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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묘
최정숙(1874 - 1908)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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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대도 항일기념비
무극대도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1860년 종교체험에서 받은 한울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천도교 교리를 의미한다. 끝없이 훌륭한 진리라는 뜻이다.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 4월 초5일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라는 <용담가 龍潭歌>의 구절은 1860년 4월 5일의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최제우의 종교적 신념을 결정적으로 굳어지게 하였던 하느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요컨대 세상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모시게(侍天主)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끝없이 훌륭한 도가 되는 까닭은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가 얻어지기(侍天主造化定)” 때문이다. 여기서 ‘조화가 얻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造化]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면 “온갖 사물들에 대하여 깨달아진다(萬事知)”는 것을 말한다. 최제우는 종교체험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을 모시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방법을 마련하였는데 중심이 되는 것은 21자로 된 주문으로서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至爲天主之字)”이다. 이 주문을 외움으로써 하느님을 정성껏 모시는 종교가 바로 동학이다. 무극대도는 제주에서 활동했던 민족종교 중 하나로, 독립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항일기념비는 총 21인의 교인이 일경에 체포되어 수형된 사실을 기록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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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호 선교기념비
조봉호(1884 - 1920) 목사는 제주 사람이다. 그는 1919년 5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 것을 동료 기독교인들과 협의하던 중, 서울에서 밀파된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접선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인 김창국(金昶國)·최정식(崔靜植)·김창언(金昌彦)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회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회원 1인당 2원씩 독립군자금 헌납을 결심하고 최정식의 집에서 임시정부헌장(臨時政府憲章)과 해외통신문(海外通信文) 등을 등사하여 전 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수집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노출당하여 그와 최정식·김창국·문창래(文昌來)·이도종(李道宗)·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붙잡혔다. 그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 내의 군자금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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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적거터
남강 이승훈(1864 ~ 1930)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1907(광무 11)년 평양에서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건립하는 한편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 정신으로 교육에 힘쓰다, 1911년 5월 신민회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해 9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구와 경성에서 4년 2개월 여 간 수감되었다. 1915년 가출옥 후 세례를 받은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 초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이 송진우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을 결의하고 선언서 및 의견, 청원서를 작성하기로 하며 사회 주요 인사를 포섭하려 하였는데 이 때 최남선은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을 지니고 안면이 있던 이승훈을 포섭하기로 하였다. 2월 11일 최남선은 이승훈을 상경하게 하였고 일본 헌병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김성수의 집에서 송진우와 만나게 하였다. 기독교 측의 독립선언 참가 요청을 승낙한 이승훈은 독립운동 계획의 취지를 기독계 인사들에게 설명, 동지를 규합했으며 천도교 측과도 접촉하였다. 이후 천도교 측의 주장에 따라 독립청원의 제출이 아닌, 독립 선언을 하기로 결의하고 운동 전개를 계획, 기독교 측 대표로써 활동하게 된다.고종 황제의 국장 직전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결의하고, 2월 27일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의견 청원서의 초안을 회람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28일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확정하면서 선언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7월에 가출옥으로 출감하였다. 출옥 직후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를 정비한 후, 1924년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했다가 5개월여 만에 사임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오산학교의 경영에 힘쓰다가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해당 사적은 이승훈 선생이 1911년 5월 피체 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당시 적거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남강은 이곳에 적거하는 동안 매일 교회에서 강설하는 한편 제주인들에게 교육과 개화운동이 일어나야 산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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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여학교 교지
