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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평국 추도비
강평국(1900 - 1933)1900년 6월 19일 제주도(濟州島) 제주읍(濟州邑) 일도리(一徒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년국(姜年國)이며, 세례명은 아가다이다. 1910년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에 입학하여 1915년 3월 제1회로 졸업했다. 1918년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다. 동급생들인 최은희(崔恩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상의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강평국은 대한문 앞 등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같은 동급생인 최은희와 최정숙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강평국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1921년 제주에서 친구 최정숙과 함께 여성의 문맹 퇴치와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수원(女修園)을 설립하였다. 1924년 3월 8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여성의 수양기관인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26일 제주도 전체에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고자 불교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강평국은 사회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강평국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고수선과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고수선은 서울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고, 강평국은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강평국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15일 재동경 동부조선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인부(婦人部) 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3일 동경조선노동조합 서부지부 주최와 신간회 동경지회·노동농민당 성서(成西)지부 후원으로 고전회관(高田會館)에서 열린 ‘조선총독폭압정치(朝鮮總督暴壓政治) 폭로연설회(暴露演說會)’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외에 강평국은 1928년 1월 10일 재동경조선청년동맹과 학우회가 주최한 재동경청년단체 합동위원간담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콧트홀에서 창립된 이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발기회가 12월 27일 개최되었다. 박화성(朴花城)이 위원장에 강평국이 서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2일 동경제대기독교청년회관(東京帝大基督敎靑年會館) 개최되었으며, 박화성이 위원장, 강평국이 정치문화부 위원에 뽑혔다. 강평국은 일본에서 학업을 하며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면서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폐환이 더욱 악화되어 1933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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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자 독립유공자비(남면)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에 조성된 도시근린공원으로 독락정과 임씨가묘 등이 있다. 독락정은 1437년,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의 개국에 반대했던 임난수(林蘭秀)장군이 공주목 삼기현으로 낙향한 뜻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부사공 임목이 지은 정자이다.이후 나성동은 부안임씨의 집성촌이 자리하였다. 공원 내에는 과거 연기군 남면에 있었던 비석들과 함께 독립유공자 효행자 비가 있다. 해당 비석은 1993년 12월 연기군에서 군민의 문화유산을 남기고자 고장 내 효행자와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연기군 내 여러 지역에 세워져있으며 독립유공자로 성함이 새겨진 분들은, 임대수, 임헌규, 임휴철, 임헌성, 임영철, 임수철, 임현상, 임헌무 등 부안 임씨 출신 인물이 있으며, 오강표, 정낙진, 황희연, 황도연, 황득수, 심희수의 성함도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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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수 공적비
임대수(1882-1911)는 충남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남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고 1907년 정미조약의 체결 시에도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임대수는 충청남도 공주군, 천안군, 청양군, 당진군, 전의군, 직산군, 정산군, 은진군, 아산군, 평탠군 등 19개의 군을 전전하며 활약하였고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구속되어 있던 수백 명의 항일운동가를 구출해냈다. 임태수는 1911년 6월 16일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일본 제국 경찰과 교전하던 중 동지 6명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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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기념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연동면에서 세운 기념비석이다. 연동면사무소 복합커뮤니티센터 광장에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은 1919년 당시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이었다. 1919년 3월 26일 응암리 고정마을에서 횃불을 피워 사람들을 모아 독립 운동을 고취한 것을 시작으로, 3월 27일 노송리.예양리.아미산 정상에 이어 3월28일 송용리에 이르기까지 휏불을 피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3월 28일에는 충청남도 연기 군수가 면민들을 동원하여 시국 연설 강연회를 개최한 날로, 송룡리 주민들과 장홍진, 장기민 등도 참석하였고 ‘시국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지 말라’는 군수에게 반론을 제기한 일로 옥고를 겪은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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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진 구 묘
장홍진은 충남 연기(燕岐)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8일 연기군 동면(東面) 사무소에서 출장나온 연기 군수의 시국을 무마하려는 순회 강연이 열리자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론을 표고 돌아오는 길에, 이날 밤 장기민(張基民)과 함께 횃불을 놓고 1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주동자로서 일경에 붙잡혔다. 이 해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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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민 집
