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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묘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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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집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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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집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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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군수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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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정
충의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민여운과 더불어 독립선언문 33인 중 한 명인 박준승,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 임정에 독립자금을 가져가다가 옥고를 치른 김정술, 6·10만세 사건을 주도한 이동환, 조선어사전 편찬에 동참하는 등 우리말 살리기에 이바지한 임혁규 등 산외면과 깊은 연이 있는 여섯 명의 항일지사를 함께 모신 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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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환 공적비
이동환(1901 - 1982)은 정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26년 「6·10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사상 3·1독립운동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그것은 기미년 독립만세 이후 7년만에 일어난 운동으로서 융희황제가 동년 4월 26일에 붕어하여 6월 10일로 인산일(因山日)이 결정되자 맺혔던 분노가 폭발되어 일어났다. 또한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협력으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당초에는 세 갈래로 이 운동이 계획되었는데 첫째는 공산당원이던 권오설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나, 서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좌절되었으며, 둘째는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이며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이병립(李炳立)에 의하여 추진된 것으로 권오설로부터 지도를 받아 착수하였다. 세 번째가 통동계(通洞系)라 불리우는 중앙고보의 이동환과 박용규(朴龍圭)가 중심이 된 계획으로서 이들은 1926년 5월 16일 문인근(文仁根)의 하숙에서 거사에 필요한 동지규합의 방법은 논의하였으며, 그는 제일(第一)고보 동쪽에 있는 학교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5월 23일에는 다시 삼선호(三仙湖)에 모였는데 그는 독립만세보다 일본인의 집단거주지인 당시 목정(木町)을 습격하고 총독부를 때려부수자고 제의하였으나 극소수의 찬성밖에 얻지 못하였다. 이틀 후인 5월 26일에 모인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5월 30일에는 약 5천 여장의 격문을 프린트하였고, 6월 8일에는 이를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그는 중앙고보의 최재민(崔載民)에게 4백여매를 주어 당일 거사시 살포하도록 하였다. 6월 10일에는 30만의 애도 군중이 연도에 몰려나왔는데 그는 오후 2시 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박용규(朴龍圭)·황정환(黃廷煥) 등과 함께 격문 7백여 매를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6월 19일 이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중앙고보생 18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6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의 공소심에서 1927년 4월 1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동년 9월 20일 서대문 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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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승 기념관
박준승(1866 - 1927)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91년(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에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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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묘
손화중(1861 - 1895)은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대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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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수 추모비
김양수(1849 - 1930)는 1905년 최익현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이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김양수는 고예진과 고석진, 그리고 고제만 등의 청년들과 정산에서 최익현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에서 각지로부터 소모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또한 김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작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곽종석·김창숙·이중업 등의 영남유림과 김복한·김덕진·안병찬 등의 호서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때 김양수도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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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승 묘
박준승(1866 - 1927)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91년(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에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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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겸, 박환규, 유만규 공적비
이익겸(1879 - 1928)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정읍 읍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천도교인 및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만세운동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는 읍내에 사는 박환규(朴桓奎) 등을 비롯하여 천도교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23일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였다. 천도교인들은 각 지구의 교인들에게 내통하고, 기독교인들은 전도형식으로 각처를 순방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만세운동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22일 이 사실이 일제에 탐지되어 태극기와 선언서가 압수되고 주동자들이 일제헌병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5일 전북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환규(1886 - 1958)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경 전북 정읍(井邑)에서 3월 23일 열리는 읍내의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을 준비하던 중인 3월 22일 밤에 계획이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만규(1886 - 1956)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11월경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요원 조한옥(趙漢鈺)의 지시에 따라 윤철(尹喆)이 독립운동 자금모집책이 되어 활동할 때 이태훈(李泰勳)·유학규(柳學圭)와 함께 모집활동에 참여하여 사재(私財)를 털어 1920년 3월까지 3회에 걸쳐 5,000원을 제공하였다. 1920년 11월 윤철과 임시정부요원 고정일(高政一)의 결정으로 흥덕군(興德郡) 관장(管長)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1921년 3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독립운동비 모집의뢰장과 독립공채(獨立公債)를 유학규와 함께 교부받고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5월 20일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22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심리(審理)를 받았으나 무죄로 방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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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정읍사공원)
파리장서는 3.1독립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측에서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는 독립투쟁의 하나인데, 독립정신을 기리는 파리장서비는 서울 장충단공원 외에 충남 홍성, 대구 달서구, 봉화군, 거창군, 밀양시, 합천군, 고창군, 정읍시 등 총 9기가 건립되어 있다. 파리장서는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서한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였으며, 장서에는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