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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식 사당(백산서원)
백산서원은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보여준 굳은 절의와 효열정신으로 충과 효를 본소 실천, 독립운동에 참여 하였으며 귀감이 되는 분들의 위패를 봉안,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익산관 내 유림들이 서기 1915년에 사당과 지역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의 도장 세한당을 건립하였으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서기 1999년 8월 14일에 준공하고 동년 10월 22일에 위패 봉안과 준공식을 거행한 후 서기 2000년 4월 11일에 익산향교와 유도회 유림들이 발의하여 연일정씨문 제 15세순 학포공 숙주, 홍문관 대제학을 추향하여 다섯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서원이다. 정동식의 위패도 모셔져있는데, 정동식(1850 - 1910)의 자는 경필이며, 개항기 선전관, 훈련원주부, 훈련원첨정 등을 역임한 무신이자 순국지사이다. 1876년 무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친군별영초관 겸 선전관(親軍別營哨官兼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충무위좌랑(忠武衛左郎)으로 옮겨졌다. 그뒤 훈련원주부 및 수주부(首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첨정이 되었다. 이때 조정 군신들의 일제와의 강화 및 관리들의 부패를 통탄하여 사직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통곡하며 포고문(布告文)과 토적문(討賊文), 자제들에게 주는 글 및 종족들에게 주는 글을 써놓고 완산부로 떠났다. 안찰사 이두황(李斗璜)에게 토역문(討逆文)을 제시하면서 “내가 힘이 부족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부끄러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죽어 귀신이 되어 왜적을 섬멸, 우리 선왕의 원수를 갚겠다.” 라고 하고 공북루(拱北樓)에 올라가 의관을 정제한 다음 목매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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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묘
이규홍(1877 - 1928)의 자는 원오, 호는 오하이며, 대한제국기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6년 4월 박이환(朴駬桓)·문형모(文亨謨)와 더불어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만나 의병 활동에 동참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의병 200여 명을 모은 뒤 총기 300여 자루와 탄환 등을 준비하였다. 1907년 11월 257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고산·진안·장수·용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1908년 초까지 왜병 100여 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규홍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용담 주자천(朱子川: 지금의 朱川)에서 1908년 새해를 맞고,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에 이르기까지 진산·금산 등지를 계속 행군하며 왜군과 접전, 왜병 56명을 죽였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창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다가, 1920년 3월 항일운동의 무대를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4개월 동안 고문을 받은 뒤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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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기념비
이규홍(1877 - 1928)의 자는 원오, 호는 오하이며, 대한제국기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6년 4월 박이환(朴駬桓)·문형모(文亨謨)와 더불어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만나 의병 활동에 동참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의병 200여 명을 모은 뒤 총기 300여 자루와 탄환 등을 준비하였다. 1907년 11월 257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고산·진안·장수·용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1908년 초까지 왜병 100여 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규홍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용담 주자천(朱子川: 지금의 朱川)에서 1908년 새해를 맞고,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에 이르기까지 진산·금산 등지를 계속 행군하며 왜군과 접전, 왜병 56명을 죽였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창립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다가, 1920년 3월 항일운동의 무대를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4개월 동안 고문을 받은 뒤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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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열 추모비
이중열(1869 - 1928)의 호는 좌암이며,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에 천도교 이리교구장으로 재직하던 중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봉우(劉奉祐)·이유상(李有祥) 등의 교인들과 함께 익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중열은 연락 및 군중 동원의 책임자로 유봉우와 이유상 등을 익산, 강경, 논산, 함열 등지에 보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좌암 이중열 추모비’에는 이원규·홍영섭·송일성·최재붕·김병호·전재만·유태유·서성윤·민영순 등이 함께 거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중열은 1919년 4월 14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8년 6월 27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중열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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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독립만세운동기념비
여산 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2003년 5월 1일 여산면의 주민들은 여산지역 3·1독립운동에 참여한 3의사와 여산면 면민들의 나라사랑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비이다. 익산 여산면 주민들에 의해 전개된 3·1독립운동 기념비. 일산 읍내에서는 1919년 3월 3월에 고총건(高寵權)이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르 부르다 현장에서 체포된 적이 있다. 3월 9일 밤 9시에, 전북 익산 · 완주 등지의 여러 곳 산상에서 봉화가 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3월 10일 익산군 여산면에서는 이정·박사국·이병석 등이 준비한 ‘조선자주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200여명의 면민들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여산면 헌병 분견소 남쪽 400m까지 진출하였으나 일본경찰은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이들은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형을 언고받고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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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묘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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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집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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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
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는 익산 4.4만세운동에 참여한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김치옥, 박성엽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익산 4.4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4월 4일 남부시장에서 오산면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와 도남학교 문용기 열사가 주도한 가운데 1천 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일본에 항거한 날이다. 문용기(1878 - 1919)의 호는 관제이며,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군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장에 나와 있던 군중들이 합세하여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영문(1904 - 1919)은 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 집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치옥(金致玉)은 군산(群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른 교인들에게 “독립달성이라는 공통된 목적 아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김치옥(金致玉) 등 300여 명은 이리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생이었던 박영문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는 전날 동생인 박동근에게 “내일 이리 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함께 가면 어떻겠는가?”라며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박영문 등 시위군중은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독립을 요구했다.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가 대교농장(大橋農場) 앞에 이르자 소방조까지 동원해가며 시위 진압에 나섰다. 헌병들은 발포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박도현(朴道玄) 등 4명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16세 학생이었던 박영문도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순국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경춘(1877 - 1919)은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26일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래, 일본의 보병 제 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여 삼엄한 경비를 펼쳐왔다. 그러나 오산면(五山面)의 문용기·박도현 등의 기독교 간부들과 수차에 걸쳐 숙의를 한 끝에, 이리 장날인 4월 4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4일 정오,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이리 장터에 모이자, 그는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대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만세시위의 대열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만세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일제는 수백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까지 동원하여, 총·창검·곤봉·갈구리등을 마구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다가,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벌이던 그는,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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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충혼비
