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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천 생가터
이문천(1892-1941)은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오후 3시경 이문천을 비롯한 5,6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미밋동산에 모여들었을 때 김시범(金時範)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김장환(金章煥)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문천을 비롯한 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후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연창하면서 시가지를 향하여 시위하였다. 3월 23일의 시위는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조천 5일 장터에서 이문천, 백응선(白膺善)), 김년배(金年培) 등이 주도하였다. 특히 이문천은 100여 명의 시위대를 지휘하여 함덕리로 향하였다. 함덕리에 이르자 청년과 주민들의 합세로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증가하여 시위는 점차 확산되었다. 3차 시위 때 이문천은 백응선 등과 함께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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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찬 생가터
김용찬(1884-미상)은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휘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장환(金章煥)은 서울에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독립운동은 순조롭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그는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겠다는 뜻을 품고, 김시범(金時範)을 포함한 14명의 동지들과 함께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올 때 그는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몰래 가지고 들어왔다. 시위 군중은 3월 21일 오후 3시 조천리 미밋동산에 모였는데, 조천‧신촌(新村)‧함덕리(咸德里) 주민 500∼600여 명이 모였다. 김시범의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지켜보던 일본 경찰들은 만세운동이 4일간 계속되자, 24일날 강제 진압 및 핵심 인물 검거에 나섰다. 이로 인하여 만세운동의 주동자 23인이 체포되었으며, 검거된 23명 가운데 14명은 법원에서 실형을 받았다. 이때 함께 참여했던 김용찬은 제주도 내의 도민들을 선동하여 치안유지법을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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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원 생가터
김필원(1900-1954)은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리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항일 운동은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김장환(金章煥)이 서울 3·1운동에 참가한 뒤 3월 15일 귀향하여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에게 서울의 소식을 알리면서 구체화되었다. 김시범을 주축으로 백응선(白膺善)·박두규(朴斗圭)와 함께 미밋동산[味毛峙, 후일 만세동산으로 개칭]에서 만세 운동을 계획할 때 김필원도 동참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김필원은 미밋동산으로 가서 5백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어 시위를 주도하면서 독립 만세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김필원은 이 일로 체포되어 1931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1931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제주도지부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정체불명인에게 암살당하였다. 1995년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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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은 생가터
김시은(1887-1957)의 호는 농산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제주에도 그 영향이 미쳐왔다. 제주 출신 김장환(金章煥)은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쫓기게 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조천으로 왔다. 조천 지역 유지 숙부 김시범(金時範)에게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김시범은 거사를 결심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부터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서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모았다. 14인의 동지는 김시은을 비롯하여 김시범·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이었다. 거사일은 3월 21일로 결정되었고, 신촌리·함덕리 등의 인근 마을에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알려주며 모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시은은 김시범·김장환·황진식 등과 함께 제주성내로 행진을 강행하여 신촌리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하였다. 시위대는 경찰 30여 명과 충돌하였고, 김시은 등 13명이 체포되었다. 김시은은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 4월 8일 만기 출감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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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응선 생가터
백응선(1896-1920)의 호는 천야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 만세 시위 운동에서 주동자 9명이 체포된 후, 백응선은 박두규(朴斗圭)·김필원(金弼遠) 등과 더불어 3월 22일 제2차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시위에서 박두규·김필원이 체포되었다. 3월 23일 제3차 시위가 조천 장터에서 시발되었고,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함덕리까지 행진하였다. 백응선은 김년배(金年培)·이문천(李文千) 등과 더불어 제3차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문천 등 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6개월 후인 1920년 3월 28일 네 살 된 딸 하나를 남겨 두고 25살로 요절하였다. 1921년 투옥 동지 13명은 동미회(同味會)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고 백응선을 기리는 비석을 묘지에 세웠다. 비석 정면에는 고백응선군지묘(故白膺善君之墓)라고 쓰고 측면에 13명 동지의 이름을 썼다. 정부는 199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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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배 생가터
김형배(1901-1944)는 제주 사람으로, 이명은 김영배이다. 1919년 3월 21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김시범의 의뢰로 태극기 4매를 만들고 이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 100여 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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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식 생가터
황진식(1900-1976)은 1919년 3월 21일 제주군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은(金詩殷)·김시범(金時範)·송정왕(宋正王)·한백흥(韓伯興)·김재일(金在一)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후 인근 마을과 연락하여 주민들을 동원, 김형배(金瑩培)가 만든 기를 세우고 1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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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생가터
