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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원 사당(오산사)
오산사(五山祠)는 구한 말 호남지역의 유학자이며 애국지사였던 권중원(權重遠)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권중원(1860 - 1910)은 장수 출신의 의병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은 진규(晉奎)이고 자는 평중(平仲), 호는 청련재(靑蓮齋)이다. 일찍이 서산 김흥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고 전국의 여러학자,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써 남다른 유학적 학문 세게를 이루었다. 외세의 국권침탈이 날로 격화되어 가자, 1885년부터 숙(塾)을 열어 나라의 부강이 곧 교육에 있다는 일념으로 인재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권중원은 1905년경부터 1910년에 이르던 시기에 정재 이석용이 전북 진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서로 교유하며 협의 지원하고 이석용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거사 직전에는 이석용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은신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석용과 의병에 협조한 여러 사실들이 발각되어 가옥과 전답 서책이 몰수되고 불태워지는 참화를 겪었으며 이후 도피하던 중에 1910년 51세로 순절하였다. 오산사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4일에 후학과 유림 후손들이 석채례를 개최하여 선생을 추모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문집으로는 청련재유집(靑蓮齋遺集)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19년 오산사를 현충시설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정부는 2019년에 권중원 선생을 대통령 표창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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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신 묘
김동신(1871 - 1933)의 자는 원표, 호는 청암이며,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6년 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봉기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무주군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자원암(紫原庵)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留陣)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갔다. 이후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김동신은 전라북도 정읍군 내장산에서 기우만(奇宇萬) · 고광순(高光洵)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 부락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군기(軍器)를 모아갔다. 이후 9월경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淳昌)의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고, 남원 모래사장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여 2명을 사살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 9월 중순경 용담 내원사(內源寺)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으나, 통수권과 전략 등의 문제로 공격해 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자 곧 해진하였다.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용담군 구랑(九郞)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라북도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본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삼남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처럼 전라도 ·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인 충청남도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1908년 6월에 체포되었다. 8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내란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追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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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주 추모비
박정주(1871 - 1921)의 이명(異名)은 박화용(朴和容)이다. 어려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고, 1919년 당시 고향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초순 이후 서울과 전주(全州)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山西面) 동화리(桐花里) 장날을 기회로 삼아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시장으로 갔다. 오후 3시경 미리 준비한 태극기 2개를 장대에 매달아 앞세우고 시장 중앙으로 나가 정호현(丁豪鉉)와 정봉수(丁奉洙)에게 전달하여 받들게 하였다.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날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를 연호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 행진을 벌이던 도중 정호현·정봉수와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동화 헌병주재소로 끌려갔다. 이에 흥분한 김형택(金炯澤) 등 약 200명의 군중들이 헌병주재소로 몰려와 석방을 요구하였다. 기세에 압도당한 일제 헌병이 정호현·정봉수와 함께 석방하였다. 다시 시위 군중을 이끌고 산서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산서면으로나 조선인으로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매우 유쾌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해산하였다. 이후 이날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붙잡혀 모진 조사를 받았다. 1919년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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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추모비
김개남(金開南, 1853년 9월 15일 ~ 1894년 12월 3일)은 1894년 동학 농민 선언의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 전봉준, 손화중과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족보에 실린 이름은 영주(永疇), 어릴적 이름은 기선(琪先), 성인이 되어 기범(箕範),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동학에 입도한 후 동학의 교리에 따라 태평천국으로 밝은 이상적인 나라를 남쪽으로부터 연다는 뜻으로 호를 개남(開南)으로 정했다. 동학농민혁명기에는 김개남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은 금구,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무주, 진안, 용담, 장수, 순천, 낙안, 고흥 등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또한 김개남은 휘하의 김인배로 하여금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게 하여 하동,진주 등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제2차 봉기 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병영이 있던 청주로, 손화중의 동학농민군은 나주로 진격하였다. 김개남은 11월 10일 청주병영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한 후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만 서울로 이송하여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 간 효시(梟示)되었다. 향년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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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추모비
손화중(1861 - 1895)의 자는 화중, 호는 초산, 이칭은 손정식이며, 개항기 삼례지방의 교조신원운동과 관련된 천교도인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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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두 기적비
김일두(1891 - 1967)의 자는 동수, 호는 추산이며, 일제강점기 대한유생독립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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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동상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은 전라북도 순창(淳昌) 사람이다. 어려서 전우(田愚)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潭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명치대학(明治大學) 법과와 일본대학(日本大學) 법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그후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중앙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에 유학 중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유학생의 장학금을 보조했다. 귀국하여 경성법률전문학교 조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지내고,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1922년 11월에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여 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해서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회금보관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허헌(許憲)·김태영(金泰榮)·이승우(李升雨)·김용무(金用茂) 등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刑事辯護共同硏究會)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운동사건을 무료 변론했으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에 대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독립운동자에 대한 사건으로 정의부(正義府)·연통제(聯通制)·광복단(光復團)·김상옥(金相玉) 사건, 3·1운동에 잇달은 각지의 독립만세사건,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운동, 원산노조파업 사건, 조선 공산당 사건과 간도공산당 사건 등 많은 사건의 변호를 담당하였다. 1927년 2월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1929년 7월 1일의 전국복대표대회(全國復代表大會)에서 조사부장 겸 회계로 선출되어 활약했으며, 1930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특히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 헌(許憲)·이인(李仁) 등과 함께 구속된 학생을 변호하기 위하여 최대의 성의와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1946년에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초대와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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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극단
황극단은 전북 임실 출생으로 호남에서 활동한 의병장인 이석용 의병장이 순국하기 전 대구형무소에서 아들인 독립운동가 이원영에게 남긴 유언으로 세워진 추모 제단이다. 광복 후 1955년 1월 1일 이원용은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이석용 의병장 순국비, 고종황제비, 대한의장비,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 백범안동김공구지비, 대한장의순국5열사(안중근·이봉창·윤봉길·이준·백정기)기적비, 광복정령33인추억비 등 모두 5기의 비를 세우고 황극단을 세웠다. 황극단은 이원영 지사가 8년 동안의 요강 행상과 전답 2600여 평을 팔아 1955년 5월 5일에 건립하였으나 해당 위치에 현 전북대학교가 건립되면서 위치를 옮겨 오늘날의 위치가 되었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진안 마이산 주필대에서 거병하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했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진안 시동, 마근현, 수류산, 관촌역,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2년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그 해 4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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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
일제에 찬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전북지역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르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4년 7월 21일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234-16(어린이회관동편)에 독립운동추념탑이 건립되었다. 현재 추념탑 부지에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현창비와 탑명비, 헌시비, 건립취지문비, 안중근의사 휘호비, 건립기비 등 부속시설과 함께 추념탑 주변을 공원화하여 청소년들에게는 정신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후손들에게는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역사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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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식 집(전주)
장현식(1896 - 1950)은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가 설립될 당시 거액을 기부하였으며, 고려대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도 재단에 사재를 기부하여 교육을 통해 침체된 민족의 기운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아일보사가 창간될 당시에는 인쇄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거금을 기부하였다. 1919년 4월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 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의 재정을 담당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을 위하여 3,000원을 제공하고 지인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제2대 전라북도지사로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납치되어 1950년 10월 24일 사망하였다. 1989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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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 사당(옥동사)
최병심(1874 - 1957)의 자는 경존, 호는 금재이며, 일제강점기 『금재문집』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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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심 묘
최병심(1874 - 1957)의 자는 경존, 호는 금재이며, 일제강점기 『금재문집』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