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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충효정려비
이원영(1899 - 1983)은 1912년 호남창의군(湖南倡義軍)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의 장남으로 부친의 의병활동에 비밀문서와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으며, 1913년 겨울 부친이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붙잡히자 1914년 4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기까지 부친의 옥고를 뒷바라지하였다.그후 1939년 4월 4일 부친의 출생지인 전북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삼봉리(三峰里) 부락 뒷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금지되어 있는 소위 형사자(刑死者)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친부의 항일독립정신을 후세에 전승케하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형사자분묘제초상(刑死者墳墓祭肖像) 등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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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유허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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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전적의혼추모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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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정 정사기적비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인 이웅재의 선조인 춘성정 이담손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처음 지은 주택이다. 해당 집은 1977년 전라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종가에 위치한 춘성정 정사 기적비는 둔덕이씨 가문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춘성정 정사 기적비에 각명된 애국지사는 총 16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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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송 집 터
이기송(1888 - 1939)은 일제강점기 둔남면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이 교사들과 함께 학생과 학부모에게 엄중히 당부, 그후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은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송은 오병용(吳秉鎔)·이만의(李萬儀) 등과 연락해 장날인 3월 23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 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독립만세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점점 불어나 800여 명으로 늘어나고 기세도 오르자, 경찰 주재소에서 파견된 순사가 이기송을 강제 연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8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 당황한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가 군중의 위세에 눌려 석방하였다. 만세시위 군중은 다시 2,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졌다. 만세시위 대열은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 때 시위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가자 일본 순사들은 달아나고 순사보 고택기(高宅基)만이 총을 겨누고 위협하였는데, 그들은 총을 빼앗고 만세운동 대열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며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날 저녁에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무장한 병력이 대거 출동, 시위 대열과 대치하다 무자비하게 발포하여 시위 군중은 일단 흩어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튿날 새벽까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계속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기송은 다음날부터 단행된 일제의 검속에 의해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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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3.23만세운동 기념지
오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3일~24일 있었던 만세 운동이다. 이기송 선생은 오병용, 이만의, 이윤의 등과 함께 장날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으며, 군중에게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일 시위군중은 무려 2,000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이튿날까지 이어졌다.임실지역은 그 어느 곳보다도 치열했던 의거지 중에 하나이다. 3월 10일 오수초등학교 3~4학년 학생들에 의해 촉발된 3.1 만세운동은 3월 23일~24일 2,000여 명의 군중이 치열한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오수면(당시 둔남면), 삼계면, 지사면은 1906년과 1914년 두 번에 걸쳐 조선시대 남원부에서 임실군으로 편입된 곳인데, 당시 오수면은 임실군의 남면과 남원부 덕과방과 둔덕방을 합하여 둔남면이라고 불렀다. 1916년 조사통계에 의하면, 둔남면(현 오수면)은 1,120호에 5,542명으로 같은 시기 임실군 전체 12,552호에 59,549명의 약 9.3%에 해당한다. 당시 오수장날을 기해서 일어나 만세운동은 800여 명으로 시작하여 2,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이날 만세운동으로 국가유공자로 추서된 사람이 44명에 이르고 있다. 그중에서 오수면은 28명, 지사면은 12명, 삼계면은 6명에 이른다. 오수면 호수와 인구대비 약 30%, 즉, 16세부터 60세에 해당하는 사람을 활동인구로 잡았을 때 1916년 오수면 인구 5,542명의 30%는 약1,660여 명 정도이다. 이를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2,000여 명과 대비한다면 둔남면 전체 활동인구를 넘는 사람들이 3월 23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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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 3.1독립운동기념탑
오수 3.1독립운동 기념탑은 오수면을 비롯한 임실군 전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기단의 앞면에는 오석판에 ‘충의(忠義)’라고 새겨져 있고, 왼쪽 옆면에는 이기송·허박·오병용·이만의 등 애국지사 44인의 명단이, 오른쪽 옆면에는 임실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상황과 건립 취지가 새겨져 있다.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오수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교사인 이광수는 서울에서 천도교 대표 오세창을 만나서 만세운동에 관한 지시를 받고 내려왔다. 3월 10일 10시경 교사 이광수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으며, 일본인 교장과 다른 교사들의 만류로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진정되었으나 학생들의 만세운동은 독립만세운동이 임실군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임실 지역의 유지였던 이기송과 오병용·이만의 등은 장날인 3월 2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고, 거사 당일 오후 2시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이기송이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연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도 따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이 800여 명으로 불어나 기세를 올리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이기송을 연행하였고, 이에 격분한 80여 명이 주재소로 몰려가 그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자 위세에 눌린 일본인 순사가 그를 석방하였다.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를 점령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이날 저녁 증파된 일제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해산하였다. 그러나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다음날 새벽까지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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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한영태 양선생 의거기념비