김희수(1899-1985)는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 항일 운동은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김장환(金章煥)이 서울 3·1운동에 참가한 뒤 3월 15일 귀향하여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에게 서울의 소식을 알리면서 구체화되었다. 김시범을 주축으로 하여 14명 동지를 규합하는 것으로부터 거사가 준비되었고, 김희수는 14명 핵심 세력의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제1차 조천 만세 운동은 군중 5백여 명이 시위 행진을 벌이면서 전개되다가 제주경찰서에서 파견한 증원 경찰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김희수는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김용찬(金容燦)·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황진식(黃鎭式)·김장환(金章煥)·김경희(金慶熙)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천 만세 시위 운동의 핵심 인물 14명은 출감 이후 1921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다. 동미회의 조직원들은 감옥에서 새끼를 꼬아 얻은 약간의 금액을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하고 김희수로 하여금 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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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규 생가터
박두규(1897-미상)는 1919년 3월 21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서울에서 3·1독립선언 이후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김장환(金章煥)과 그의 백부 김시우(金時宇) 등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박두규를 비롯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들은 3월 21일 오후 3시경 인근의 주민과 서당 생도 등 약 500~600여 명과 함께 조천리 만세동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대열이 큰 길로 나서자 일제 무장대가 출동하여 박두규 외 12명이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2일~24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박두규는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두규는 1920년 10월 중순 경 제주 성내에 들어와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를 선전하던 국민협회(國民協會)의 총무 정병조(鄭丙朝)에게 협박장을 보냈다가 다시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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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륜 생가터
고재륜(1899-1980)은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김장환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1919년 3월 1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조천 지역 유지인 김시범(金時範)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김시범은 거사를 결심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金時殷)·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부터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모았는데, 고재륜을 비롯하여 김시범·김시은·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이었다. 제주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인 3월 21일이 거사일로 잡혔다. 1919년 3월 21일 1차 시위가 벌어졌다. 5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는 경찰관주재소 서쪽으로부터 미밋동산까지 행진하였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데서 절정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조천 비석거리를 돌아 제주성 안으로 향하던 중 신촌에 이르러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 조천의 경찰관주재소의 경찰은 5명에 불과해서 시위를 막을 수가 없었다. 간다[神田] 순사부장이 제주경찰서에 병력 증원을 요구하여 30여 명의 순사들이 도착해 신촌에서 대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1차 시위에서는 경찰과의 충돌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13명이 연행되었다. 14인 동지 중 이날 연행자는 고재륜을 비롯한 김시범·김시은 등 9명이었다. 고재륜은 1919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서귀포로 이사하여 남제주주조주식회사를 경영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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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범 생가터
김시범(1890-1948)의 자는 선구, 호는 양오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제주시 조천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차례 걸쳐 연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지역도 조천에서 함덕·신흥·신촌 등으로 확대되었다. 최초의 거사일은 유학자로 존경받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인 3월 21일에 맞춰 김시범이 김시은(金時殷)[1887~1957]과 함께 거사계획을 수립하여 3월 21일에 시위를 주도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과 함께 조선 각처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제주도에서도 이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김장환(金章煥)[1902~?]에게 부탁해 독립만세라고 쓴 기 4개를 가지고 3월 21일 미밋동산(조천만세동산)에서 1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마을을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해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김시은과 같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20년 4월 8일에 만기 출소한 뒤 동지 14명이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고, 첫 사업으로 25세의 나이로 요절한 항일운동가 백응선(白膺善)[1896~1920]의 묘비를 건립하였는데, 이때 김시범은 비문에 일제의 연호가 아닌 단기 연호를 썼다. 이후 김시범은 김연배와 함께 사숙(私塾)이나 야학을 통하여 후배들을 가르쳤으며, 조천 소비조합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기인 1945년 9월부터 1946년 7월까지 조천면장과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위원장, 1946년에 결성된 좌익세력의 통일전선체였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부의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1947년에 일어난 3.1절 기념 시위사건으로 미군정에 검거되었으며, 1948년 11월 25일에 부인 신경보(愼敬輔)와 함께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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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생가터
김경희(1896-1952)는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제주도 조천 지역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촉발시킨 사람은 김장환(金章煥)이었다. 김장환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다 쫓기게 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6일에 제주에 도착하였다. 김장환은 김시범(金時範)을 찾아 거사를 논의하고, 김경희를 비롯하여 고재륜(高載崙)·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희수(金熙洙) 등의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21일로 정하였는데, 이 날이 제주 유림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이다. 3월 21일 1차 시위가 벌어졌는데, 약 5백 명이 참여해 미밋동산까지 행진하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시위대가 신촌리에 이르러 제주경찰서에서 파견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3명이 연행되었을 때, 김경희도 연행되었다. 김경희는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지만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3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