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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련 묘
박태련(1895 - 1950)은 1919년 3월 13일의 전주 장날을 이용하여 이운영(李云泳)·김봉추(金鳳樞)·김진영(金鎭永)·강선칠(姜善七)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기독교·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을 눈치챈 일본 경찰은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일부 주동자를 체포하고 각급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는 등 삼엄한 경비망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신흥(新興)·기전(紀全)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였고, 천도교측에서도 교구실에서 수천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각지의 교도들에게 13일의 만세시위 계획을 연락하였다. 이때 그는 최종삼(崔宗三)·유병민(劉秉敏)·김한순(金漢淳)·함의선(咸義善) 등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등사하였다. 거사 예정일이 다가오자, 시위계획을 미리 눈치챈 일본 경찰·헌병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3월 13일 정오, 기독교도·천도교도·학생이 중심이 된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이 공립 제2보통학교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대화동(大和洞)을 거쳐 우편국까지 시위 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경찰과 우체국 앞에서 대치로 실랑이가 벌여졌다. 이때 시위군중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자, 일제측은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그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8월 2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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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기념비(서문교회)
김인전(1876 - 1923)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 제4대 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남 서산군 한산 출신으로 1914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일제가 한국내의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 식민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무단정치를 하던 시기인 1914-1919년에 본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그 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 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1만여 명의 노병(勞兵)을 양성하여 독립전쟁 요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으며, 100만원 이상의 군자금을 적립하여 역시 전쟁수행에 충당할 목표하에 동지들을 규합, 독려하여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또한, 인재를 육성할 계획하에 중국 각지의 군사강습소·병공국(兵工局)·학생단(學生團) 등에 파견하여 전문적인 훈련과 강습을 받게 하였다. 그 뒤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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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기념비(전주사범학교)
전북 지역의 항일 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주교육대학교(구 전주사범학교) 내에 건립한 탑이다. 전북 지역의 항일 학생 운동은 1919년 3월 2일부터 군산 영명학교와 임실 오수초등학교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어 1919년 3월 14일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운동 시위를 계획했다. 일본 교장 관리 아래 경계가 심해지자 김학술, 라명조, 신형식 등이 중심이 돼 학생 70여 명이 동맹해 연서로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했고, 학교측의 학부모들을 상대로 끈질긴 협박이 이어지자 이남율, 김수남 학생 등은 학교에 불을 질렀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전북에서는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주여고)와 전주사립기전여학교, 전주사립신흥학교,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군산 멜본딘여학교 등 도내 13개 학교 대표학생들이 연락망을 조직해 맹휴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전북지역 학생 항일운동으로 전개됐다. 특히,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해방 직전인 1945년까지 계속됐다. ‘우리는 뜻대로 일이 안되면 졸업 후 함경도나 평안도로 부임해 만주의 독립운동가와 연결하자’ 등의 강령을 결의한 조영철, 박완근 등 19명이 결성한 ‘우리회’, ‘우리말을 사용하고 일어상용을 배격한다’는 실천요강을 결의해 조직된 ‘석류회’, 일본의 패전으로 전후문제를 처리할 비밀결사 조직 ‘독서회’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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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처형지 곤지산 안내석
김개남(1853 - 1895)의 자는 기선, 기범, 초명은 김영주이며,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동학에는 1890년경에 입도(入道)주1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신앙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에 힘써 1891년에 접주가 되었다. 같은 해에 동학의 제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으로 호남 지방 접주들과 자주 접촉을 하면서 친교를 맺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부 접주 전봉준(全琫準), 무장 접주 손화중(孫華中), 금구 접주 김덕명(金德明), 주산 접주 최경선(崔景善) 등이었다. 1892년 전라도 삼례(參禮) 지역에서 교조신원운동 당시에도 교도들을 이끌며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로 인하여 명성이 높아져 호남 지방의 동학 지도자가 되었다. 1893년 보은집회에서 수만의 동학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깃발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을 때, 또다시 호남 교도들을 동원하여 대접주(大接主)주2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시위가 성과 없이 끝나고 각지에서 동학 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남접(南接)주3의 강경파 접주들은 독자적인 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1894년 초 전봉준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주도하자,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을 일으켜 4월에는 백산(白山)에 동학 운동본부인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총관령(總管領)주4을 맡았다. 전주화약(全州和約)주5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 요충지인 남원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진입하였고, 남원 진입 후 적극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라도 동북부 군현들인 순창 · 용담 · 금산 · 장수 등지의 동학 조직을 장악하였으며, 경상도 함양과 안의까지 세력권 확대를 시도하였다. 이후로도 계속 남원에 주둔하였고 전라좌도를 관할하면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동학농민군 해산 후 재봉기를 처음 시도한 대접주도 남원의 김개남이었다. 김개남은 10월경에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임실을 거쳐 전주로 들어왔다. 전주감영에는 신임 인사를 하러 남원부사와 고부군수가 와 있었다. 김개남은 서슴지 않고 이들을 처형하였다. 10월 말에는 예하의 일대 병력을 금산으로 보내서 읍내를 점거하였다. 금산에 들어간 김개남군은 읍내에 호된 보복 행위를 자행하였다. 김개남군은 거쳐 온 군현마다 이러한 지나친 행위로 인해 인심을 잃고 말았다. 이후 11월 들어 북상할 계획을 시도하여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을 점령하였고, 이튿날 신탄진(新灘津)을 거쳐 청주를 공격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장거리를 행군해 온 김개남군은 앞장선 일부가 청주성에 접근하였다가 기습을 당하며 무너졌다. 김개남군은 전라도로 돌아가서 더 이상 대군의 위세를 갖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산하였는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김개남은 결국 체포되고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全州將臺)에서 참수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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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전적지 완산칠봉 표지석