장기민은 1897년 3월 17일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결성 장씨 문중의 서당인 육영재(毓英齋)에서 장성휘(張星輝)의 지도 하에 학문을 수학했다. 장성휘는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낙향한 인물로 대성학교에서 사용하던 국사 교재를 가르쳤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연기군수는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각 면을 순회 강연하며 "시국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동면에서 이 연설을 지켜본 장기민은 "조선인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다가 연설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장기민은 평소 뜻을 같이하던 장홍진(張弘鎭)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3월 28일 저녁에 동네 주민들을 선도하여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1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기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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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진 집
장홍진(1899-1938)은 충청남도 연기의 3.1운동 독립유공자이다. 1919년 3월 28일 연기군 동면(東面)사무소에서 출장나온 군수가 시국에 대하여 설명하는 강연이 있었다. 장홍진은 그 곳에서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과 군수의 의견과 반대되는 질문을 하였고 이날 밤, 장기민(張基民)과 함께 횃불을 놓고 1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주동자로서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해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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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재(결성장씨 문중 서당)
육영재(毓英齋)는 연동면 결성장씨(結城張氏) 문중에서 160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당으로 ‘송동서숙(松東書塾)’, ‘송동숙(松洞塾)’, ‘송남서당(松男書堂)’ 등으로도 불린다. 문중서당(門中書堂)이란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학문으로 명망이 높거나 유력한 자산가 집안이 운영하며 건립·유지하여 온 사설교육기관이다. 육영재는 1921년에 신식 학문을 교육하는 기성학교를 개설하여 운영하다가 인근에 연동공립보통학교가 정식으로 개교됨에 따라 1926년에 기성학교를 폐교하였다. 그 후 결성장씨 문중에서는 광복 직후까지 서당계를 조직하여 한문 교육의 명맥을 이어 갔고, 현재까지 건물의 보수·유지와 전래하여 온 전적의 보존·관리에 힘쓰고 있다. 납세 거부 등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장재학·장재규 형제와 장화진(장재학의 아들)을 비롯하여 3.1운동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순국한 장홍진·장기민 등이 결성 장씨 가문이자 육영재 출신으로 알려져있다. 육영재는 2001년 5월 31일 연기군 향토유적 제39호로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6KM에 위치한 송용마을의 가장 북쪽 구릉지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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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학 의열비
장재학(1862-1919)은 충청남도 연기군 결성 장씨 가문의 사람으로 일제의 민적(호적) 조사와 납세 정책에 저항한 인물이다. 장재규(동생)와 장화진(아들)도 함께 일제에 저항하였으며 고초를 치렀다. 1915년 3월 12일 충남 연기군 조치원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 야나기사와 도지로(柳澤藤次郞)가 민적정리를 위해 동소에 비치된 민적부(民籍簿)를 가지고 민적조사를 시행했다. 이에 장재학은 동생 장재규와 논의한 뒤 "본인은 일본신민이 아닌데 일본 관헌이 조선 시대에 등록된 자신의 민적부를 소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동생과 함께 민적부 중에서 본인에 관계된 일부분을 찢어서 소각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5년 5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법 제258조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6년 4월 출옥한 그는 일제에게 세금을 한 푼도 바칠 수 없다며 납세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에 일제가 그의 집안 재산을 강제 압류하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헀지만, 그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1917년 1월 23일 그와 아우 장재규는 전남 고흥군 거금도로 유배되었고, 장남 장화진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1919년 1월 4일 고금도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장재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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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민 의열비
장기민은 1897년 3월 17일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결성 장씨 문중의 서당인 육영재(毓英齋)에서 장성휘(張星輝)의 지도 하에 학문을 수학했다. 장성휘는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낙향한 인물로 대성학교에서 사용하던 국사 교재를 가르쳤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연기군수는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각 면을 순회 강연하며 "시국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지 말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동면에서 이 연설을 지켜본 장기민은 "조선인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하다가 연설장에서 쫓겨났다. 이후 장기민은 평소 뜻을 같이하던 장홍진(張弘鎭)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3월 28일 저녁에 동네 주민들을 선도하여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1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기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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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섭 집
홍일섭(1878~1935)은 1919년 3월 30일 옛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홍일섭은 1913년 공직을 사입하고 낙향하여 국권회복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 위하여 신대리에서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제자를 양성하던 인물이었다. 홍일섭은 연기청년회와 뜻을 모아 함께 조치원 시장에서의 만세 운동을 기획했다. 연기청년회는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례하였다가 서울 3·1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맹의섭(孟義燮)·김재형(金在衡)·전병수(全炳壽)·이은식(李殷植) 등이 속해있었다. 이 일로 조치원의 헌병에게 붙잡힌 홍일섭은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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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섭 기적비
홍일섭(1878~1935)은 1919년 3월 30일 옛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홍일섭은 1913년 공직을 사입하고 낙향하여 국권회복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 위하여 신대리에서 사숙(私塾)을 열어 많은 제자를 양성하던 인물이었다. 홍일섭은 연기청년회와 뜻을 모아 함께 조치원 시장에서의 만세 운동을 기획했다. 연기청년회는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례하였다가 서울 3·1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맹의섭(孟義燮)·김재형(金在衡)·전병수(全炳壽)·이은식(李殷植) 등이 속해있었다. 이 일로 조치원의 헌병에게 붙잡힌 홍일섭은 일제의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