한영태(1878 - 1919)는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2일 임실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배포하였다. 그는 당시 임실군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3월 2일 전주(全州)교구실로부터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즉시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신자인 강계대(姜啓大)·박판덕(朴判德)·한준석(韓俊錫)·최양옥(崔養玉)·우성오(禹成五)·황성진(黃成 )·김영원(金榮遠)·박성근(朴成根) 등과 만나, 이의 배포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에 강계대에게 9매를 주어 읍내의 장터·학교·경찰서·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도록 하고, 한준석·김영원은 운암면(雲岩面)내의 입석리(立石里)·선거리(仙居里)·학산리(鶴山里) 일대에, 박판덕 등 다른 신도들에게도 자기 거주면내와 이웃면내에 게시하게 하여, 3월 12일의 임실읍 독립만세시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전주(全州)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혀를 깨물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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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요정 기념비
삼요정(三樂亭)은 독립운동가이신 삼혁당(三革堂) 김영원(1853-1919)선생께서 1883년(계미년) 봄에 우국우민의 일념으로 사재를 내어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713-6번지에 건립한 민족정신과 애국교육의 역사적 현장이다. 임실지역 3.1독립운동의 중심인 삼요정(三樂亭)이라는 이름은 첫째,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고, 둘째.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이며 셋째,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요정(三樂亭)은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의 이념의 실천을 위한 민족교육의 출발점이었고, 1904년(갑진년)에 전주에 창동학교(昌東學校)를, 1906년에 임실 청웅에 삼화학교(三和學校)의 건립으로 이어져 근대식 개화교육의 선봉이 되기도 하였다. 김영원(1851-1924)은 일제강점기, 전북 임실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의 3 · 1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는 바로 다음날 천도교 전주교구실을 통해 임실교구실에 도착하였다. 천도교 임실교구장 한영태(韓榮泰)는 곧바로 3 · 1운동 소식을 전하고, 군내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영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은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의 천도교 전교사 한준석(韓俊錫)은 3월 2일 정오경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인인 김영원에게 독립선언서 20매를 교부하였다. 김영원은 그날 밤 바로 운암면의 입석리(立石里), 선거리(仙居里), 학산리(鶴山里) 등의 장소에 게시하여 3 · 1운동 소식을 널리 알렸다. 그날 밤 자정을 기하여 운암면의 국사봉과 청웅면 백련산, 덕치면 회문산, 삼계면 원통산, 성수면 성수산, 신덕면 치마산 등에서 올린 봉화를 신호로 임실군내 각지에 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가 외쳐졌다. 이런 움직임은 3월 12일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토대가 되었다. 김영원은 이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기각으로 징역 1년이 유지되었다.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8월 26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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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기적비
김영원(1851-1924)은 일제강점기, 전북 임실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의 3 · 1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는 바로 다음날 천도교 전주교구실을 통해 임실교구실에 도착하였다. 천도교 임실교구장 한영태(韓榮泰)는 곧바로 3 · 1운동 소식을 전하고, 군내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영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은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의 천도교 전교사 한준석(韓俊錫)은 3월 2일 정오경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인인 김영원에게 독립선언서 20매를 교부하였다. 김영원은 그날 밤 바로 운암면의 입석리(立石里), 선거리(仙居里), 학산리(鶴山里) 등의 장소에 게시하여 3 · 1운동 소식을 널리 알렸다. 그날 밤 자정을 기하여 운암면의 국사봉과 청웅면 백련산, 덕치면 회문산, 삼계면 원통산, 성수면 성수산, 신덕면 치마산 등에서 올린 봉화를 신호로 임실군내 각지에 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가 외쳐졌다. 이런 움직임은 3월 12일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토대가 되었다. 김영원은 이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기각으로 징역 1년이 유지되었다.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8월 26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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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묘
김영원(1851-1924)은 일제강점기, 전북 임실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의 3 · 1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는 바로 다음날 천도교 전주교구실을 통해 임실교구실에 도착하였다. 천도교 임실교구장 한영태(韓榮泰)는 곧바로 3 · 1운동 소식을 전하고, 군내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영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은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의 천도교 전교사 한준석(韓俊錫)은 3월 2일 정오경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인인 김영원에게 독립선언서 20매를 교부하였다. 김영원은 그날 밤 바로 운암면의 입석리(立石里), 선거리(仙居里), 학산리(鶴山里) 등의 장소에 게시하여 3 · 1운동 소식을 널리 알렸다. 그날 밤 자정을 기하여 운암면의 국사봉과 청웅면 백련산, 덕치면 회문산, 삼계면 원통산, 성수면 성수산, 신덕면 치마산 등에서 올린 봉화를 신호로 임실군내 각지에 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가 외쳐졌다. 이런 움직임은 3월 12일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토대가 되었다. 김영원은 이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기각으로 징역 1년이 유지되었다.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8월 26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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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기념비
갑오동학혁명기념비는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중 하나이며, 임실 지역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최동안, 김정갑 등이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1983년 6월에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임실 지역은 남원에 대도소를 차리고 전라좌도를 통할하던 김개남의 휘하에 있던 지역이며, 임실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6월 중순부터 읍내에 도소를 설치하고 현감 민충식(閔忠植)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당시 대접주는 최봉성(崔鳳成), 김영원(金榮遠)이었으며 도접주는 최승우(崔承雨)를 비롯하여 30여명의 접주가 있었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