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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송덕비
최정숙(1902 ~ 1977)은 제주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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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애국지사 기념비
강평국은 동급생인 최은희(崔恩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상의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강평국은 대한문 앞 등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같은 동급생인 최은희와 최정숙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강평국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1921년 제주에서 친구 최정숙과 함께 여성의 문맹 퇴치와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수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 3월 8일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에서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여성의 수양기관인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26일 제주도 전체에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고자 불교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강평국은 사회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강평국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고수선과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고수선은 서울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에 입학하였고, 강평국은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강평국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15일 재동경 동부조선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인부(婦人部) 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3일 동경조선노동조합 서부지부 주최와 신간회 동경지회·노동농민당 성서(成西)지부 후원으로 고전회관(高田會館)에서 열린 ‘조선총독폭압정치 폭로연설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외에 강평국은 1928년 1월 10일 재동경조선청년동맹과 학우회가 주최한 재동경청년단체 합동위원간담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콧트홀에서 창립된 이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발기회가 12월 27일 개최되었다. 박화성(朴花城)이 위원장에 강평국이 서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2일 동경제대기독교청년회관(東京帝大基督敎靑年會館) 개최되었으며, 박화성이 위원장, 강평국이 정치문화부 위원에 뽑혔다. 강평국은 일본에서 학업을 하며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면서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폐환이 더욱 악화되어 1933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수선(1898~1989)은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학교에서 일본교사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박희도(朴熙道)의 지시를 받아 학생을 동원·인솔하여 탑골공원으로 가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동년 3월에는 유철향(兪喆鄕)의 집 지하실에서 신경우(申敬雨) 등 동지 학생들과 모여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적색 댕기를 수천 매 제작하고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각 학교에 배포하게 하였고 신경우(申敬雨)·김숙정(金淑貞)과 벽보를 붙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년 3월 중순경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내와 연락하는 사무를 보다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동년 11월경 귀국하여 370원을 모금해서 박정식(朴偵植) 편에 송금하고 일본(日本)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 동경(東京)에서 동지 이덕요(李德耀)·이낙도(李樂道)·이의향(李義鄕) 등과 상야공원(上野公園)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일경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항일용의자로 고광수(高光洙)와 함께 붙잡혀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아 손가락이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정숙(1902~1977)은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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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경 묘
김두경(1910 ~ 1937)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그는 1931년 6월 제주청년동맹(濟州靑年同盟) 읍내(邑內) 지부에 가입하여 강창보(姜昌輔)와 함께 조직 확대에 힘을 쏟으며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6일 그는 송성철(宋性徹)과 함께 국제무산청년일에 시위투쟁을 벌이기 위해 선전물을 작성·인쇄하는 한편 거사 당일날 인쇄물을 각처에 배포하였다. 또한 1931년 10월 동지들을 포섭하는 한편 11월 7일 러시아혁명일을 기하여 축항 인부 40여 명을 지도하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축항 인부를 대상으로 항일 사상을 전파하며 조직원을 포섭해 갔다. 그러던 중 1932년 초 강창보가 일경에 발각 붙잡히자, 그는 조직 재건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32년 5월 목포지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았다. 그는 출옥 직후 활동을 재개하여 1932년 6월 부병훈(夫秉勳)·김경봉·김일준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면서 제주도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케 하였으며, 1933년 8월에 정충조(鄭忠朝)와 힘을 합하여 정세 판단에 따른 운동노선과 방침을 정하고 조직 활동의 범위를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1934년 말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붙잡힌 그는 1935년 1월 7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병보석으로 출옥 후 1937년 7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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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유배길 편지비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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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연사
문연사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귤암 이기온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와 지사들이 시설한 제단이다. 귤암 선생은 제주에 유배 온 후 면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향리후진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지난 1977년 신제주가 건설되면서 도시 계획에 저촉되어 이곳으로 이설하였으며, 지금도 여러 후학과 뜻있는 사람들이 음력 정월 중정에 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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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계 광복의사 경모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될 당시 문연서숙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12인의 젊은 유림들이 집의계를 결성하고 연미마을 망곡단에 모여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뜻으로 바위에 조설대(朝雪臺)라 새겨 당시 항일구국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땅의 백성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왜놈을 일도일검에 살육할 것을 선서했던 피 끓는 항일의거의 결의는 도내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 결의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집의계는 격변의 세월 속에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집의계 12광복의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그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12월 1일 ‘제1회 제주 오라 조설대 집의계 12광복의사 경모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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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의사비