신성여학교는 1909년 10월에 프랑스인 선교사 말셀로 구레(우리 나라명 具瑪瑟) 신부가 우리 나라의 낙후된 여성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신성여학교이다. 제주도에서 최초로 설립된 여학교로서, 제주시 삼도동에 있는 향사당을 교사로 하여 4년제 보통과로 출발하였다. 초대 교장에 김시진이 취임하고 교사는 홍두표(洪斗杓)·고원봉(高元鳳)·고분도(高芬道), 김아나다시아 수녀 등이었으며, 최초로 10여 명의 여학생이 입학하였다. 곧이어 보통과 외에 각 1년제의 유치과와 보수과를 신설하였다.당시의 교과목은 성경·수신·국어·이과·산술·국사·한문·수예·재봉·원예·창가·도화 등이었다. 1914년 제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으며, 이어 제2회 6명, 제3회 16명 등을 배출하였다. 그 뒤 설립자인 구마슬 신부가 전주로 전출되자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 기회를 노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1916년 7월 설립 7년 만에 재학생 150여 명을 남긴 채 휴교의 비운을 맞았다. 이어 교사불법명도령으로 폐교를 당하여 교사를 일본인 본원사(本願寺)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뒤 졸업생들과 지방 유지들이 재개교를 기도하였으나 이룩되지 못하다가 광복 후 최정숙(崔貞淑)·홍완표(洪完杓)·고창호(高昌昊) 등을 중심으로 학교재건을 추진하여 1946년 9월 신성여자중학원으로 개교하였다. 1947년 10월에 신성유치원을 부설하고, 1949년 8월 신성여자중학교로 정식인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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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집
김형수(1905 - 1988)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27년 4월 9일 제주면 삼도리(三徒里)의 자기 집에서 고병희(高秉禧)·강기찬(姜箕贊)·조대수(趙大秀)와 함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비밀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매월 한 차례씩 모임을 갖고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하며 동지규합에 힘쓰는 한편, 1927년 10월 소비조합(消費組合)을 결성하여 일본상품불매운동을 벌여 나갔다.1929년 5월 위 독서회 회원들은 우리계(宇利 )를 조직하였는데, 우리계는 우의돈목(友誼敦睦), 애경상문(哀慶相問), 생활향상을 표방하는 이면에 무정부주의적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제주도의 전통사회에 바탕을 두고 무정부주의 사회를 실현코자 한 것이 주목되는 점이었는데, 그리하여 도청·은행·금융·조합·학교 등의 직원, 교원과 도내 유지들이 계원으로 대거 참여하였고 그들은 1929년 9월 도내 각 동리에 야학을 설립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무정부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 사실이 일경에 포착됨으로써 그는 1930년 7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동년 12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931년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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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독립항쟁기
강문호(1899 ~ 1986)는 남제주 사람으로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1899년 3월 9일 康利錫(강이석) 모 金孝貞(김효정)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1919년 당시 영명학교 4학년으로 재학하던 중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열렸던 재판을 방청하였는데, 3월 5일 군산 만세시위 때 체포된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학생 30여 명이 재판정으로 들어서자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과 학우들이 묶여 들어오는 광경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수의 방청객이 이에 호응하였고 그는 체포되어 같은 해 고등법원에서 소위 법정 소란 및 보안법위반 혐의로 6월을 선고하자 "남의 나라를 빼앗은 강도들이 빼앗긴 제 나라를 찾겠다는 사람에게 죄를 준다는게 뭐냐"고 계속 불복하여 반항하자 징역 6월을 1년 6월로 높여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회 목사로서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일본 경찰·헌병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지속 감시를 받았고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였다. 이후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반대하는 등 계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후에는 목사로 봉직하시다가 1986년 7월 12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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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행적비, 석상
해월당 봉려관(속명 안려관, 1865 ~ 1938)은 제주에서 활동한 승려로 1907년 12월 전남 대흥사를 찾아 청봉화상을 계사로 유장스님을 은사로 비구니계를 수계, 이듬해 1월 제주로 내려와 1908년 관음사를 창건, 개산조가 되었다. 법화사, 불탑사, 법정사, 월성사, 백련사 등을 중창 또는 창건하고 국내 대덕스님을 초청, 정법홍포에 매진하였다. 또한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의 중심에 서서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여성의 사회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봉려관 스님이 지원한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고 도순리 인근 마을 주민 700여명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여 참여한 제주도 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다. 참여자들은 화승총과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6개월여 전부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거사 목적을 격문으로 알리고, 참여 주민들과 함께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인을 때리는 등의 행동을 실천하였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실행되어 3·1운동보다 5개월여 먼저 일어났는데, 일제는 법정사 항일 운동의 파급을 걱정하여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을 언도하고, 목포로 이송하여 사건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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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국절사 영현비
