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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첫 집결지)
1894년 1월 10일 고부봉기 이후,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민중은 3월 20일에 무장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확대한 후 3월 23일에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3월 26일(양력 5월 1일)에 백산대회를 개최하여 지휘부와 혁명군을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였다.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이곳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분토동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각자 죽창을 들고 있었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쓴 붉은 깃발을 내걸었으며,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 고을 이름을 쓴 작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들은 부안 관아에 편지를 보내 시장(市場)에서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分錢收稅]하는 것을 금지할 것 등 4개 조의 고치기 힘든 폐단[弊瘼]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들 중 일부는 부안 관아를 점령하고, 전라 감영으로 보내기 위해서 부안현에서 모은 장정(壯丁)을 해산시키며 "지금 이들 장정을 모은 것은 오로지 우리를 방어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은 일제히 나가서 각자 자기가 하던 일에 종사하라."라고 하였다. 일부는 부안현 서도면(西道面) 부흥역(扶興驛)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처럼 분토동과 분포재는 부안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집결한 역사의 현장이다. 부안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집결한 이곳 분토동은 부안김씨 직장공파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으며, 분포재는 조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은 김보칠(金甫漆)의 재실이다. 편액은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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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송덕비
이승호(1890 - 1966)는 전북 부안(扶安) 사람이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며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폈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요원인 이완식(李完植)·김진억(金鎭億)·이문용(李文庸)·이영필(李永弼) 등이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독립군자금을 요구하자 이에 적극 호응하여 600원을 지원하였다. 그후 서울 익선동(益善洞)에 은닉해 있던 이완식·이문용 등에게 총 3,600원에 달하는 막대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차로 군자금 모집요원인 부안의 자택으로 방문하였을 때인 1920년 11월 600원을 제공하였고, 1921년 1월에 각각 200원, 1,800원과 1921년 5월에 1,000원을 제공하여 총 3,600원을 희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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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김낙철과 쟁갈마을)
부안 동학의 대접주이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였던 김낙철(金洛喆)의 본관은 부안, 자는 여중(汝仲), 도호는 용암(龍庵)이다. 1858년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쟁갈 마을에서 태어났다. 쟁갈 마을은 안쟁가리.용성리.새멀,송학동 등 4개로 형성되었는데, 김낙철은 새멀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십 명의 하인을 거느린 천석꾼이었다고 하며, 동생 낙봉과 함께 1890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의 포교로 부안의 동학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였다. 김낙철은 1893년 교조 최제우의 사면복권과 동학을 공인받으려는 교조신원운동으로 전개된 광화문 복합 상소와 보은집회 당시, 전라도 책임자로 도도집(都都執)을 맡았다. 고부봉기 이후에는 도소를 설치하여 부안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주도민이 부안에서 식량을 구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아사(餓死)를 면하게 되었다. 김낙철은 2차 봉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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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선 기적비
김낙선(1881 - 1925)은 대한제국기 이용서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김낙진(金洛振). 전라북도 부안 출신이다. 1909년 의병장 이용서(李用西)의 부대에 가담하여 총기 15정 등으로 무장한 의병 30여 명과 함께 고부·부안·태인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일본군 기병대의 습격으로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고 피신하여 집에서 치료를 받은 뒤, 8월에 다시 이용서의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임명되었다. 계속해서 총기 8정 등으로 무장한 부하 12명을 지휘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를 이동하며 활약하었다. 그러다가 김제에서 일본 헌병에 붙잡혀, 같은 해 11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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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 1독립운동추모비
1919년 3월 1일에 펼쳐진 독립만세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비석의 뒷면에는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최인,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 이종일, 나인협, 홍기조,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박준승, 김완규, 양한묵, 이인환, 박희도, 최성모,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이갑성, 김창준, 이필주, 오화영, 정춘수, 신석구, 박동완, 김병조, 유여대, 한용운, 백용성의 이름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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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병 묘
김기병(1831 - 1895)은 부안(부령)김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1831년 1월 21일 부안군 상서면 내동마을에서 탄생,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의지가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충만한 인격으로 성장하였고 결혼 후 미개발된 상선마을에 이주, 광범위한 농지개발로 크게 번창하여 부안 군내의 유수한 농사 재벌이 되었다. 당시는 조선말 개화기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하고 국내적으로 누적된 부정부패,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국가 사회의 비극상에 비분강개하던 김기병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보국안민" 등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 두목이 된 후 정열적으로 의기투합한 농민들을 설득 취합하여 부안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부안 변산 해창에 있었던 국방용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킨 후 우덕동 앞들에서 무기 사용법을 훈련시켜 주민들로부터 환호와 경탄을 받았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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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줄포 세고 터)
