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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3인 흉상(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김옥련(1907 - 2005)는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舊左面)에서 해녀들의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31년 해녀들에 대한 일본 관리들의 가혹한 대우와 제주도해녀조합 어용화의 폐단이 있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김옥련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부춘화(夫春花)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붙잡혀 6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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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 경찰관주재소 터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들이 집결하여 일본인 도사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담판을 벌였으며, 1월 24일 청년운동가들의 검속에 반발하여 해녀들이 일본경찰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임 제주도사(겸 제주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초도 순시차 세화리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구좌면 동부의 잠녀 1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항의의 내용은 조업 과정에서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일본 경찰은 부춘화(하도리), 김옥련(하도리) 등 봉기를 주도한 잠녀 20명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1월 24일에 다시 잠녀 5백 명이 잡혀간 동료 잠녀를 구하러 세화지서로 몰려가 구금된 잠녀의 해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세화지서의 경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고, 잠녀들은 순사를 모자를 뺏고 제복을 찢는 등 충돌이 격해졌으며 잠녀측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주 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전남에 급보해 전남 경찰부 경부보 이하 32명의 경관이 그 날 밤 11시 경비선 긴코마루(金剛丸)을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급파되었다. 26일 새벽 세 시경, 이어 우도(牛島)에서도 경찰 40여 명이 우도로 들어와 잠녀 30여 명을 체포, 우도 서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것을 우도 잠녀 8백 명이 나서서 일본 경찰을 에워싸고 저항, 잡혀가는 잠녀를 구해내려 하였다. 경찰은 잠녀들을 향해 공포탄 14발을 쏘아 진압했고 이면에서 잠녀들을 선동한 혐의를 물어 민중협의회원 40명을 다시 체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잠녀들은 다시 산발적인 탈환 시도를 벌였다. 27일 오후 7시경 다시 1백 명의 잠녀들이 세화리 주재소에 들어와 잡혀간 잠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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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 오일장 터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들이 집결하여 일본인 도사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담판을 벌였으며, 1월 24일 청년운동가들의 검속에 반발하여 해녀들이 일본경찰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임 제주도사(겸 제주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초도 순시차 세화리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구좌면 동부의 잠녀 1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항의의 내용은 조업 과정에서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일본 경찰은 부춘화(하도리), 김옥련(하도리) 등 봉기를 주도한 잠녀 20명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1월 24일에 다시 잠녀 5백 명이 잡혀간 동료 잠녀를 구하러 세화지서로 몰려가 구금된 잠녀의 해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세화지서의 경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고, 잠녀들은 순사를 모자를 뺏고 제복을 찢는 등 충돌이 격해졌으며 잠녀측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주 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전남에 급보해 전남 경찰부 경부보 이하 32명의 경관이 그 날 밤 11시 경비선 긴코마루(金剛丸)을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급파되었다. 26일 새벽 세 시경, 이어 우도(牛島)에서도 경찰 40여 명이 우도로 들어와 잠녀 30여 명을 체포, 우도 서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것을 우도 잠녀 8백 명이 나서서 일본 경찰을 에워싸고 저항, 잡혀가는 잠녀를 구해내려 하였다. 경찰은 잠녀들을 향해 공포탄 14발을 쏘아 진압했고 이면에서 잠녀들을 선동한 혐의를 물어 민중협의회원 40명을 다시 체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잠녀들은 다시 산발적인 탈환 시도를 벌였다. 27일 오후 7시경 다시 1백 명의 잠녀들이 세화리 주재소에 들어와 잡혀간 잠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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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형 묘
김임형(1915 - 1949)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4년 4월 만주 용정시(龍井市) 사립 동흥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935년 3월 4학년을 수료할 때까지 동교 교사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조국의 독립을 이룩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1935년 4월 서울로 상경하여 사립경성공업학교(私立京城工業學校)에 입학한 그는 1936년 5월 초 순경 김종천(金鍾千)·박병윤(朴炳允) 등과 함께 일반상식 함양을 목적으로 조직된 독서회 '우리 학교'를 개편하고 경성공업학교 동창생들을 권유·참석시켜 사회주의 서적을 교재로 사회주의와 항일사상을 전파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8년 5월 7일 경기도 경찰부에 피체되었다. 1938년 12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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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택 묘
한원택(1912 - 1938) 선생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1월 2일 농민조합을 설립하고, 농민들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으며, 1932년 1월 제주도 해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한원택은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의 책임자인 신재홍(申才弘)과 채재오(蔡載五)·고사만(高仕萬) 등과 함께 김기생(金己生)의 집에서 농민조합 설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참석농민 수십여 명에게 '농민의 피를 짜는 악질조합 반대, 농민대중의 이익에 배치되는 면(面)행정 반대' 등의 표어를 발표하고 농민들의 권익 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제주도 해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3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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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항쟁로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들이 집결하여 일본인 도사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담판을 벌였으며, 1월 24일 청년운동가들의 검속에 반발하여 해녀들이 일본경찰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임 제주도사(겸 제주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초도 순시차 세화리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구좌면 동부의 잠녀 1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항의의 내용은 조업 과정에서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일본 경찰은 부춘화(하도리), 김옥련(하도리) 등 봉기를 주도한 잠녀 20명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1월 24일에 다시 잠녀 5백 명이 잡혀간 동료 잠녀를 구하러 세화지서로 몰려가 구금된 잠녀의 해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세화지서의 경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고, 잠녀들은 순사를 모자를 뺏고 제복을 찢는 등 충돌이 격해졌으며 잠녀측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주 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전남에 급보해 전남 경찰부 경부보 이하 32명의 경관이 그 날 밤 11시 경비선 긴코마루(金剛丸)을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급파되었다. 