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김일두 추모비
김일두(1891 - 1967)의 자는 동수, 호는 추산이며, 일제강점기 대한유생독립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김병로 집(생가)
김병로(1998 - 1964)의 호는 가인이며,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유년시절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 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1906년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許憲) · 김용무(金用茂) · 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 · 허정(許政)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
순창의병 항일의적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 의병장이 진을 치고 일본군과 전주에서 파견된 시위대에 맞서 격전을 벌이고, 면암 최익현선생이 항일의병본부로 사용하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히 현장이다.순창 항일의병 의적비는 일제의 강압으로 이뤄진 을사늑약에 항거해 이듬해인 1906년 면암 최익현, 돈헌 임병찬 의병장 등 13인의 의사가 의병 투쟁을 결의, 순창객사에서 체포된 역사적 의미를 기려 지난 1985년 세위진 기념비다.
-
전봉준 피체유적비(녹두장군 전봉준관)
전봉준(1855 - 1895)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 유적지는 2005년 5월에 복원한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이다. 전봉준 장군이 붙잡혔던 주막을 재현해 놓은 시설로 당시 부엌, 방, 봉당, 가구, 생활용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부속채로는 주막의 헛간, 창고를 재현해 놓았으며, 농기구 등을 함께 전시하여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
순창출신 8명 항일 영광정
영광정(迎狂亭)은 이 지방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원중이 7인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 1921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산6 번지에 건립한 것이다. 한일합병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김원중은 애국동지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의병투쟁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 마치 미친 사람행세를 하여 왜인들의 감시를 피했다고 하여 영광정(迎狂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처마 끝에는 태극팔괘를 새겨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굳센 의지를 담았다. 6·25전쟁 때 현판이 분실되었을 뿐 그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일부 기둥과 현판을 보수하였다.
-
양윤숙 묘
양윤숙(1875 - 1910)은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호남의군부의 도총독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전라북도 순창 출신. 별명은 양인영(楊寅泳)·양춘영(楊春泳). 자는 윤숙(允淑). 호는 춘계(春溪). 양석민(楊錫民)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이 전국에 구국 의거(救國義擧)를 호소하며 호남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이끌고 정읍, 내장을 거쳐 순창에 이르자, 채영찬(蔡永贊)·김갑술(金甲述) 등과 함께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임병찬의 의병진이 순창에서 무너지고 의병장들이 대마도에 억류되자, 1908년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회문산(回文山)을 근거지로 하여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장(通狀)과 격문을 발송, 동지 120명을 규합하고 호남의군부(湖南義軍府)의 도총독이 되었다. 좌선봉 최화(崔華), 우선봉 임순호(林洵豪), 중군 최산흥(崔山興), 후군 이국찬(李國贊),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으로 의병진을 구성하였다. 8월 의병들을 총칼로 무장시켜 서기협으로 하여금 의병 22명을 이끌고 순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 120명과 교전하게 하였다. 또한 최산흥으로 하여금 의병 40명을 이끌고 남원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 뒤 이국찬에게 12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순창군 서면에서 일본군을 교란시키게 하였으며, 한자선에게는 3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순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게 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 해 11월에는 최산흥에게 50∼60명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임실군의 일본군 막사를 불태워 버렸다. 1909년 1월 일본 헌병대·일본군 수비기마대·일경 주재소 등을 한밤중에 습격, 방화하여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12월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그 해 4월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기우만 묘
기우만(1846 - 1916)은 개항기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의분하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합세하여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전라남도 장성 출신. 참봉 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고종 32) 나주에 세워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고종 33)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호남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치면서 의병 봉기의 기운이 짙어져 갔다.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다. 그 동안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의병의 형세가 커지자 관리들은 자기들 신변에 위험을 느껴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주1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 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 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장병구 구국비
장병구(1897 - 1983)는 전북 전주(全州) 사람이다. 1922년 5월 21일 전북 전주군(全州郡) 운동하면(雲東下面) 금당리(金塘里)에서 김영한(金永翰)·김익환(金益煥)·문병래(文柄來)·김덕칠(金德七)·김명섭(金明燮)·서보국(徐寶局) 등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하여 금당리 산중(山中)에 있는 서정관(徐政官)의 빈집에 인쇄기계와 석판(石版) 등을 설치, 조선은행발행(朝鮮銀行發行) 1원권 40,000여 매와 50전 지폐 3,000여매를 인쇄한 것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2년 12월 2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통화위조(通貨僞造)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추념탑
전북 완주군 경천면 완주독립운동추모공원은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1994년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 추념탑, 현충문 등을 건립하며 조성이 완료됐다. 독립운동추념탑은 글귀가 새겨진 두 개의 바위와 둥근 기둥, 반구 형태의 조형물로 이뤄져 있는데 바위 위로 각각 ‘민족의 얼’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노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형물의 둥근 기둥의 가장 윗부분, 활시위에 해당하는 부분은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형상으로 독립을 향한 우리 선열들의 기백과 강열한 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추념탑 이면에는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 28인의 명판과 독립선언문, 추념탑 설립 취지 등이 함께 기록돼 있다.