익산4.4만세운동 순국열사비는 익산 4.4만세운동에 참여한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김치옥, 박성엽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익산 4.4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4월 4일 남부시장에서 오산면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와 도남학교 문용기 열사가 주도한 가운데 1천 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일본에 항거한 날이다. 문용기(1878 - 1919)의 호는 관제이며,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군 오산면[현 익산시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장에 나와 있던 군중들이 합세하여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영문(1904 - 1919)은 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그 중심에는 기독교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 집사로 활동하고 있던 김치옥(金致玉)은 군산(群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른 교인들에게 “독립달성이라는 공통된 목적 아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김치옥(金致玉) 등 300여 명은 이리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학생이었던 박영문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는 전날 동생인 박동근에게 “내일 이리 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함께 가면 어떻겠는가?”라며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박영문 등 시위군중은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독립을 요구했다. 일본 헌병들은 시위대가 대교농장(大橋農場) 앞에 이르자 소방조까지 동원해가며 시위 진압에 나섰다. 헌병들은 발포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박도현(朴道玄) 등 4명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16세 학생이었던 박영문도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순국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장경춘(1877 - 1919)은 전라북도 익산(益山)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4월 4일 이리(裡里) 장날을 이용하여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3월 26일 만세시위가 전개된 이래, 일본의 보병 제 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여 삼엄한 경비를 펼쳐왔다. 그러나 오산면(五山面)의 문용기·박도현 등의 기독교 간부들과 수차에 걸쳐 숙의를 한 끝에, 이리 장날인 4월 4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4일 정오,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이리 장터에 모이자, 그는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대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만세시위의 대열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만세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일제는 수백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까지 동원하여, 총·창검·곤봉·갈구리등을 마구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다가,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벌이던 그는, 일제의 야만적인 발포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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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기 집
문용기(1878 - 1919)의 호는 관제이며,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군 오산면[현 익산시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장에 나와 있던 군중들이 합세하여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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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충렬사(忠烈詞)는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구한말 5열사인 이준·안중근·백정기·이봉창·윤봉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제사는 매년 2월 25일 지방 유림들이 모여 지내고 있다.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본관은 덕수, 시호는 충무공이다.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 옥포, 사천, 당포, 당항포, 한산도에서 왜선을 격파하였으며,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남해안 일대의 적의 수군을 몰아내었다. 1597년 백의종군하였으나 원균의 수군이 패배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군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과 맞서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준 열사[1859~1907]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의 밀사로 참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울분한 나머지 분사(憤死)하였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하다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피탈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사형을 당하였다. 백정기 열사[1896~1934]는 1910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상하이의 육삼정에서 일본 요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봉창 열사[1901~1932]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사형을 당하였다. 윤봉길 열사[1908~1932]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전승축하 기념식이 열리자 식장에 참여하여 수류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 요인을 암살하고 사형을 당하였다. 익산 충렬사는 1958년 3월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주민 박필래가 윤리 정신 함양을 위해 유림 양용섭 등의 협력을 얻어 건립하였다. 매년 9월 초정일에 지역 내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과 강당, 담장이 있었으나 2019년 현재는 사당과 담장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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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기 동상
문용기(1878 - 1919)의 호는 관제이며,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1년 군산의 영명학교 한문교사로 부임하였고, 1907년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왓킨스학교에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1년 왓킨스학교를 마치고 함경도 갑산의 금광에서 미국인 통역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익산군 오산면[현 익산시 오산면]에서도 큰 시위가 준비되고 있었다. 오산면은 3월 26일에 펼쳐졌던 만세 시위로 인해서 일본군 제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용기는 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서정만(徐廷萬)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만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 무렵 이리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모였고, 일행은 만세를 부르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시장에 나와 있던 군중들이 합세하여 대열은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가 행렬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본군은 수백 명의 소방대원과 대지주인 오하시[大橋]의 농장 일본인 농장원 등을 동원하여 칼과 곤봉, 갈퀴 등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문용기는 당시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연설하고 있는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리치자 문용기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은 왼팔마저 잘라 버렸다. 두 팔을 모두 잃은 문용기는 굴하지 않고 달려가며 계속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온몸을 난자당하여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용기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