완산칠봉은 전주의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장군봉, 탄금봉, 매화봉, 옥녀봉 등 7개의 봉우리를 통칭한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후 5월 8일 철수할 때까지 경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민군은 완산칠봉과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후 신묘한 전략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들어섰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은 외곽에서 공격해 들어와 용머리고개에서 농민군과 관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전주확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4월 28일 전주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은 이곳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5월 3일 전투에서 수백 명의 농민군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 결국 5월 8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에게 전주성을 내어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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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는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사건을 기념하여 1991년 8월 완산칠봉 전적지에 건립되었다.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동학농민군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후 5월 8일 철수할 때까지 경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민군은 완산칠봉과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후 신묘한 전략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들어섰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은 외곽에서 공격해 들어와 용머리고개에서 농민군과 관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전주확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4월 28일 전주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은 이곳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5월 3일 전투에서 수백 명의 농민군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 결국 5월 8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에게 전주성을 내어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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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고개 표지석
용머리고개는 동학농민군의 완산전투 중 5월 2일에 도달했던 곳을 말한다. 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은 1차목표를 달성했다. 무장기포 이후 한 달여 남짓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잇따라 점령하여 치밀한 작전으로 관군을 유인한 뒤 전주성을 마침내 함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농민군은 그동안 유인작전으로 관군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켰으나 전주성 입성으로 관군과의 정면 전투가 불가피해졌다. 전주성을 놓고 농민군의 수성과 관군의 공성으로 치루어진 완산전투는 향후 동학농민혁명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홍계훈의 관군은 4월 28일 전주 용머리고개에 도착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다음날이었다. 관군은 바로 완산에 진을 쳤다.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의 삼면칠봉으로 이루어진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주성 남쪽을 빙둘러 요소요소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관군과 성을 차지한 농민군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함으로써 전주는 일촉즉발의 전운속에 휩싸였다. 수성과 공성의 입장이 바뀐 농민군과 관군의 완산전투는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홍계훈의 관군은 28일 진을 친 직후 곧바로 농민군이 주둔한 전주성을 향해 야포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농민군 수백 명이 성을 나와 동서로 완산칠봉을 오르려했으나 저지당했다. 이날 오전부터 날이 저물도록 양군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투 결과에 대해 홍계훈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고 천보총을 쏠 수 있는 자 30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군 측에 다소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관군이 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서 경기전이 훼상했고, 성 안밖의 수천 호가 불에 탈 정도로 관군의 포격이 격심했다. 이후 며칠간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으로 나와 황학대를 공격할 때 관군이 회선포를 쏘아 농민군 수백 명이 사살당했다. 5월 1일에는 “적은 남문으로 대대가 떼거리로 몰려 나왔지만, 관군이 회선포를 발사하자 맥없이 흩어져 다시 달아났다. 이때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2일에는 농민군이 서문쪽으로 몰려나와 용머리고개의 관군 진영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또다시 대포를 계속하여 발사하자 다시 물러났다. 연이은 대포공격에 농민군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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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구국운동 추념비
