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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비
순국열사비는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애국심으로 승화시킨 순국열사의 고귀한 정신을 자손만대에 전하고저 1949년 4월 29일 건립한 비이다.1919년 4월 4일,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을 중심으로 이곳 장터에 모인 수천명의 군중앞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왜적의 총칼 아래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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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은 익산의 독립운동사를 1관, 2관, 3관으로 구분하였다.1관은 항일운동인데,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하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으며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군에 대항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당하자 우리 민족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우리민족은 독립선언을 기획하였다. 1919.3・1운동은 전 세계에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민족독립운동이었다.2관은 일제수탈인데, 익산은 만경강의 풍부한 농업용수, 값싼 토지가격, 양질의 토질,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농경지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 토지, 양곡수탈의 최전선이자 경제침략의 현장이 되었다.특히 이리지역의 오하시농장, 대장촌의 호소카와농장, 불이홍업주식회사 등은 300만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는 대지주였다. 일본인들은 쌀 수확량을 증산하기 위하여 수로 시설을 개선하여 땅을 개간하고 생산된 쌀은 춘포역을 통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 농업인을 이주시키고 그 아래 수만명의 한국 소작농을 관리하였으며, 익옥수리조합은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한 다는 명목아래 토지 개량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른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를 부담시켜 지역농민을 몰락시켰다. 3관은 4.4만세운동인데, 1919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3・1운동 중 익산은 4・4만세운동으로 정점을 맞았다.당시 대교농장 앞이자 솜리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남전교회, 서두교회, 고현교회, 제석교회, 대장교회 등을 주축으로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전개되었다. 1,000여명 군중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수많은 군중에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대가 일본인 농장 관리원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공유, 이충규 등 6인은 현장에서 순국하고 39명이 체포되었다. 국가보훈처를 통해 공훈을 인정받은 익산지역의 독립운동가는 총 9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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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운영병원(삼산의원)
김병수(1898 - 1951)는 익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의 권유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가지고 1919년 2월 25일 군산으로 내려갔다. 이튿날인 2월 26일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朴淵世)를 만나 서울의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전하고 군산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일에는 박연세의 집에서 이두열·김수열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여 3월 5일 군산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군산에서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김병수는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학생 대표인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壁) 등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병수는 1921년 군산 야소교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23년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사재를 들여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공헌하였다. 익산제일교회의 장로가 된 김병수는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청년회관을 건립하는 등 익산 지역 발전을 위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51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병수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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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1919년의 3.1만세운동은 한일합방에 항거하는 통분의 함성이요,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비장한 절규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유지 계승하려는 당당한 주장이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진 거대한 불길의 함성이었다. 이러한 정당하고 평화적인 궐기에 대하여 잔인하고 악독한 살상이라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어졌고 , 같은 해 4월 4일 우리 익산에서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 등 여러 의사가 장터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태극기의 물결을 지휘하던 중 무자비한 일제의 총칼 앞에 장렬한 순국의 영령이 되고 말았다. 이 숭고한 3.1정신을 이어받아 그 거룩한 정신을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1971년 8월 15일 익산 3.1운동기념비 건립협찬회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이 기념비를 건립하여 현재까지 보존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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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창 묘
박준창(1890 - 1962)은 1919년 3월 16·17일에 걸쳐, 정필조(鄭弼朝) 등과 청웅면 남산리(靑雄面南山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정필조 등 마을 유지들과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6일 오후 9시경, 남산리 뒤 들판에서 1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튿날에도 계속하였다. 그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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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제 구 묘
