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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봉 공적비
김판봉(1901 - 미상)은 김판봉은 1936년 음력 12월경 전북 익산에서 정해도(鄭海桃)를 교주로 하는 황극교(黃極敎)에 가입하여, 표면적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판봉은 황극교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임을 알고 은세룡(殷世龍)의 권유로 가입한 후 전북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4월경 이간상(李旰相), 김경록(金京錄) 등 20여 명을 입교시키고 김경록의 집에서 수명의 교도들에게 교세확장과 조선독립을 설파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판봉은 1940년 10월 30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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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최대의 민중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쟁이기에 그 흔적이 대둔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둔산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894년 2차 봉기 이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주력이 삼례를 출발하여 여산, 논산을 거쳐 공주 우금티에서 관군.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결국 패하였다. 우금티 전투 패배 이후 농민군 일부는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관군.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70여일 간 항전하던 농민군은 1895년 2월 18일(음력 1.24)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대둔산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역사적 현장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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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의 묘
이재환(1889 - 1951)은 일제강점기 광복회, 주비단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활동 등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살다가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5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주진수(朱鎭守)·우이견(禹利見) 등이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고, 1917년 국내에 들어와 독립군자금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우이견·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권영만(權寧萬) 등과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결의하고, 불응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취지문을 작성하여 각지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이에 자금을 거두어 소진형으로 하여금 임시정부 집금원(集金員)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심영택(沈永澤)·안종운·장응규(張應奎)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주비단(籌備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같은해 12월 강경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1921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2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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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갑 추모비
홍순갑(1896 - 1929)의 호는 우당이며, 일제강점기 민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이상재(李商在) 지도 아래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민정부(民政部) 중앙집행위원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9년 3월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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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사적
김병수(1898 - 1951)는 익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의 권유로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가지고 1919년 2월 25일 군산으로 내려갔다. 이튿날인 2월 26일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朴淵世)를 만나 서울의 독립 만세 시위 계획을 전하고 군산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일에는 박연세의 집에서 이두열·김수열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주민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여 3월 5일 군산에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군산에서 활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김병수는 3월 5일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학생 대표인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壁) 등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병수는 1921년 군산 야소교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23년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사재를 들여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에 공헌하였다. 익산제일교회의 장로가 된 김병수는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청년회관을 건립하는 등 익산 지역 발전을 위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51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병수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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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 묘
임규(1863 - 1948)의 호는 우정이며, 일제강점기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8인 1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8인 중의 1인이었다. 1895년(고종 32) 일본에 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중학교 특별과를 거쳐 동 전수학교 경제과를 졸업한 뒤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다. 손병희(孫秉熙) 등이 주축이 된 거족적인 독립운동계획에 참여하여, 일본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통고문 및 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7시 최남선(崔南善)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통고문 3통과 선언서를 받아 3월 1일 오후 4시경 일본 동경에 도착, 3일에 이 문서를 일본 수상과 의회에 우송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3월 9일 귀국 도중에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본국에 압송되었으나,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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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 추모탑