줄포는 서족으로 칠산바다, 동쪽으로 고부평야, 그리고 북쪽으로 변산반도를 끼고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를 갖추고 있으며, 무장과 흥덕에서 고부와 한양으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로 인해 서해안 일대의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창고로 고려시대에는 안흥창(安興倉), 조선시대에는 고부군 서창(西倉) 또는 부안헌의 남창(南倉)이 있었다. 한편, 조선 시대 줄포는 제주도에서 진도, 법성포, 줄포로, 군산포를 거쳐 한양의 마포나루로 이어지는 서남해 연안 항로를 연결하는 경제활동의 중심 항구였다. 일본강점기에는 전북지역에서 생산한 쌀의 일본 수출 항구로 가능하며, 서해의 4대 항구(제물포, 군산, 줄포, 목포)로 성황을 이루었다. 고부봉기 이후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던 지도부는 1894년 3월 1일[양력 4. 6], 줄포 세고를 점령한 뒤 군량(軍糧)을 확보하였고, 3월 10일에는 인근의 사냥꾼에게서 총기(銃器)를 거두어 들였다. 고부를 떠나 무장으로 이동한 후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이 고창과 흥덕을 거쳐 3월 23일[양력 4. 28] 줄포 사정(射亭)에 와서 머무른 후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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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집강소)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동학농민군이 머물며 자치를 실현한 부안 도소(道所)였다. 도소는 집강소(執綱所) 또는 도회소(都會所)라고도 한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에서 민중이 최초로 쟁쥐한 민관 협치(協治) 기구로 평가받는다. 1894년 7월 6일(양력 8월 6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이 합의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 동학농민군이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며 자치(自治)를 실현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주도하여 설치한 지역, 동학농민군과 관(官)이 공존한 지역, 보수적인 유생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항한 지역 등으로 나뉜다. 부안 도소는 부안 현감을 비롯한 지역민의 요청에 따라 김낙철(金洛喆) 대접주 등 동학농민군이 주도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부안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부안 도소로 사용한 신원재는 부안에 세거하는 신씨의 중시조 덕무공(德武公)을 모시는 덕무공파의 종중 재각이다. 재각 뒤편은 신씨 선산이 있는 고성산(古城山)이다.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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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묘
임병찬(1851 - 1916)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주4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주5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주1 · 군량 · 연병(鍊兵)주2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 · 정읍 · 순창 · 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주3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 · 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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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피체지
임병찬(1851 - 1916)은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이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전라북도 옥구 출신.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11월에 1,000냥을 내어 구휼주4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백성을 진휼주5하였으며, 다음 해 징세(徵稅)할 때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공을 추천하여, 2월에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兼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 12월 1일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함으로써 12월 4일 김개남이 처형되었다.1906년 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주1 · 군량 · 연병(鍊兵)주2의 책임을 맡아 홍주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 · 정읍 · 순창 · 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주3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 · 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년 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저서로는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의거 후 잡혀 취조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 5월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운동사 및 사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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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영 유허비
설진영(1869 - 1940)은 일제강점기 『남파유고』를 저술한 유학자.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순창(淳昌).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아버지는 통정(通政) 설상기(薛相基)이며, 어머니는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최덕순(崔德淳)의 딸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전라북도 진안 이산묘영광사(駬山廟永光祠)에 충의열사 33인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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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영 서실
설진영(1869 - 1940)은 일제강점기 『남파유고』를 저술한 유학자. 의사(義士)이다. 본관은 순창(淳昌). 초명은 설진삼(薛鎭三). 자는 도홍(道弘). 호는 남파(南坡) 또는 율재(栗齋). 아버지는 통정(通政) 설상기(薛相基)이며, 어머니는 탐진최씨(耽津崔氏)로 최덕순(崔德淳)의 딸이다.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광선(高光善)·박인섭(朴寅燮) 등과 교유하였다. 1895년(고종 32)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기우만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장성·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강탈을 당하자 아미산(峨嵋山) 남쪽 기슭에 남파서실(南坡書室)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경주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여 맹세코 성을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 2절과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전라북도 진안 이산묘영광사(駬山廟永光祠)에 충의열사 33인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남파유고(南坡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