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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유구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가로공원에 위치해있다.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1919년 3월 14일 황병주 선생은 유구시장에서 500여명의 민중들과 함께 대규모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일제의 무력을 동반한 진압으로 황병주 선생을 포함한 만세운동의 주동자 23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이러한 자주독립의 의지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의 열기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유구지역 민중의 순수한 애국심을 동반한 참여를 이끌어 내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는 없지만 유구지역의 만세운동이 공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만세운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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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주 유허비
황병주(1884 - 1946)는 공주시 신상면 유구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손병희(孫秉熙)가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체포된 사실을 알고, 자신의 고향인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4일 공주군 신상면 유구장터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필규(李弼珪)·박병문(朴炳文) 등이 이에 가담하고 시위군중은 500여명으로 늘어나서 더욱 드높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시위를 제지당하였으며, 주동자인 그는 경찰주재소로 연행당하였다. 그가 연행되자 시위군중은 주재소를 파괴시키는 등 더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그러나 그는 결국 등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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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기념비(석송리)
석송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정안면 석송리에서 유학자와 농민들이 4월 1일 석송리에서 광정리 광장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한 운동으로 공주에서 가장 많은 시민이 참여한 만세운동이다. 이기한, 이병림 선생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일본 헌병과 격돌하다 이병림 선생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25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이 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곳에서 매년 4월 1일 석송만세운동재현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이기한(1868 - 1941)은 1919년 4월 1일 정안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고향인 석송리에서 수백명을 모아놓고 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병림(1889 - 1919)은 이기한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일경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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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한 묘
최병한(1900 - 1969)은 충남 공주군 정안면에서 이기한(李綺漢)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안면의 만세운동은 정안군 석송리에 거주는 이기한과 이병억(李秉億)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1919년 4월 1일 이기한 등은 마을에서 군중을 모아 면사무소 소재지인 광정리로 향하였다. 광정리에 이르러 시위대열이 800여 명에 이르자, 이기한은 주재소를 파괴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최병한 등이 경찰주재소 벽을 발과 삽 등으로 무너뜨리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창과 문 등을 파괴하는 한편, 부근의 일본인 가옥도 파괴하였다. 이 시위로 체포된 최병한은 1919년 9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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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동상
유관순(1902 - 1920)은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 중 한 명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의 주선으로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2년간 근대 교육을 받고 서울 이화학당으로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 3.1운동을 접한 유관순은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며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시위운동을 벌이고 체포되었는데, 당시 충청지역을 관할하던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항소하면서 서울 서대문감옥(이후 서대문형무소)으로 옮겨갔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그러던 중 1920년 9월에 옥중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3.1중앙공원 내에는 유관순열사 동상 외에도 경자4.19학생혁명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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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학교
영명학교는 190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 세워진 중등과정의 사립학교이다.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선교사와 부인 샬롯 위더스푼 벨(Charlotte Witherspoon Bell)이 학교를 열어 수명의 남녀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영명학교의 출발이 되었다. 1906년 정식 학교 이름을 걸고 개교하였으나 학생 모으기가 쉽지 않아 수업료 면제, 교과서 학용품의 무료제공, 용돈제공이라는 특전을 베풀었으나 학생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영명학교 제3회 졸업생 윤창석(尹昌錫)은 2·8 독립선언을 주도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3·1운동 때는 교사 김관희의 지도 밑에 김수철·유준석(유관순의 오빠) 등이 주동이 되어 공주 공설시장으로 뛰쳐나가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샬롯 부인은 유관순을 발탁해서 영명학교에서 교육시키다가 다시 이화학당으로 보낸 연고를 갖고 있다. 차츰 학교가 발전의 궤도에 올랐으나 1930년에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 탄압이가혹해졌고 1941년 7월 30일 강제폐교를 당하였다. 폐교된 학교들이 8·15 광복 후 거의 다시 문을 열었으나 영명학교의 경우 1949년 졸업생인 황인식을 2대 교장으로 영입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강제폐교 당시까지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 중에는 정치가 조병옥(趙炳玉), 소설가 방인근(方仁根) 등 인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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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독립운동기념관
공주독립운동기념관은 공주영명중고등학교 정문 인근에 위치해있다. 독립운동기념관은 일제강점기 공주시의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가를 선양하며 나라 사랑 정신을 후손들의 기억에 오롯이 새기기 위해 건립됐다. 교육과 체험, 관람을 하나의 동선에서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기념관에 대한 간략한 안내와 독립운동가의 명언이 전시됐다. 2층에는 공주 독립운동과 영명학교 변천사, 공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22명의 공훈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3층은 독립운동가의 복식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과 포토존 등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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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옥 추모비, 기적비
정인옥(1875 - 1950)은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919년 7월 동지 신덕영(申德永)으로부터 권총 2정 및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독립신문(獨立新聞)을 교부받아 상주(尙州)·충주(忠州)·봉화(奉化) 등을 중심으로 1,500여 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22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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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정사
대원정사는 원래 금성면 하신리 온양 이씨 어필각(溫陽李氏 御筆閣) 인근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위치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1982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춧돌의 모양이나 재질로 보아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니고 옮겨 지을 때 기둥 아래 부분의 부패 방지를 위하여 교환한 것으로 추정된다.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은 하나의 칸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뒤쪽 중앙에 불단을 만들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이 불상은 신음산 국사봉 아래에 있는 신안사에서 옮긴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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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순절지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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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순 비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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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남산)
3.1독립의거 기념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산공원에 위치해있다.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3일 금산 읍내 장날 김용술(金用述)·임승환(任勝煥)·김종구 등이 금산청년 대표자 명의로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여 수천명이 우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그 다음 장날인 3월 28일에도 상점들이 철시한 가운데 수백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구호열(具鎬烈, 1899~1940), 김일남(金一南, 1888~1950), 김종구(金鍾九), 김학술(金學述, 1897~1932), 변희조(卞熺朝, 1895~1943)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금산군 3·1독립의거기념비건립위원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9년 12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