강문일(1911 ~ 1967)과 박영순(1916 ~ 1947)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33년 제주도 애월면 하귀리에서 박영순 등과 함께 야학을 설치 운영하며 민족의사를 고취하였다. 그는 동향 출신 사회주의자 김귀영(金貴榮)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공감하게 되었고, 일제 타도를 위한 방침으로 아이들에게 항일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박영순과 야학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34년 12월 야학을 이웃 마을의 김홍규, 김을봉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하였고,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5년 두 사람은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10월 1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기까지 8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두 사람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각각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창아(1913 ~ 1955), 이명 배두봉은 일찍이 일본 오사카로 넘어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즉 일명 전협(全協)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2년 4월 22일 오사카 니시요도가와구(西淀川區)에 위치한 오즈다케바야시(小津武林)라는 방직공장에서 조선인 여공(女工) 36명을 무단 해고한 데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무단 해고 반대와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회사가 이를 묵살하자 5월 14일 시위 및 공장 내 농성을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배창아는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기소되어, 1933년 4월 19일 오사카 공소원에서 징역 6월(미결 구류 100일 합산)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34년 8월 제주 북제주군 애월면 하귀리에서 김홍규와 함께 야학을 설치, 민족의식을 교육 고취하였다. 인근에서 같은 목적으로 앞서 소개한 강문일과 박영순 등이 이끌던 야학과 협력하기 위한 협의회를 개최하고 함께 교육강연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항일의식 고취와 생도 연설회, 어린이날 행사 개최 등의 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1935년 5월 5일 어린이날 운동회를 개최하던 중 일본 경찰 외도리주재소(外都里駐在所)와 제주경찰서(齊州警察署)에서 총동원되어 선생과 학생 1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에 16명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으로 송치되었다. 같은 달 23일 김을봉(金乙鳳)과 함께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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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연서당 터
文淵書堂(문연서당) 터 표지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조선시대 말엽의 문연서당(文淵書堂) 터. 일명 애교대(愛敎臺)라고도 하였다. 문연서당은 1891년(고종 28) 귤암(橘巖) 이기온 (李基瑥)이 칠봉서당(七峰書堂)을 창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문인이며 성균관 교수로 있던 고성겸(高性謙)을 강사로 초빙 교육을 개시했다. 1899년(광무 3) 화재로 고교수와 제자 1명이 소사하고 서당이 소실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 뒤 이 자리에 다시 문연서당을 세우고 아들 이응호(李膺鎬)가 계승,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또한 문연사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참판의 유적과 귤암(橘巖) 이기온(李基瑥)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1년 1월에 그의 제자와 지사들이 귤암의 유허인 오라동 2951(현 제주문화방송, 옛 북제주군청 주변)에 시설하여 향사하던 제단이며 귤암의 비는 면암 참판 유배 시 유필을 음각한 것이다. 귤암선생은 광해군에 직간하다가 유배된 충신 간옹(艮翁) 이익(李瀷)의 후손으로, 제주에 유배 온 면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향리후진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또 귤암선생의 문하생들은 항일운동에 관여했던 조설대(朝雪臺) 집의계(集義契)의 주축이 되었다. 이 곳 문연사는 1977년 5월 신제주가 건설되면서 도시 계획에 저촉되어 이 곳으로 이설하였으며 지금도 여러 후학과 뜻 있는 사람들이 음력 정월에 중정(中丁)에 제를 지내고 있다. 제자들은 최익현과 이기온의 사제동행을 기념하여 서당터에 문연사를 세웠으나, 1977년 5월 신제주가 건설되면서 도시계획에 저촉되어 조설대가 있는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한편 조설대는 마을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엽 이후 국상을 당하였을 때 백성들이 모여 곡하던 망곡(望哭)의 터로도 알려진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이응호(李譍鎬)를 중심으로 한 12인의 소장파 유림들이 집의계(集義契)란 모임을 결성해 설욕을 다짐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이들은 이 곳에 모여 항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하여 석벽에 "朝雪臺"를 음각하였다. 조설대의 뜻은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雪辱)하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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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구 묘
양남구(1892 ~ 1976)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8년 9월 김영일 등 7명의 동지와 함께 남제주군 중문면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경을 축출하기 위한 시위를 펴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4년 형을 언도 받고 목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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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구 독립항쟁기
양남구(1892 ~ 1976)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8년 9월 김영일 등 7명의 동지와 함께 남제주군 중문면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경을 축출하기 위한 시위를 펴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4년 형을 언도 받고 목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