이상운(1927 - 1945)은 1943년 이리농림학교(裸里農林學校) 2학년 재학 중에 동기생인 장지환·김구·김영준·호중기, 후배 서기용·김봉수·강동석·박기춘 등과 함께 비밀결사 화랑회(花郞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선배 장이규·김직수·김환용과 교외에서 활동하던 김재두·김해룡 등이 조직한 독립단과 공동으로 행동하기 위해 제휴하였다. 화랑회 회원들은 무기와 폭약을 빼앗아 금구주재소를 습격하고 만경강에 놓인 목천교와 군산비행장 등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상운 등은 1944년 11월 폭약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제 모악산에 있는 일본인 광산에 몰래 들어갔으나 경비가 삼엄해 실패하였다. 화랑회 회원들은 체력을 단련하며 다시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4월에 일본 경찰에 조직이 탄로나 모두 검거되었다. 이상운은 일본 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7월 17일 옥 중에서 사망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상운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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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홍규 추모비
소홍규(1882 - 1960)는 1919년 3월 27일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현 대전광역시] 대전면(大田面) 김현태(金顯泰)의 집에서 조상연(曺相連)·윤명화(尹明化) 등과 의논하여 당일 인동장터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대전에서는 3월 3일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친 이후 4월 초까지 4차에 걸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소홍규는 오후 3시경 장터로 가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후손들이 세운 ‘독립의사 소홍규 추모비’에 따르면 1960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는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와는 달리 1952년 1월 1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소홍규의 공적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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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의용추모비
김일환(1889 - 1939)은 한문 수학하며 청운에 뜻을 두었던 중 경술국치의 비보는 모든 것을 격변시켜 통분을 가누지 못하여 논산군 채운면 용화리로 이거하였다. 거기에도 왜인은 가까이 있어 일상 그들과 충돌은 그치지않아 인근까지 알게되었다. 국권회복의 기회만을 기도하던 중 서기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재일우의 호기였다. 국내 3대 시장인 강경장날을 택하여 궐기할 것을 모의하고 손수 태극기를 제작하여 당일에 인근 친지와 나기창 등 동민 태반은 장꾼으로, 태극기는 상품으로 가장하고 시장에 잠입 하오 늦게 옥녀봉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근만여명의 장꾼들은 삽시간에 합세 작열하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만세를 절규하니 가히 강경벌도 흔들릴듯한 기세였다. 겁에 질린 왜적은 당황하여 평화의 군중이 지극히 정당한 국권회복을 외치는 거룩한 행진을 잔인무도하게 일언의 경고도 없이 총격하며 급습하므로 할수없이 밀리던 중 눈앞에 금강 샛강이 가로막혀 진퇴양난의 상태가 되었다. 많은 동지들이 이때 피체되었으나 김일환 선생은 태극기의 노도를 지휘하던 움켜진 농기장등을 강심에 꽂고 힘껏 뛰어건너므로 위기일발 호구를 탈출하고 각처를 암약하며 재봉기를 계획하다가 강경서에 피체되어 매일 동지의 명단을 추궁 당하였으며, 한사 거절하다 못해 감방에서 자결을 기도했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어 미수로 끝났다. 후일 공주법원의 재판에서 유례없는 8년의 중형이 선고되었고 즉시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서울 이감을 지연시키다가 가을에야 이송되었다. 서울 역시 재판을 지연시켜 12월 말쯤 재판정에 끌려가니 판사가 비참한 흉상을 보고 당시 법정 석방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출소 후 고문 여독이 심했지만, 몸을 회복시킬 겨를도 없이 은신할만한 빈집을 찾아 다녔다. 만년에 상엽부락의 빈집 냉방에서 외아들의 어린 손에 의지하여 몽상에도 못 잊는 조국광복의 한을 품고 향년 51세 서기 1939년 정월 22일 서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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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홍규 묘
소홍규(1882 - 1960)는 1919년 3월 27일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현 대전광역시] 대전면(大田面) 김현태(金顯泰)의 집에서 조상연(曺相連)·윤명화(尹明化) 등과 의논하여 당일 인동장터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대전에서는 3월 3일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친 이후 4월 초까지 4차에 걸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소홍규는 오후 3시경 장터로 가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후손들이 세운 ‘독립의사 소홍규 추모비’에 따르면 1960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는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와는 달리 1952년 1월 1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소홍규의 공적을 기려 1986년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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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선 묘
1929년 2월 전주공립보통학교 3학년 재학 당시 김규선(1911 - 미상)은 동맹휴교를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같은 해 2월 3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전주공립보통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30년 2월 초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고창동(高唱東), 박재선(朴在善)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 독서회는 잠시 해산됐으나, 같은 해 2월 하순경 다시 박재선 외 4명에게 독서회를 다시 조직할 것을 설득해 재결성됐다. 4월 하순경 김규선은 자신의 집에서 이겸중(李謙重) 등 5명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지도책임자를 맡았다. 이들은 독서회 산하에 전교지도부(全校指導部)와 학년지도부를 구성하고, 학생들을 포섭해 공산주의를 연구했다. 1931년 5월 20일경 학년 변동에 따라 독서회를 재편하고 계속 지도책임자를 담당했다. 이어 5월 말경에는 전주사립신흥학교(全州私立新興學校) 조균(趙筠)에게 3학년을 대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도록 권유했다. 한편 김규선은 전주합동노동조합(全州合同勞動組合) 간부를 역임하며 삼공정미(三共精米) 동맹파업사건 당시 노동자들을 대변했다. 1931년 7월경 한종식(韓宗植)은 전주 학생들의 적화(赤化)를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연구의 독서회를 조직하게 할 것, 공산주의 의식 교양, 독서회 간의 연락 통일과 혁명기념일에 집회 개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김규선 등은 학생 송별회와 환영회 개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실세 조사 등에 대해 협의했다. 같은 해 12월경부터 1932년 2월경까지 김철주(金鐵柱)가 발행한 ‘반전(反戰) 뉴스’를 독서회원들에게 배포하도록 주도했다. 또한 김문옥(金文玉)에게서 공산주의운동 잡지 『코뮤니스트와 봉화(烽火)』9월호와 10월호를 받아 배포했다. 김규선은 전주지역에서 독서회 조직과 활동,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전주경찰서(全州警察署)의 취조를 여러 차례 받았다. 이후 적색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됐다.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형이 확정돼 전주형무소(全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11월 29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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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배 사당(매곡사) 터
김근배(1874 - 1910)의 자는 광원, 호는 매하이며, 조선 후기에 성균관박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866년 병인양요를 당하여 아직 약관의 나이로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상소하였다.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문명을 떨치다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여 청장년들에게 훈육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뒤 헌병주재소장을 통하여 김근배를 회유하기 위한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자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였으며, 앞으로 수없는 곤욕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