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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호 생가터
조봉호(1884 - 1920)는 제주 사람이다. 그는 1919년 5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 것을 동료 기독교인들과 협의하던 중, 서울에서 밀파된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접선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인 김창국(金昶國)·최정식(崔靜植)·김창언(金昌彦)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회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회원 1인당 2원씩 독립군자금 헌납을 결심하고 최정식의 집에서 임시정부헌장(臨時政府憲章)과 해외통신문(海外通信文) 등을 등사하여 전 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노출당하여 그와 최정식·김창국·문창래(文昌來)·이도종(李道宗)·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붙잡혔다. 그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 내의 군자금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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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환 집
강봉환(1867 - 1961)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시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항일 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강봉환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강봉환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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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악리출신 항일독립항쟁기(박주석, 강봉환)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박주석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하였는데, 이 때 박주석은 도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조직 편성 후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박주석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21년 7월 24일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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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홍 묘
문덕홍(1902 -1949)은 제주도 한림(翰林) 사람이다. 일본 배의 선원으로 근무하다가 상해에서 탈출하여 1941년 초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경비대원(警備隊員)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1943년 10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에 입당한 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원으로 근무하다가 동년 6월 서무국원을 겸직하였다. 1945년 봄에 국내비밀공작원으로 국내에 특파되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가 조국 광복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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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석 묘
김여석(1893 - 1961)은 제주도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 확산되자, 제주도내 서당 생도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신좌면(新左面, 현재 조천읍) 조천리(朝天里)에서 3월 21일 이래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당시 구우면(舊右面, 현재 한림읍) 낙천리(樂泉里)에서 서당 훈장으로 있던 그는 도내 서당 생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같은 동리의 서당 훈장 조무빈(趙武彬), 저지리(楮旨里)의 서당 훈장 박세현(朴世賢), 신좌면 조천리의 서당 훈장 신계선(愼啓善) 등과 연계하여 격문을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그는 거사에 앞서 고사를 지내고 격문을 붙이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0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및 도수규칙(屠獸規則)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 30일 통산)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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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홍 집
문덕홍(1902 -1949)은 제주도 한림(翰林) 사람이다. 일본 배의 선원으로 근무하다가 상해에서 탈출하여 1941년 초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1942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경비대원(警備隊員)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1943년 10월 2일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한국독립당에 입당한 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원으로 근무하다가 동년 6월 서무국원을 겸직하였다. 1945년 봄에 국내비밀공작원으로 국내에 특파되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다가 조국 광복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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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기념비
강문호(1899 -1986)는 제주도 남제주(南濟州)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31일 군산(群山)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3월 5일의 군산 만세시위 때 체포된 30여명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학생들이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재판을 받는 날로, 영명학교 4학년인 그는 이날 그들의 재판과정을 보기 위하여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30여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찰나, 그는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과 학우들이 묶여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방청객들이 이에 호응하여 재판장은 별안간 만세장으로 변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고등법원에서 소위 법정 소란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교회 목사로서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항상 일본 경찰·헌병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는 등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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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리출신 독립항쟁기(장용진, 홍경옥, 장병윤, 강공흡)
