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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승 기념관
정인승 기념관은 선생이 태어나신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생가터에 2005년 10월 준공하였으며, 전시실에는 유품과 우리말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고,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동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정인승(1897 - 1986)의 호는 건재이며, 해방 이후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에서,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2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포상관계로는 『큰사전』편찬공로상(1957)·국어운동특별공로상(1957)·학술원공로상(1959)·건국공로훈장(1962)·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을유문화사, 1949)·『표준중등말본』(신구문화사, 1956)·『표준고등말본』(신구문화사, 1956) 등 10여 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그 밖의 글로 「눈의 글과 귀의 글」 등 40여 편이 있다. 문법관계에 있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敍述格助詞]로 처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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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승 집
정인승(1897 - 1986)의 호는 건재이며, 해방 이후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에서,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2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포상관계로는 『큰사전』편찬공로상(1957)·국어운동특별공로상(1957)·학술원공로상(1959)·건국공로훈장(1962)·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을유문화사, 1949)·『표준중등말본』(신구문화사, 1956)·『표준고등말본』(신구문화사, 1956) 등 10여 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그 밖의 글로 「눈의 글과 귀의 글」 등 40여 편이 있다. 문법관계에 있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敍述格助詞]로 처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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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승 묘
정인승 선생의 묘비석이다. 2006년 정부의 애국지사 묘지 이장사업의 일환으로 건재 정인승 선생의 유해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안장하였고, 묘지에 있던 비석 및 석물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 선생님의 생가 터인 이곳으로 장수군민들이 이전한 것이다. 정인승(1897 - 1986)의 호는 건재이며, 해방 이후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에서,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2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포상관계로는 『큰사전』편찬공로상(1957)·국어운동특별공로상(1957)·학술원공로상(1959)·건국공로훈장(1962)·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을유문화사, 1949)·『표준중등말본』(신구문화사, 1956)·『표준고등말본』(신구문화사, 1956) 등 10여 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그 밖의 글로 「눈의 글과 귀의 글」 등 40여 편이 있다. 문법관계에 있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敍述格助詞]로 처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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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실 전적비
박춘실(1875 - 1914)은 개항기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박춘실(朴春實)[1875~1914]은 박동식(朴東植)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무주·장수·진안·용담 등지에서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13도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이 있을 때에 호남 창의 대장으로 양주까지 진출하여 참전한 바 있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전라북도 무주군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군 천반산, 성수산, 장수군 덕유산, 무주군 적상산, 토옥동 문성어전, 농수리, 양악, 진도리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을 부장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수비대장 조사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는 문성동 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 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 순사하였다.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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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실 집
박춘실(1875 - 1914)은 개항기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박춘실(朴春實)은 박동식(朴東植)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무주·장수·진안·용담 등지에서 국가 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수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이듬해 13도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이 있을 때에 호남 창의 대장으로 양주까지 진출하여 참전한 바 있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전라북도 무주군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군 천반산, 성수산, 장수군 덕유산, 무주군 적상산, 토옥동 문성어전, 농수리, 양악, 진도리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을 부장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수비대장 조사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는 문성동 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 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 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 순사하였다.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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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추모비
전기홍(1879 - 1910)의 자는 수용, 호는 해산, 이칭은 종기, 전해산이며,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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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유허비
백용성(1864 - 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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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불망비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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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기념관
전기홍(1879 - 1910)의 자는 수용, 호는 해산, 이칭은 종기, 전해산이며,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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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산 묘
전기홍(1879 - 1910)의 자는 수용, 호는 해산, 이칭은 종기, 전해산이며, 대한제국기 고막병참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그 해 겨울 임실의 이석용(李錫庸)을 찾아가 기병하였다. 이 때 호남 일대에서 제일 먼저 의거를 일으킨 고광순(高光洵)과 기삼연(奇參衍)이 붙잡히자, 기삼연의 부하 김준(金準)이 의병을 재수습해 장성(長城) 일대를 중심으로 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에 이석용에게 김준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전개할 것을 제안, 이들은 남진하고 이석용의 의병들은 북진해 장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즈음 부하를 거느리고 남하한 정원집(鄭元執)에 의해 7월 25일 대동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은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金元範), 후군장 윤동수(尹東秀), 호군장 박영근(朴永根), 도포장 이범진(李凡振)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병은 불갑산(佛甲山)으로 진군해 약간의 적을 포살하고, 27일에 나주 석문동(石門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10월 16일의 대명동(大明洞), 10월 24일 대치(大峙), 11월의 고막병참(古幕兵站)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명성을 듣고 입대하는 의병의 수도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09년에 이르러 일제가 ‘의병대토벌전’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1월 17일 일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고향 일대에 「본고을 반당(反黨)에게 보내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2월 22일 의병들을 거느리고 화산(化山)을 거쳐 궁관산(宮冠山)으로 행군해 3월 27일 영광 오동치(梧桐峙)에 이르자 적에게 포위되어 접전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해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의병들은 일시 해산하였다. 그 뒤 장수 고래산(古萊山)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면서 지내던 중 조두환(曺斗煥)·이경오(李景五)의 밀고와 김현규(金顯圭) 인솔로 붙잡혀 영산포 일본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5월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5책이 있으며, 그 중 2책이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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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집(죽림정사)
백용성(1864 - 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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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산서면)
장수군 산서면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받고, 산서면을 비롯한 장수군 전역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신 수많은 순국선열을 추모하기 위해 1919년 당시 장수군 관내에서 제일 먼저 만세가 있었던 산서면 동화리에 기념비를 1995년 12월 1일에 건립하였다. 장수군 관내 3.1만세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영춘, 빈영섭 등의 주도하에 1919.3.5 장수읍 장날을 기념하여 거사하기로 모든 사전준비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장수읍의 거사는 미뤄졌고, 대신 각면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첫 봉기가 1919.3.19. 장수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박정주등 15명이 주도한 만세운동이었으며, 박정주등 많은 민중들이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장수군 전역으로 3.1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22일 번암면 노단리 장터, 3월 23일 산서면 사계리 등 장수군 전역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에 수천명이 참여하였으며, 첫 거사가 좌절된 장수읍에서도 3월 26일 최영식, 신동관,장재만,양일표,빈양섭 등이 주도하여 산서면 오성리에서 수백명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 만세운동 기간 동안 최영석, 신동관, 장재만, 양일표, 빈영섭 등 수십명이 검거되고 옥고를 겪었다. 이렇게 장수군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의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이 되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