26일 새벽 세 시경, 이어 우도(牛島)에서도 경찰 40여 명이 우도로 들어와 잠녀 30여 명을 체포, 우도 서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것을 우도 잠녀 8백 명이 나서서 일본 경찰을 에워싸고 저항, 잡혀가는 잠녀를 구해내려 하였다. 경찰은 잠녀들을 향해 공포탄 14발을 쏘아 진압했고 이면에서 잠녀들을 선동한 혐의를 물어 민중협의회원 40명을 다시 체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잠녀들은 다시 산발적인 탈환 시도를 벌였다. 27일 오후 7시경 다시 1백 명의 잠녀들이 세화리 주재소에 들어와 잡혀간 잠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해녀항쟁로는 제주해녀항쟁(1931~1932) 당시 제주 여성과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활동가 구좌읍 하도리 출신 김옥련(1909~2005) 여사, 부덕량(1911~1939) 여사, 부춘화(1908~1995)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이 분들은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해녀항쟁의 일선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인물로써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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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덕량 묘
부덕량(1911 - 1939) 애국지사는 해녀의 신분으로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제주도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의 부정으로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나갔다. 이는 시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2년 1월 7일과 12일 구좌면 세화장터에서는 1천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시위 후 동월 24일경 일경이 제주도 출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몸으로 맞서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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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화 집
부춘화(1908 - 1995)는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舊左面)에서 해녀들이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31년 일본 관리들이 해녀들을 가혹하게 대우하고 제주도해녀조합을 어용화하려 하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부춘화는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김옥련(金玉連)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피체되어 3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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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터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구좌면 하도리 해녀들이 지역의 청년 지식인 교사들로부터 근대 민족교육을 받았던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 야학강습소 자리이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초기 여성운동가 김시숙(金時淑. 1880∼1933)은 여성의 몸으로 1925년 조천리에 여성야학소를 개설했다. 그녀는 여성문맹자들에게 항일 내용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당했다.1921년도에 설립된 사립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는 노동야학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키웠던 곳이다. 야학활동은 당시 혁우동맹 민중운동자협의회 회원 오문규, 김순종, 부승림 등 일부 하도보통학교 선생들이 담당했다. 제주해녀항일투항쟁이 하도리, 종달, 세화, 우도, 성산읍으로 확산되면서 2년여 넘게(1931∼32년)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신진 청년교사들의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도움에 힘입은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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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진 묘
신창진(1914 - 1940)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1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 졸업 직전에 이른바 사상 불순(不純)을 이유로 양두옥(梁斗玉)과 함께 유급되고 동급생 김원요(金源堯)는 퇴학당하였다. 더욱이 김원요가 학교 당국에 격렬히 항의했다 하여 졸업식장에서 일경에 피검되자 의분을 누르지 못하여, 식민지교육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뿌리고 교무실과 일본인 교장의 관사(官舍)로 몰려가 집단으로 항의하며 기물을 파손시키는 등의 격렬한 항거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다른 10명의 학생과 함께 붙잡혀, 동년 8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1932년 3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형이 확정되기까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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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행 묘
오성행(1921 - 2000) 선생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1939년 산서성(山西省) 심현(心縣)에서 중국군 군사위원회 제18집단 군사령부에 소속되어 항일전에 참전하기도 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였다가 광복군이 창설되자 제5지대에 배속되었으며,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 第四團 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1942년 4월에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 제3분대장이 되어 초모 공작활동과 적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부터는 광복군 제2지대 본부 부관으로 배속되어 복무하였으며, 1944년에는 중국군관학교 외국어과 교관으로 임명되어 후배를 양성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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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순병 묘
채순병(1904 - 1922)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서울 안국동(安國洞)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사립국어보급학관 고등과생(私立國語普及學館 高等科生)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그는 동년 3월 4일 밤 서울학생단(學生團) 주관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자기 하숙방에서 "명일 오전 8시 30분 남대문역전에서 제2차 독립만세운동이 개최되니 태극기를 가지고 나오라"는 내용의 격문 약 4백여매를 만들어 동지 3명과 함께 중학동(中學洞)을 비롯 인근 각 동에 배포하여 주민을 동원하였다. 다음날 남대문 역전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고 다음해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1년 3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