협재리출신 독립항쟁기는 협재리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활약을 기록한 사적이다. 본 사적에는 장용진, 홍경옥, 장석호, 강공흡의 독립항쟁기가 기록되어 있다. 장용진(1910 - 1983)은 1910년 5월 27일 한림읍 협재리에서 부 장보익, 모 김창숙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7세에 구우공립보통학교 제 4학년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시 날염공장에 취직 중, 1931년 9월 30일 노동쟁의에 참가하면서 더욱 항일 독립사상이 함양되어 동년 11월 20일 귀향하여 지사의 집에 향진복습소를 개설, 마을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다 검거되어, 1932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2년간의 언도를 받았고, 1933년 1월 중순경 홍경옥, 강공흡, 장병윤 등과 같이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각자의 독립항쟁의식을 높이면서 계속 항일운동을 하여 오다가, 1934년 7월 하순 홍경옥, 강공흡과 같이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 재정부를 맡아 조직 확대를 위하여 동지획득과 자금 조달에 힘쓰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 교편을 잡다가 1983년 7월 3일 타계하였다. 홍경옥(1912 - 1949)은 13세인 1924년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동교를 졸업하였으며 동교 재학 1926년 협재리 「소년회」에 가입하여「어린이」라는 월간지를 탐독하면서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1928년 4월부터 1929년까지 약 1년간 부산상업학교에서 공부하다 귀향하여 1930년 3월 용수리 개량서당 교사로 취직하여 12월까지 근무하면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윤한진과 만나면서 항일사상 이름 아래 1931년 3월 지사 및 장동윤, 강동흡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 5월 마을 아동들을 모아 글과 민족의식을 깨우치다 보안법 위반으로 피체되어 옥살이 하다 출옥한 장용진의 환영회를 개최하며 위로함과 동시에 동지들의 투쟁심을 격발시켰고, 그후 농민 대중에게 부담을 많이 주는 공립보통학교 이전에 반대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동지획득에 힘쓰다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1월 15일 타계하였다. 장병윤(1914 - 1983)는 이명은 장석호이다. 9세 때 구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세 때 복습과를 중퇴하고 수차 일본을 왕래하면서 민족차별에 분개 항일사상을 품고 있던 중, 1931년 3월 하순 윤한진, 홍경옥, 고창순, 장정호, 김이규, 김승옥, 강공흡 등과 회합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사회제도를 변혁하여야 한다며 찬성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1933년 9월에 구우공립보통학교를 동명리에서 한림리로 이전하는 것은 농민 대중의 부담만 가중시킴으로 반대 진정, 동년 12월에 동지 강공흡 결혼식 때 풍자적으로 사회제도의 비판은 물론, 1934년 7월에는 조직의 가두부를 담당 제주도 농민조합 활동을 통하여 항일독립 운동을 하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83년 월 4일 타계하였다. 강공흡(1917 - 1974)은 15세때 구우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였는데 재학중 13세 때 협재 소년회에 가입하여「어린이」라는 한글잡지를 탐독하면서 항일독립사상을 갖게 되었다. 1932년 5월 마을에서 향진복습소를 개설 마을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다 일경에 피체되어 옥살이를 하다 출옥한 장용진을 홍경옥, 장병윤 등과 같이 격려 환영하는 모임을 가졌으며, 1933년 1월 중순 홍경옥, 장용진, 장병윤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각자의 독립항쟁의식을 높이면서, 동년 9월 초순에는 농민 대중에게 부담을 많이 주는 공립보통학교 이전에 반대하고, 1934년 7월 하순에는 홍경옥, 장용진 등과 같이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소년부를 담당하였고 조직 확대를 위하여 소년동지 획득에 힘쓰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74년 6월 25일 타계하였다. 정부는 위의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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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현 독립항쟁기
김중현(1914 - 1974)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9년 7월경부터 가을 무렵까지 제주읍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손 신부(孫神父:본명 다우슨 패트릭)에게 수 차에 걸쳐, 제주도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는 대규모의 격납고가 설치되어 30대 가량의 비행기가 계류 중이고 다수 군인이 주둔하며 해상에도 항상 수척의 군함이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과, 모슬포 비행장에서 발진한 일본 해군기가 바다를 건너 중국의 상해(上海)를 폭격하다 중국군의 포격을 받아 퇴각하던 중 추락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또한 1940년 12월부터 1941년 여름에 걸쳐 위의 손 신부 및 허봉학(許鳳鶴)·하성구(河成九) 등 다른 신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수 차에 걸쳐, "일본의 신문들은 독영전쟁(獨英戰爭)에서 독일이 대승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실은 허위보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황은 영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군은 물자부족으로 인하여 결국 패전할 것이다", "정감록(鄭鑑錄)의 예언에 따르더라도 중일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날 것이다"는 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로써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손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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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강 독립항쟁기
이운강(1895 - 1972)은 황해도 장연(長淵) 사람이다. 1919년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1회를 졸업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그곳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8월 북로군정서 김좌진(金佐鎭) 사령관의 요청으로 북간도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설치된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 제4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10월 독립군 전투사상 미증유의 대승전을 거둔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만주에서 계속 육영사업 및 항일 투쟁을 하였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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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독립항쟁기
최정숙(1902 - 1977)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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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묘
최정숙(1902 - 1977)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