-
일문구의사사적비
1982년 5월 건립하였고, 국가보훈처에서 2003년 9월 15일 현충시설로 지정․관리하고 있는 시설이다. 9의사는 유중화, 유현석, 유영석, 유준석, 유태석, 유명석, 유연청, 유연풍, 유연봉의 9인이다. 이들이 처음 거병한 데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시작된 최익현, 임병찬 장군의 의병활동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유치복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같은 지역의 유지명, 송태식 등과 친족 8인과 함께 1907년 의병을 조직하였다.이들 의병장은 비봉면 소농리에 병기 제작소를 두고 고산, 익산, 여산, 진안, 금산, 연산까지 그 세력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1910년 10월 유치복 선생이 체포되고 나머지 8 의사들도 1916년 체포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유치복 선생은 총살을 당하였고 나머지 8명의 의사는 최소 10년의 형을 언도받아 옥살이를 하였다.
-
동학농민혁명봉기비
1892년 10월 17일경 동학교단은 서인주와 서병학이 주도하여 공주에서 교조의 신원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여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금지 등을 요구했다. 이어 11월 3일에는 최시형이 교도들을 삼례에 집결시켰다. 공주 집회 때와 유사한 요구를 했지만 이 집회를 통해 전봉준이 동학교단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삼례집회에서 소장(訴狀)을 작성한 것은 서병학(徐丙鶴)이었고 ‘괴수’는 서인주(徐仁周)였다. 서병학에 의해 소장이 작성되기는 했으나, 탄압이 두려워 소장을 고정(告呈)할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자원해서 나선 인물이 바로 우도(右道)의 전봉준과 좌도의 유태홍(柳泰洪)이었다.이후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후 전주성을 점령하였던 농민군은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9월 초순경 대원군측의 밀사와 접촉하여 중앙정국의 현황과 청일전쟁의 귀추에 대한 최신정보를 입수한 전봉준은 9월 10일 무렵부터 제2차 기포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삼례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기병준비에 착수하였다. 삼례는 백여 호도 안 되는 작은 고을이었지만,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었고 다수의 농민군이 임시거처로 사용할 수 있는 저막(邸幕)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5, 6일 후에는 직접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로 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이와 함께 인근 지역의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9월 9일에는 전라도 금구의 농민군이 고산 관아를 공격하고, 다음 날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 쪽으로 향하였다. 10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여산을 공격하였고, 13일 밤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돌아갔다. 14일에는 삼례에 모여 있던 농민군 8백여 명이 전주성으로 쳐들어가 화포 74문, 탄환 9,773발, 탄자 41,234개, 환도 300자루 등을 무기를 탈취해갔고, 16일에는 백여 명의 농민군이 위봉산성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갔다. 또 8월 말부터 남원에서 재기포 준비를 김개남도 이 무렵 인근 읍으로부터 무기와 군수물자를 적극적으로 끌어 모았고, 9월 26일에는 손화중도 통문을 돌려 인근 농민군을 광주에 결집시켜 전봉준에 호응하였다.
-
동학농민군 출진상
전봉준이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제2차 봉기를 준비한 곳이다. 1894년 10월의 삼례농민봉기는 국권수호를 위하여 일어선 반일항전의 출진(出陣)이었다. 일본군의 국권침탈만행에 일어선 10만여 동학농민혁명은 주적을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고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이곳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