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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 묘
1909년 8월 충북 영동군(永同郡) 양내면(陽內面)에서 조석우의진(趙錫祐義陣)의 부장(副將)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유력한 의병장들의 전사와 일본 군경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점차 위축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북 운봉(雲峰) 출신의 조석우는 1909년 8월 23일 충북 영동군 양내면 영국사(寧國寺)에서 장군선(張君先)ㆍ조덕장(趙德章)ㆍ권덕원(權德元) 등과 모임을 갖고 삼남대장(三南大將)이라 하여 총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장군선ㆍ조덕장ㆍ권덕원은 부장(副將), 이기덕(李起德) 등은 병졸(兵卒)이 되었다. 이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인을 전부 살해하고 철도 정거장 등 일제의 침략 거점을 파괴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격문을 띄우는 한편, 양남면(陽南面) 일대에서 군사를 모집하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김명식은 조석우의진에 참여하여 각 처에 격문을 배포하고 주변 마을에서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09년 9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이른바 내란죄(內亂罪)로 유형(流刑)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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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성 묘
김시성(1910 - 1943)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28년 6월 광주(光州)고등보통학교 5학년생 이경채(李景采)가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피검 기소되고 학교 당국으로부터도 퇴학당한 데 항거하여 동교생 300여 명이 동맹휴교를 단행했을 때, 4학년생이던 그는 맹휴 주도자로 활약하다 다른 25명의 학생과 함께 퇴학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하순 광주 읍내 부동정(不動町) 그의 하숙집에서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1926년 11월에 창립되었다가 기밀 누설을 우려하여 1927년 3월에 형식적으로 해체한 항일학생결사 성진회(醒進會) 계열의 비밀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매월 1, 2회씩 회합하면서 사회과학 이론을 연구하고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면서 그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1년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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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배 묘
김운배(1899 - 1934)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서울에서의 3·1독립만세시위운동이 호응하여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연 나흘간 주민 수백 명이 참가한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시위는 그가 김시범(金時範) 등 16명과 함께 사전에 계획하여 주도한 것이었다. 그 후 일경이 시위 주동자 검거에 나서 동지들이 붙잡히기 시작하자 제주도를 탈출하여 부산을 거쳐 1920년 2월경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상해에서 김창숙(金昌淑)과 손영직(孫永稷)을 만나 독립운동에 이바지할 길을 찾던 그는 두 사람으로부터 국내로 들어가 군자금 모금에 대한 협조 요청 편지를 경남 밀양군(密陽郡) 밀양면의 손종현(孫宗鉉) 외 13명에게 전달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라는 지시를 받고서 1920년 12월 상순 부산으로 입국하여 임무 수행에 착수하려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1921년 6월 2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동년 8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역시 징역 4년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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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식 묘
황진식(1900 - 1976)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제주군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은(金詩殷)·김시범(金時範)·송정왕(宋正王)·한백흥(韓伯興)·김재일(金在一)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후 인근 마을과 연락하여 주민들을 동원, 김형배(金瑩培)가 만든 기를 세우고 1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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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출신 애국선열기념비
1919년(기미년) 2월 21일 조천에서 일어선 독립만세운동에 한철영은 면민의 선봉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에 정부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93년 3월 1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31년 1월 5일 본 함덕 출신 한영섭 동지가 서거한 그 시신이 정든 고향에 돌아오니 고종건, 김일준, 김재동, 김진희, 부생종과 함덕 청년 동맹회원들이 장례 행렬에 수십장의 만사(輓詞)를 들고 동지들과 제휴하여 독립혁명가를 부르며 운구하여 장례를 지냈고 동년 3월 17일 동지들은 본리 동쪽 고두물 앞거리에 적광 한영섭 기념비를 세웠고, 이 사건을 주동한 인물들은 연행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김재동은 1932년 3월 14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9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고종건, 김진희에 1993년 4월 13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애국동지들은 1932년 3월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기 위하여 비밀결사대인 제주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세부활동으로 향동회 민풍진흥회를 조직하여 애국동지들을 포섭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야학을 통하여 부녀자들에게 민족의 역사와 언문(한글)을 가르치며 민족사상을 고취하여 일제 침략주의 정책에 항거하다 일경에 적발되어 1934년 8월에 김일준, 부생종은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부생종은 혹독한 고문으로 목포형무소에서 1936년 6월 28일에 28세 젊은나이로 옥사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김일준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현사선은 1940년 3월 조천소비조합의 항일운동활동이 시발로 일제를 비방하는 내선 일체론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함덕 청년동맹회에 가입 청.부녀자에게 민족사상을 가르치며 반일 운동을 하다 1941년 9월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리어 1993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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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흥 송정옥 기념비
