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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단 결사대 기념탑
일제의 침략과 국망에 처하여 우국지사들은 신도안에 모여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의 기지로 삼았다. 광복결사대는 김한종, 박상진, 채기중 등 광복회원 수십 명이 체포되자 한훈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1920년 조직한 항일단체이다. 이들은 해방 후 독립정신에 입각하여 광복단을 재건하였다. 재건된 광복단은 서울 견지동에 총본부를 신도안에는 지부를 두었다.신도안 지부에서는 중봉산 뒤의 충렬사에 순국선열봉안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에서 정한 순국선열기념일에 매년 관민 합동으로 추도제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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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진 공적비
배영진(1864 - 1919)은 1912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건너가 1912년 만주 동삼성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지방연락책으로 일하였다. 한상룡(李相龍), 김대락(金大洛), 김동삼(金東三) 등과 이주동포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만세운동에 활동하시다 신병으로 이국땅에서 향년 56세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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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집
한훈(1890 - 1950)은 악질 친일 군수인 직산 군수를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경술국치 후 귀국하여 1913년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열(柳璋烈),장두환(張斗煥) 등과 같이 풍기(豊基)에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5월는 만주 길림성에서 김동순(金東淳)등과 함께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2월말경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김철,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과 회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사령부라는 독립단을 조직할 것을 승인받고 3월에 서울로 돌아와 박문용과 함께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상옥(金相玉)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의병활동이 발각되어 재차 23년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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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기념관
한훈(1890 - 1950)은 악질 친일 군수인 직산 군수를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경술국치 후 귀국하여 1913년 채기중(蔡基中), 유창순(庾昌淳), 유장열(柳璋烈), 장두환(張斗煥) 등과 같이 풍기(豊基)에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5월 만주 길림성에서 김동순(金東淳)등과 함께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2월말 경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김철,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과 회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사령부라는 독립단을 조직할 것을 승인받고 3월에 서울로 돌아와 박문용과 함께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상옥(金相玉)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의병활동이 발각되어 재차 23년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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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순절지(강학루)
오강표(1843 - 1910)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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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순의기적비
오강표(1843 - 1910)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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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추모비
오동진(1889 - 1944)은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명장으로 꼽힌다. 호는 송암(松菴), 이명은 순천(順天)이다.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후 만주로 망명해 윤하진 등과 광제청년단 및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했다. 1920년에는 광복군 총영장이 되어 독립군을 편성하고 항일전투를 전개했다.그 후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일본 군사시설과 국내의 경찰관서 등을 파괴하다 체포되어 18년의 옥살이 끝에 1944년 충남 공주형무소에서 55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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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적지, 동학혁명군 위령탑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공주를 중심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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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 3.1운동기념비
공주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종교인·유학자 및 교사가 주도하고, 농민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들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 군경과 대치하면서 무력적 저항을 감행하였다. 또한 횃불만세운동으로 비폭력적·평화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참여 인원은 1만 명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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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청년회관 터 표지석
이 곳은 1932년 공주청년회관이 설립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단체인 신간회 공주지회가 활동한 근거지이다. 당시 공주제일교회 담임목회자들이 이 단체에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하였고, 민중계몽과 강연회, 야학회, 토론회, 연극회, 체육회, 민립학교설립 추진등 공주지역의 근대 교육과 문화를 이끌던 뜻 깊은 장소이다. 2019년 공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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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유허비
오강표(1843 - 1910)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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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영 사당(숭의사)
이철영(1867 - 1919)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일제의 모든 정책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1909년 민적법이 공포되자 일본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10여년간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항쟁하다가 1919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