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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추모비 (세종)
애국지사 추모비는 전의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수욱 외에도 추경춘, 윤상원, 추득천, 윤자훈, 윤자벽, 윤상억, 윤자명, 윤상은, 이상건, 이장희, 이광희, 이수양, 이규영, 정원필, 정상복의 이름이 적혀있다.전의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수욱(1890 - 1970)은 1919년 2월 28일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만세시위를 보고, 고향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하고 3월 6일 귀향하였다. 귀향 즉시 먼저 이웃에 사는 추경춘(秋敬春)을 만나서, 그 취지를 설명하여 같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다음 3월 7일에는 두 사람이 동리사람 박성교(朴聖敎)·추득천(秋得天)·윤자벽(尹滋璧)·윤상원(尹相元)·윤자훈(尹滋勳)·윤상억(尹相億)·김재주(金在周) 등과 함께 읍내리 장날인 3월 13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3월 8일에는 김병옥(金炳玉)의 집에서 이장희(李章熙)·이광희(李光熙)·정원필(鄭元弼) 등과 만나 다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장터에서 시위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 약 150매를 목판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3월 13일 오전 9시경 읍내리 시장으로 가는 길목인 갈정리(葛井里) 고개에 나아가, 장터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미리 만들어 둔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자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많은 시위군중이 이어 호응하여 장터를 행진하는 등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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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갑수 공적비
황갑수(1921 - 2009)는 옛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출신으로 광복군 분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2월에 광복군 제 1지대에 입대하여 중국의 후난성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군의 일화를 알게 된 이병곤(李炳坤)은 설악 사령장관에게 애국 청년들을 후방 지역에 집결시켜 교육을 실시하게 할 것과 제 9전구를 단위로 한 광복군 편성에 협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병곤의 요구를 설악 사령장관은 받아들였다. 1944년 각 전선에는 10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합류하였다. 청년들은 광복군으로 편성될 때까지 비호대(飛虎隊)라는 부대명으로 대장 이봉훈과 부대장 진병길을 주축(主軸)으로 하여 동지 결속 및 우군에 대한 작전 지원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각종 지침에 따라 1945년 교육 훈련 도중에 각 전선으로부터 광복군 공작 요원을 파견하여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부득이하게 일면 교육 일면 공작으로의 방침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구대장 이병곤은 전재덕(全在德)·강익진(康翊鎭)·황갑수를 각각 조장(組長)으로 한 3개 공작조를 편성하는 것으로 조직을 개편하여 공작에 임하게 하였다. 황갑수가 속하여 있던 광복군의 활동은 우군의 제일선 싸움터에서 170여 명의 대원이 집결하여 전방 또는 후방 공작에 참여함으로써 우군 작전에 많은 공헌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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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3.1만세운동기념 조형물
전의역 인근 '전의만세길'에서 볼 수 있는 상징조형물로 2020년 12월 건립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이수욱 등은 갈정리 장고개에서 전의 시장을 향하는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수욱 등은 징역 1년 6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애국지사 17명을 상징하는 '17각 원형 기둥' 위에 3.1 운동에 쓰인 목판본 태극기를 차용하여 나뭇결 무늬를 표현한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한편 '전의 장터 3.1 운동'은 세종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3.1운동이 시작된 발원지이다. 3.13일 전의면에서 시작되어 15일 전동면 23일 금남면, 26일 연동면 조치원읍, 30일 부강면, 연서면, 31일 연기면, 4월1일 장군면에서 4월20일까지 39일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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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열 의열비
김규열(1887-1958)은 청풍 김씨 가문으로 조치원읍 신안리 출신이다. 김규열은 1919년 당시 신안, 서창, 침산, 봉산리에서 있었던 봉화 횃불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치원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본 순사가 휘두른 개머리 판에 맞아 의식 불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김규열은 기적처럼 깨어났으며 전답 10,000여 평 되는 전 재산을 매각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미나미 총독을 조치원역에서 살해하려다가 경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유공자로 추서받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의 구국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2002년 연기군 유림들이 김규열의 의열비를 건립하였고 최창규 전 독립기념관장이 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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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출신 독립의열명사 숭모비
연기출신독립의열명사 숭모비는 세종시 조치원읍 침산리 충령탑공원에 위치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이곳에 조치원 신사를 건립하여 일본천황에게 예배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광복 후 조치원 신사를 없앴고, 6.25전쟁 이후 충령탑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가 순국하신 애국지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숭모비 외에도 보훈의 빛(조형물), 충령탑, 조국통일기원비가 공원 내에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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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하 집
양기하(1878-1932)는 충청남도 계룡 사람이다. 공주군수로 재직하던 중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셨고, 1919년 3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셨다. 그 후 광복군사령부 정보국장으로 항일투쟁을 하시던 중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외교활동을 지원하셨다. 또한 1922년 10월 김구 선생과 "노동하며 군인이 되는" 한국노병회를 결성하여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셨다. 1930년을 전후하여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중 1932년 2월 만주 관전현에서 일본경찰대와 만주군의 습격을 받고 격전 중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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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집
