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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순 영세불망비
1894년 당시 고부 군수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원흉이 되었던 조병갑이 당시에 군민의 원성을 뒤로 하고 세운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조선시대에는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수령의 공적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 하기도 했다. 황현(黃玹, 1855―1910)이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이 부임하는 곳마다 뇌물을 탐했고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조병갑은 태인 현감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운다며 1,000냥을 고부군민에게서 뜯어냈다. 이미 설치된 ‘만석보(萬石洑)’ 아래 다시 ‘보’를 설치해 억지로 물값을 거둬들이기도 하였다. 면세를 조건으로 황무지 개간을 허락해주고는, 나중에 말을 바꾸어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돈 많은 백성들에게 불효, 음행, 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행은 후일 동학농민혁명으로 체포된 후 전봉준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봉준은 조병갑이 만석보의 축조 및 부친 조규순의 송덕비 건립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노동력과 비용을 부담시켰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과도한 세금 징수, 협박 및 무고, 비리와 착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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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애민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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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표 묘
정인표(1898 - 1957, 鄭寅杓, 鄭仁杓)는 1938년 4월부터 정읍(井邑)을 활동무대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담하여, 종교적 결합을 바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인동맹은 보천교도(普天敎徒)들이 독립운동을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로, 일제패망을 기원하는 한편 국권회복에 앞장서기를 결의하고 대원 50여명으로 조(組)를 편성하여 경찰서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정인표는 신인동맹 설립초기부터 활동하며 동지들 규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런데 1940년 12월 경 비밀결사 신인동맹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모든 계획들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주도자도 검거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43년 10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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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충오열사비(충렬사)
충렬사는 송병선, 최익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1948년에 단을 설치하여 향사하다가 1972년에 사우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학선사(鶴仙祠)라고 하였다가 충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9년 10월에 복원과 수리를 하였다. 내부에 충렬사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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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지 용바위
마이동천의 입구에 위치한 이곳 용바위는 호남의병대장 이석용이 전기홍과 함께 호남 의남아 500여 명을 규합하여 황단을 쌓고 천지신명께 국권회복을 빌며 군률을 세우고 대오를 정비하여 삽혈동맹의 의로운 깃발을 꼽았던 호남의병창의의 터이다. 갑오동학혁명 이후 가뜩이나 침체되어있던 호남의 사기가 을사늑약을 거치면서도 크게 일어나지 않았는데 1907년 가을에 토왜멸적을 부르짖는 격중가가 드높이 메아리쳐 호남천지에 의로운 뜻이 되살아난 이 자리는 곧 호남 최초 자발적인 의병운동의 근원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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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상 항일운동 기적비
전영상(1895 - 1958)은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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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엽 유적비, 추모비
정종엽(본명 정진희, 1885 - 1940)은 전북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비분강개하며 구국의 일념을 떨치지 못하고, 다음 해 1911년 3월 옛 동지 몇 명을 규합하여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일본에 건너가 일왕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912년 이석용(李錫鏞)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비밀 결사인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자, 진안(鎭安)지역 단원으로 참여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중국 망명을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동년 10월 일경에게 붙잡혔다. 이후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거주하면서 이석용 의병장의 제례(祭禮)를 주관하였고, 후진양성과 창씨개명(創氏改名)에 반대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일경의 감시에 시달리다가 1940년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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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상 묘
전영상(1895 - 1958)은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오기열(吳基烈)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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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이산묘
송병선(1836 - 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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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추모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진안 지역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는 강신홍, 김경선, 김규현, 김사범, 김암우, 김영필, 김옥현, 명경안, 박동근, 박재열, 박재춘, 서성일, 신치수, 심우상, 안성, 안왈오, 안일, 양인문, 오기열, 이옥동, 임종문, 전영상, 정진희, 조경화, 채도석, 최병무, 하준태, 한청여, 황준성 선생 등이 있다. 진안군은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1997년 8월 15일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높이 7.5m 규모로 이 탑을 세웠다. 국가보훈처는 2003년 5월 이를 현충시설로 지정한 후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널리 알리고 그 숭고한 의식을 후대에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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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 비
본 비는 1907년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마이산에서 결성된 의병 부대인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에 관한 사적이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湖南 義兵 倡義 同盟團)은 1907년 9월 이석용(李錫庸)이 주도하여 진안 마이산에서 결성되었다. 이석용은 마이산에서 고천제를 거행한 후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석용도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석용은 9월 12일 전라도 각지에서 규합한 동지들과 마이산에 모여 고천제를 거행하였다. 마이산 용암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 이 날에 모인 의병 수가 500여 명이며 거사를 성원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1,000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고천제가 끝난 후에는 만장일치로 이석용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 대장으로 추대된 이석용은 단상에서 창의의 결의를 다짐한 후 의병이 지켜야 할 약속 15개 조항과 의령 10개 조항을 선포하였다.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의 지휘부는 의병 대장 이석용, 선봉 박만화·최덕일·송판구, 중군 여주목·박운서·김성학, 후군 김사범·윤명선·전성학, 참모 전해산·한사국·이광삼, 총지휘 박갑쇠·곽자의·임종문, 연락 홍윤무·박성무·윤병준 등으로 구성되었고 기타 진안 출신의 의병으로 김사범·김암우·김운서·박금동·박보국·박학수·서성일·신성운·오기열·임영기·정종엽 등이 있다. 일제는 1908년 10월부터 약 1만여 명의 병력으로 호남 의병 토벌대를 편성하여 3차에 걸쳐 공격을 감행하였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이석용은 후일을 기약하며, 1909년 3월 6일 휘하의 의병들을 일단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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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열 기적비
오기열(1888 - 1950)은 전라북도 진안(鎭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전영상(全永祥)·김구영(金龜泳)·황해수(黃海水) 등과 함께 마령면 평지리(馬靈面平地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같은 마을 이성녀(李姓女)의 집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수백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이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