조설대(朝雪臺)는 한일 강제합방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의 마애명(磨崖銘: 암각문)을 새긴 곳이다. 제주 애국지사 12인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곳에 모여서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하고, 이 바위에 그 맹약을 새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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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언 묘
김상언(1873 - 1965)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승려로서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승려인 그는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상언은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와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다음에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하여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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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언 독립항쟁기
김상언(1873 - 1965)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승려로서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승려인 그는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상언은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와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다음에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하여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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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규 추모비
박두규(1897 - 미상)는 1919년 3월 21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서울에서 3·1독립선언 이후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김장환(金章煥)과 그의 백부 김시우(金時宇) 등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박두규를 비롯하여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들은 3월 21일 오후 3시경 인근의 주민과 서당 생도 등 약 500~600여 명과 함께 조천리 만세동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대열이 큰 길로 나서자 일제 무장대가 출동하여 박두규 외 12명이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2일~24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박두규는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박두규는 1920년 10월 중순 경 제주 성내에 들어와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를 선전하던 국민협회(國民協會)의 총무 정병조(鄭丙朝)에게 협박장을 보냈다가 다시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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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보 묘
강창보(1902 - 1945)는 제주도 사람이다. 1920년대 초 서울에서 청년학관을 다닐 무렵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1924년 고향 제주로 내려가 사상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교육부 간사로 활동하면서 제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신사상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1925년 4월 전국적 사회주의단체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에 참가하여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모순, 계급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운동에 전념하였다. 1926년에는 신인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청년동맹을 결성하는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제주지회 조직에 힘썼으며, 동년 8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제주도 야체이카 조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8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경기도 검찰부에 넘겨져 2년여 동안 구금되어 고초를 치르다가 1930년 12월 2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1월초 제주도로 돌아 온 그는 제주읍(濟州邑, 현재 제주시)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제주지역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갖으며, 조직원을 확보하고 사회주의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5월에는 청년동맹(靑年同盟) 출신 신재홍(申才弘)·이익우(李益雨)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제주야체이카는 사회 각 부면의 청년·여성·노동자그룹 등 제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제주야체이카는 1931년 9월 세금불납운동, 강제묘목배포 반대투쟁 등을 지도했으며, 일제강점기 어업 노동자의 투쟁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인 1932년 1월 해녀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해 3월 일경에 체포된 그는 유치소에서 탈출한 후, 일본 오사카[大阪]로 피신하였다. 이후 도쿄[東京]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한 그는 1939년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고,『朝鮮新聞』의 발간을 지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치다가 1943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1월 7일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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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관순 집
강관순(1909 - 1942)은 제주 사람이다. 1926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영명학교 교사로서 야학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30년 3월 제주도 구좌면(현재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서 신재홍. 오문규 등과 함께 비밀결사 혁우동맹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혁우동맹은 제주청년동맹과 그 산하지부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비밀결사 형태로 새롭게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였다. 혁우동맹은 주로 청년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고취 및 대중 계몽을 활동의 주요 방침으로 정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청년부 책임을 맡아 청년단원 포섭에 힘을 쏟았다. 혁우동맹은 1931년 6월 상순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로 새롭게 조직을 정비해 갔는데, 그는 당외기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제주도야체이카는 구좌면 등지의 해녀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사회 각 방면의 운동단체를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932년부터 구좌면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주 해녀의 항일시위운동에는 제주도야체이카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당시 제주 해녀들은 해녀어업조합의 어용화와 해산물 매수가격을 둘러싼 부정에 항의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000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까지 몰려와 시위를 벌이는 등 그 여파가 거세지자, 해녀 및 청년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속하였다. 해녀대표 3인을 구속하고, 해녀시위의 배후조직으로 강창보를 비롯한 100여 명의 사회주의 운동가를 체포하였다. 강관순은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가를 데리고 함경도 청진으로 이사했으나, 옥중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1943년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