김지수(1845-1911) 선생은 이곳 계룡시에서 출생하셨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의 11대손이다. 호서지역 유학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논산지역에서 학계를 조직해 유림들을 결속하고 가문의 위상을 정립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1900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사퇴하고 은둔 자정의 길을 선택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일제가 내놓은 회유책인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 수령을 거절하였으며, 헌병대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일제침략에 저항하다가 망국의 한을 품은채 1911년 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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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두계장터)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두마면 두계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조선총도구를 설치해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원천봉쇄하려고 철저한 강압통치를 실시했다. 이에 3.1만세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자 계룡시민도 배영직 열사의 주도하에 주위의 청년들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두계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고, 기미년(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에 두계장터에서 군중들 앞에 나서서 국권회복을 역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했다. 이에 격동되어 모인 시위군중이 1,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일부가 일제수탈의 상징인 호남철도 선로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이로인해 배영직 열사는 옥고를 치루던 중 모진 고문으로 강제 출감 후 3일 만에 순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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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환 집
서장환(1890 ~ 1970)은 대구 달성출신으로 서성준(徐聖濬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항일 비밀결사조직 상의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의병가족을 도왔고, 만주와 상해지역으로 군자금을 송달하였다. 또한 기미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끝에 병으로 풀려났다. 1920년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 군자금 모금에 힘썼고, 1921년 자유신보를 간행하여 일제식민지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리기에 힘썼다. 그 후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구속을 피하여 1933년 계룡산 신도안으로 일가족이 이주한 후 항일 비밀결사 십이일민회를 조직하였으며, 계롱산에서 동흥의숙(東興義塾)이란 서당을 열고 청소년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면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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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규 집
이을규(1894 - 1972)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하여 1919년 10월 대동단의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그해 10월 10일 동단의 총재 김가진을 1차로 망명시킨 뒤 의친왕(懿親王)의 상해망명을 추진하였다.강태동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각종 선전물 3천5백매를 배포하면서 적극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정남용과 함께 의친왕(懿親王)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그해 11월 9일 서울을 출발하였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이들 일행은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검되었는데, 이 때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1920년 1월 재입국했다가 붙잡히고 말았다.결국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력투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기제조 및 무장훈련에 힘을 쏟았다. 그 후 만주로 넘어간 그는 1929년 7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계열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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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직 집
배영직(1882 - 1926)은 1919년 충남 논산시 두마면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지역의 유지이자 자산가인 부친 배대식(裵大植)과 함께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쳐왔고 인근의 빈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 두계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날 오후 6시경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격동된 장사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다시 만세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시위군중의 수가 1,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시위대의 일부는 일제침략과 수탈의 교량 역할을 하던 철도선로의 파괴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보안법, 공무집행 방해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 후 1924년에도 만세시위를 하다 다시 체포되어 군산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지 3일 만에 고문 여독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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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의 독립운동가 비
한훈(1889 - 1950)은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고, 1919년에는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일본 고관들을 암살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배영직(1882 - 1926)은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쳤고,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지수(1845 - 1911)는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노인은사금을 주자 거절하며 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양기하(1878 - 1932)는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젊은이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그 후 남만에서의 마지막 무장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으나 일제의 습격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