김영호(1894 - 1940)는 1894년 6월 3일 전라북도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완산정(完山町, 현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전주읍내에서 철물상을 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전주지역 만세시위를 촉발시키는 주도자 역할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천도교 전주교구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주 읍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3·1운동이 전개되기 전인 1919년 2월 27일 서울 수송동(壽松洞)에 거주하던 보성사(普成社) 간사 인종익(印宗益)이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3천여 매를 받아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하며 3월 2일 밤까지 사람 왕래가 많은 사거리에 배포토록 하였다. 이때 민영진(閔泳鎭)·조성덕(趙聖德)·김성문(金成文) 등과 함께 가담하여 전주 지역에 만세시위를 촉발시켰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919년 8월 서울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국민회 전주지부(全州支部)를 설치하고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1920년 3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 독립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경고문 등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였다. 이때 경고문 50매를 받아 전주 읍내에 배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애국금통지서(愛國金通知書)를 받고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일로 1922년 2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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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구국운동 추념비
이기(1848 - 1909)의 자는 백증,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이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이기(李沂)[1848~1909]는 30대 중반부터 생활 근거지를 구하여 김제·대구·순창 등지를 전전하다, 44세에 황현(黃炫)의 주선으로 구례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학문과 세무에 뜻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고부로 가서 전봉준에게 서울 진격을 제의한 뒤 남원의 김개남에게 찾아갔으나 그가 이기의 제안을 거부하여 구례로 돌아갔다. 갑오경장 후 상경했는데, 1899년의 거부로 반대로 구례 자택으로 돌아왔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할 때 양지위원으로 충청남도 아산에서 토지를 측량하여 지적과 세정을 바로잡는 체험을 했다. 1905년(고종 42)에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기 위해 도미를 추진하였으나 일본공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대신 일본 동경에 가서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정부 요인에게 서면으로 한국에 대한 침략정책 추진을 논박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1906년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3월에는 나인영(羅寅永)[羅喆] 등 10여 명의 동지와 협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했으나 권중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실패하여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갔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상경하여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간하여 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뒤에 자강회원 계연수(桂延壽)·이연보(李延普)·김효운(金孝雲) 등과 함께 단군을 신봉하는 ‘단학회(壇學會)’를 발기하여 종교운동을 벌이려고도 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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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3.1운동 발상지(남문시장)
전주 3.1운동은 1919년 3월 13일부터 4월 3일까지 근 20여 일간 전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학생과 천도교·기독교계 인사들, 시민들이 함께한 시위운동으로서, 이후 김제·부안·옥구·이리·익산·임실·정읍 등 전주 인근 지역의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1919년 3월 13일 전주읍 장날, 정오경 남문에서 울려나오는 인경 소리를 신호로 천도교·개신교 신자,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150명이 남문시장에서부터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기전 여학생들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신흥학교와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大和町)을 지나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앞까지 행진하였다. 우편국 앞에서 총을 발사하는 일제 경찰과 부딪친 만세시위대는 일시 해산하였다가, 오후 3시경 다시 모여 본정(本町) 우편국까지 행진하였다. 일제는 헌병과 소방대원 약 50명을 동원하여 만세 군중에게 물을 끼얹고 소방 갈구리로 부상을 입혔다. 그날 밤에도 2~30명씩의 집단으로 혹은 도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 날의 만세 운동으로 전주 읍내에서 3백여 명이 검속되었다. 3월 14일 박상선(朴尙鮮)·백남두(白南斗) 등 약 3백 명이 완산정(完山停) 완산교 부근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본정(本町) 2정목까지 진출하였다. 3월 17일 초포면(草浦面) 송전리(松田里) 들판에서 동민들의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4일 삼례면(參禮面) 삼례리 삼례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3일 전주 장날에는 수천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경찰서·재판소가 위치한 큰 거리를 지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긴급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하고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4월 3일 김봉근(金奉根)은 일본기를 게양하고 장사를 계속하는 상인을 찾아가 철시를 요구하는 등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신(金敬信)·김봉호(金奉昊)·김점쇠(金点釗)는 각 징역 1년, 권봉화(權奉和)·김대희(金大熙)·김수천(金壽千)·김인철(金仁喆)·노성용(盧成用)·박상선·박찬문(朴贊文)·배순길(裵順吉)·배윤명(裵允明)·백남두·이판쇠(李判釗)·최갑쇠(崔甲釗)·최병태(崔炳台)는 각 징역 6월, 김정희(金錠熙)·김한룡(金漢龍)은 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기전여학교의 김공순(金恭順)·김나현(金羅賢)·김신희(金信熙)·김인애(金仁愛)·최요한나(崔堯漢羅)·함연춘(咸然春) 등은 각각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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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가람시비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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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3.1운동 기념비(신흥학교)
전주의 3.1만세 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1919년 3월 13일은 전주의 장날이었는데 12시에서 1시 사이에 천도교와 기독교의 지도자들, 그리고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 날 시장에 왔던 수천 명에서 만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합세하였고, 오후 3시와 4시경에도 큰 규모의 시위가 있었으며, 밤 11시까지도 작은 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14일 오후 3시경에 천여명의 군중이 시위를 하였으며, 시위의 진압 과정에서 40여명이 체포되었고 이들 중 기전학교 학생 13명, 기생 4명이 있었다. 전주 3·1운동에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을 지도한 분은 당시 서문밖 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인전 목사였으며, 그 연락을 맡은 사람이 당시 서문교회 교인이었던 더벅머리 총각의 최종삼 씨였다. 여기에 김인전 목사의 동생인 김가전(당시 중학과정을 마쳤음)과 김종곤 등도 거사 준비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이로는 고형전, 남궁헌,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과 기전의 임영신, 김신희, 강정순, 함연춘, 김순실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김경신은 옥사하였고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