조희제(1873 - 1939)의 자는 운경, 호는 염재이며, 일제강점기 『염재문집초고』를 저술한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대성하였다. 그 뒤 우국지사 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김병주(金炳周) 등과 도의로 교유하면서 격변하는 시국에 대하여 강개(慷慨)한 뜻을 품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한말 사변의 전말과 또는 절의(節義)를 세운 의열사(義烈士)·의병들의 실적(實蹟)과 문헌을 수집, 『염재야록(念齋野錄)』을 편찬하였다. 평생 정력을 다하여 집필한 그 비사(秘史)가 1938년 11월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임실경찰서에서 10여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당시 그 『염재야록』에 서문을 쓴 최병심, 발문을 쓴 이병은, 교정을 본 김영한(金寗漢), 서역을 맡은 조현수(趙顯洙) 이외에 많은 가담인사들까지도 모두 구속되는 한편, 본인 및 그 아버지의 문집초고 등도 모조리 압수당하였다. 울분이 쌓여 병이 나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또 체발(剃髮)을 강요당하자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차히 사는 것보다는 차리리 대의를 지켜 죽음을 맹세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효행이 독실하였다. 저서로는 『염재문집초고(念齋文集草稿)』 8권이 있었으나 압수되었고 편저로는 『염재야록』 6권 2책이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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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유허비
최창렬(1875 - 1940)은 1912년 이석용(李錫庸)이 의병 활동 재개를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이석용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07년 8월 26일 전북 진안(鎭安)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9월 12일 밤 전북 고창(高敞)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이석용은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의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와 합세하여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한 뒤 의병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였다. 그 후 이석용은 1912년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고 의병의 재기를 준비하였다. 그 단원은 곡성(谷城)의 유인수(柳寅秀), 안자정(安子精),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등과 남원(南原)의 김경호(金景浩), 김인식(金仁植), 허간(許幹), 허주(許柱), 허업(許業), 조성민(趙成珉), 김학수(金學洙) 등이었다. 이 비밀결사대는 직접 전투에 참여치는 않았으나 모병(募兵)을 비롯하여 무기·군자금·군수품 등을 보급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최창렬은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단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군수품을 보급하여 이석용의 의병 활동을 후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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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집
최창렬(1875 - 1940)은 1912년 이석용(李錫庸)이 의병 활동 재개를 위해 조직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석용은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07년 8월 26일 전북 진안(鎭安)에서 거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9월 12일 밤 전북 고창(高敞)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이석용은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의 삼남창의소(三南倡義所)와 합세하여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8년 9월 임실전투(任實戰鬪)에서 패한 뒤 의병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였다. 그 후 이석용은 1912년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고 의병의 재기를 준비하였다. 그 단원은 곡성(谷城)의 유인수(柳寅秀), 안자정(安子精),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등과 남원(南原)의 김경호(金景浩), 김인식(金仁植), 허간(許幹), 허주(許柱), 허업(許業), 조성민(趙成珉), 김학수(金學洙) 등이었다. 이 비밀결사대는 직접 전투에 참여치는 않았으나 모병(募兵)을 비롯하여 무기·군자금·군수품 등을 보급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최창렬은 비밀결사대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단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군수품을 보급하여 이석용의 의병 활동을 후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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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유허비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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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집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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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용 묘
이석용(1877 - 1914)의 자는 경항, 호는 정재이며, 대한제국기 임실, 순창, 태인, 남원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우리나라의 재정 간섭을 강화하자, 1906년 임실 · 장수 · 진안 · 남원 · 함양 · 순창 · 곡성 등지에서 동지를 얻고, 조정을 비롯하여 전국의 동포, 그리고 일본정부와 세계열강들에게 격문 · 통고문 · 규탄문 · 건의문 등을 선포하면서 민족의 주권확립에 노력하였다.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삼연의 의진에 입진하는 것보다 독자적인 의진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뒤에 연합할 것을 기약하며 8월 26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상이암(上耳庵) · 황사현 등지에서 재차 동지들과 창의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에 의진을 ‘의병창의동맹’이라 명명하고, 진용을 정비하여 선봉 · 중군 · 후군 · 참모 · 총지휘 · 연락 · 도로부장 · 보급 · 운량 등의 부서를 정한 뒤, 9월 4일 진안 석전리에서 거병,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전해산을 참모에 기용하고, 박만화(朴萬華) · 여운서(呂雲瑞) · 김공실(金公實) 등의 용장들을 각 부서에 임용하였다. 1907년 9월 12일 마이산(馬耳山) 남쪽기슭의 용암(龍巖) 위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하여 오로지 “왜인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고 외쳤다. 13일에는 진안읍을 기습하여 적장에게 총상를 입혀 패주케 한 뒤, 그들의 복장 · 양총 · 비단 · 문부(文簿) 등을 노획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우편소를 습격, 파괴하여 우편물을 소각하고, 전선을 모조리 끊었다. 16일에는 내원사(內源寺) 골짜기에서 적병 1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後方山)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나 일본군과의 군사력의 열세로 많은 의병을 잃었지만, 진안 · 용담 · 정천 · 임실 · 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 · 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聖壽山)에서 의진을 재편하였다.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하였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武戌村)에서 적 2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 3월 14일 마근현(麻根峴), 3월 17일 수류산(殊流山), 3월 27일 관촌역(館村驛), 4월 30일 가수리(嘉水里)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휘하의 봉수 · 덕홍 등 승려와 박철규 · 허천석 등 소년의병이 전사하였다. 1909년 9월 의진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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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의사 묘
28의사의 묘는 이석용 의병장 휘하에서 활동하던 28명의 의사의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