 제4학년 재학생의 신분으로 동급생 박창신과 만나 은밀히 거사를 논의하였다. 그 후 각 학년 급장과 비밀리에 논의 후 전교생에게 주지시켰다. 원용은, 박창신, 강선필, 원규상 등이 시위 준비를 주도하였고, 박창신은 인접한 당진, 덕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거사에 함께하자는 밀서를 보냈다. 3월 10일 오후 4시경 송림 골짜기에 전교생이 모였고, 학생들은 태극기와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였다. 학생들을 발견한 교사들은 저지하며 시위를 막으려 했으나, 이에 교사 심상렬이 시위대열의 앞으로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려하였다.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를 통과하려 하였으나, 경찰들의 강경한 저지로 태극기와 현수막을 빼앗겨 해산하였고 교사 박래윤, 안인식, 이흥로, 이돈하가 만류하여 다시 모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용은은 일부 학생들과 다시 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고,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다음 날, 원용은은 교사와 가족들의 만류에도 등교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박창신도 자진 출두하여 함께 조서를 받고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어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