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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지(신흥학교)
전주의 3.1만세 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흥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안내판이다. 1919년 3월 13일은 전주의 장날이었는데 신흥학교 학생들은 남문시장 부근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2시에서 1시 사이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 그리고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 날 시장에 왔던 수천 명에서 만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합세하였고, 오후 3시와 4시경에도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으며, 밤 11시까지도 작은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4일 오후 3시경에 천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하였으며,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40여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기전학교 학생 13명, 기생 4명이 있었다. 전주 3·1운동에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지도한 분은 당시 서문밖 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인전 목사였으며, 그 연락을 맡은 사람이 당시 서문교회 교인이었던 더벅머리 총각의 최종삼 씨였다. 여기에 김인전 목사의 동생인 김가전(당시 중학과정을 마쳤음)과 김종곤 등도 거사 준비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이로는 고형전, 남궁헌,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과 기전의 임영신, 김신희, 강정순, 함연춘, 김순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김경신은 옥사하였고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후 1930년에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흥학교도 태극기와 전단을 준비하여 만세를 부르며 동조시위를 벌였다. 신흥학교는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자진 폐교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학교를 열었다. 위와 같은 신흥학교의 항일정신을 기념하고 그 흔적을 널리 알리고자 본 안내판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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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은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숭고한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으로 상설 전시장과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 270평 규모에 1층에는 좌석 170석의 강당이 마련되어 있고 2층에는 전시실, 3층에는 화실로 이루어져 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 개관한 전시실로 혁명 과정을 볼 수 있는 당시의 사진 전시 및 동학혁명 서적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소장물로는 동학혁명 과정의 사진,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遺詞)와 최시형(崔時亨)의 동상 등 100여 종에 이른다. 그 밖의 주요 시설로는 소극장, 전시장 2개, 영상 아트홀 등이 갖춰져 있다. 동학혁명운동이란 전라도 고부라는 마을에 있던 조병갑이라는 군수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일으킨 사건인데 녹두장군 전봉준을 선두로 해 일어난 운동으로 황토현 전투의 승리,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된다. 전주성에서 전주 화약을 맺고 처음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이 처형된 후 이 일이 결국 청일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무장봉기 혹은 무장투쟁으로 불리었으나 현대의 평가에서는3.1운동으로의 계승과 여러 측면으로 보았을 때 근대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기틀 마련에 의의를 둔 사건이라 재평가되며 역사의 큰 사건으로 혁명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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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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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발원지(고부)
고부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을 알리는 비석이다. 고부는 전라북도 정읍의 옛 이름이다. 조선 고종 때 이 지역의 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했는데, 그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예를 들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죄목을 씌운 뒤 벌금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사사로이 사용했다. 품질 좋은 쌀에 해당하는 돈을 세금으로 받았으면서도 조정에 올려 보내는 세금은 나쁜 쌀을 기준으로 했으며, 자신의 아버지 무덤에 세울 비석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돈을 거두기도 했다.이에 불만이 높아진 농민들이 여러 번 항의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 등 농민 1,000여 명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리들을 직접 벌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즉시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와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를 내려 보냈다. 새로 온 군수가 그간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하자 농민들은 봉기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는 엉뚱하게도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고, 주동자와 참가자를 찾아내서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조정에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혁명을 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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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관아 터
조선 고종 때 고부 지역의 군수로 조병갑이 부임했는데, 그는 백성들을 수탈하고 탄압하는 탐관오리였다.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예를 들어 농민들을 동원하여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를 새로 만드는가 하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하는 대가로 세금을 거두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는 죄목을 씌운 뒤 벌금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사사로이 사용했다. 품질 좋은 쌀에 해당하는 돈을 세금으로 받았으면서도 조정에 올려 보내는 세금은 나쁜 쌀을 기준으로 했으며, 자신의 아버지 무덤에 세울 비석을 마련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돈을 거두기도 했다. 이에 불만이 높아진 농민들이 여러 번 항의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 등 농민 1,000여 명은 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몰아내고 관리들을 직접 벌했다. 농민들의 봉기에 놀란 조정은 즉시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군수와 사건을 조사하는 관리를 내려 보냈다. 새로 온 군수가 그간의 잘못된 일을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하자 농민들은 봉기를 풀고 집으로 돌아갔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부 농민 봉기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인 이용태는 엉뚱하게도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고, 주동자와 참가자를 찾아내서 가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다시 봉기하여 조정에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혁명을 펼치게 되었다. 고부 관아는 동학농민혁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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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작성의 집(송두호의 집)
본 건물은 동학농민혁명 거사를 도모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집이다. 1893년 11월, 전봉준을 비롯한 20여명은 당시 송두호의 집에 모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수세 징수등의 침탈로 고부 사람들의 원성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 감영을 함락시킨 후 서울로 올라가자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때 거사를 계획하면서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화약고를 점령하자는 등의 내용이 담긴 호소문과 함께 사발통문을 이 곳에서 작성하였다. 사발통문이란 일반인에게 알리는 호소문이나 궐기문을 쓰고 나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서명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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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동학농민혁명이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고 하여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이름 없이 순국한 고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1994년 9월에 본 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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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모의탑
조선 후기에 이르러 탐관오리의 수탈과 폭정이 극에 달해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고, 외세의 침탈마저 노골화되니 백성은 의지할 데 없이 혼란해졌다. 1893년 11월, 이곳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전봉준 등 20명이 모여 평등사회 건설과 우국충정의 불타는 마음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세우며 새로운 세상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를 단행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지평을 연 민족사의 대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을 널리 기념하기 위하여 1969년 4월 동학농민혁명 모의탑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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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집
손화중(1861 - 1895)은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대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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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구 구 묘
안순구(1881 - 1908)는 전북 흥덕군(興德郡, 현 高敞郡 興德面)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안순구는 1908년 8월 15일 오후 10시경 흥덕군 일남면 월화촌(月化村)에서 흥덕주재소(興德駐在所) 순사에게 체포되어 총살(銃殺)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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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단 기념탑
1903년 7월 15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규탄하는 항일집회인 호남유림대회가 내장산에서 열렸다. 무성서원이 호남지역 향교에 보낸 통문을 전달받고 결집한 유림 총 54명은 내장산 벽련암에서 모여 단(檀)을 쌓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복수를 맹세하였으며, 해마다 추모제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그때 쌓은 단을 서보단 또는 영모단(永慕壇)이라 하였다. 본 사적은 호남 유림들이 복수를 맹세하며 "서보단"을 쌓았던 장소에서 그들의 뜻을 추모하고자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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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전적지 표지석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으로 싸워 대승을 거둔 자리를 알리는 비석이다. 1894년 봄 고부군수의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고, 1만에 가까운 군세로 백산(白山)에 집결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 등에게 영병(領兵) 250명과 부보상대 수천명을 주어 농민군을 소탕하게 하였다. 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황토현 서쪽에 있는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자, 관군은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다. 4월 6일 밤 농민군이 기습공격을 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는데, 농민군은 이를 계기로 1개월 만에 호남지방을 석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