한백흥(1897 - 1950)은 제주에서 태어났으며, 제주도의 3.1운동은 신좌면 조천리에서 시작되었다.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은 전국 각지에서 한국독립을 선언하는 시위운동이 발발되자 이에 제주도에서도 한국독립의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조천리(朝天里)의 유지 김장환(金章煥)은 당시 서울 휘문학교 재학생으로 서울에서 3.1독립선언 이후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3월 15일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21일 오후 3시경 한백흥 등은 물론 인근의 주민과 서당 학생 등 약 500~600명의 인원이 조천리 ‘만세동산’으로 모였다. 이들은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큰길로 나섰다. 이때 달려온 일본 무장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거나 체포되었다. 한백흥은 조천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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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애도비
동지애도비는 일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던 한영섭이 사망하자 ‘동지적광한영섭기념비(同志赤光韓永燮記念碑)’라 적힌 비를 건립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이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늘니인(눌린)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 흘린(피 뿌린) 동지였다.'는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이 들어간 비문을 새겨넣었다. 동료는 한영섭의 장례식에서 장례식 때 깃발을 들고 혁명가를 부르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비를 압수한 뒤 비를 세운 김일준, 부생종, 김재동, 양공근, 김두성, 고종건 등을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일로 각각 1년에서 1년 6개월의 형고를 겪었다. 한영섭의 묘비는 조천주재소에 압류되었다. 해방 후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네 명의 인물들에게 한영섭의 묘비문을 새겨넣으면서 본 비가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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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생종 집
부생종(1909 - 1936)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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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생종 묘
선생이 옥사하자 이를 분하게 여긴 동지들이 그의 무덤 앞에 '獄死夫生鍾之墓(옥사부생종지묘)'라는 비석을 세워 그의 영혼을 위로하려 하였으나, 이 비석의 '옥사'라는 글귀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심으려는 것이라 하여 동지들이 다시 잡혀가 옥고를 치렀고 비석은 조천주재소 창고에 압수되었다. 할 수 없이 '夫生鍾之墓'라고만 새긴 매우 작은 비석을 세웠다가 해방이 되자 지서 창고에서 그 비석을 찾아다 다시 세웠었는데, 1982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나서 1984년 북제주군수 명의로 '殉國烈士夫生鍾之墓'라는 커다란 비석이 다시 세워지면서 우리 민족의 기개를 표출하던 그 비석은 우리 고장의 관습에 따라 무덤 앞에 묻어 버렸다. 2006년에 다시 꺼내어 산담 옆에 세워 두었다가 2008년에 조천리 항일기념관으로 가져다가 다른 비석들과 함께 마당에 세웠다. 부생종(1909 - 1936)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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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권 쟁취를 위한 항일운동발상지
본 비는 1932년 5월에 상추자도 영흥리 어민들이 생존권 쟁취를 위해 벌인 항일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사적이다. 그들은 추자도 부근 연안어장에서 일본 어부들이 유자망어업이라는 선진기술로 고기를 마구 잡아 남획으로 연안 어족이 고갈되는 것에 격분하였다. 이에 생존권 쟁취를 위하여 항일운동을 일으켜 일본 어부들과 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은 강권으로 주동자 12명을 검거하여 구속하였으며, 동년 7월 8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소요죄(騷擾罪)로 김봉수, 박병석 2명은 징역 7월, 또 김기형, 이사문, 추남수, 김득수, 박천석, 원일개, 고일주, 원용현, 박복순, 고태욱 등 10명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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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어민 대일항일기념비
추자도어민 대일항일기념비는 추자도의 어민들이 일제의 횡포와 수탈에 강력하게 저항한 2차례의 사건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제1차 어민항쟁은 1926년 5월 14일 해조류(천조) 공동판매를 강요하는 어민조합에 항거하여 예초리 어민 700여 명이 집단으로 항쟁한 일이다. 그 결과 21명이 검거되어 김종만은 징역 1년, 김학연, 김후배는 징역 8개월, 황명채 외 3명은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 제2차 어민항쟁은 1932년 5월 추자도에 거주하던 일본인 어민 사와다(澤田)가 삼치 유자망으로 추자도 어민 내수면 어장터를 침범하여 추자도어민들이 총궐기하였던 사건으로 그 결과 박천석, 원성채, 김봉수, 박병석 4명이 징역 3개월의 형을 받았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일제강점기 추자도 어민의 숭고한 뜻을 기념비에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2018년 9월 추자면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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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휘 집
이창휘는 변호사로서 독립운동 관련의 수많은 '사건'에 자진 변호를 맡거나 무료 변호를 통하여 애국적 의지를 드높이는 한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의 중앙이사(中央理事)로서 농촌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1925년 10월 29일 천도교의 농민조직이었던 조선농민사의 창립총회에서 중앙이사로 선출된 그는 조선농민사 주최 농촌문제강연회의 주요 연사로 활약하면서 주로 농민들에게 필요한 법률상식 등을 강연하는 등 농민 계몽에 앞장 섰다. 한편 1926년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 주동 학생들이 일제 법정에 서게 되자, 그는 이인(李仁) 등과 함께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변론함으로써 민족 변호사의 행동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1927년 11월 일본 삼릉회사(三菱會社)가 수력전기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일경을 앞세워 한국인의 토지를 강제 매수하려 하자, 허헌(許憲)과 함께 법률투쟁을 전개하여 토지침탈을 저지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1928년 경남 도청년연맹(道靑年聯盟)의 항일투쟁이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자진하여 변호를 섰으며, 1929년 4월 공명단(共鳴團)의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망우리에서 일제의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다가 붙잡힌 '공명단 의거'의 공판에서도 이인·허헌과 함께 민족적 입장에서 변호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과 광주학생운동, '간도공산당 사건'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변호를 많이 맡아 사상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중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1934년 9월 9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