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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양방매 부부사적비
강무경(1878 - 1910)은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 체결 후 심남일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 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 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 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 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양방매(1890 - 1986)는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후기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인 강무경(姜武景)의 부인으로 남편을 따라 항일전에 투신하였다.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이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에는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영암군 금정면(金井面)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에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하였다. 양덕관은 양방매의 친아버지였고 큰 오빠였던 양성일(梁成一)도 20세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양방매는 남편부대의 일원으로 장흥(長興)·보성(寶城)·강진(康津)·해남(海南)·광양(光陽)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이 남평(南平) 월교리(月橋里)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후 대치(大峙)·대항봉(大巷峰)·월임치(月任峙)·덕룡산(德龍山)·병암치(屛岩峙) 등지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 남평의 거성동(巨聲洞)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여기에 직접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호남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해오자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강무경은 1910년 10월 4일 심남일과 함께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고, 양방매는 어린 여성의 몸이었기에 석방될 수 있었다. 정부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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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순국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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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집
강무경(1878 - 1909)은 전라북도 무장 출신으로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 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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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사지
덕유산과 적상산 등 높고 험한 산이 많은 무주지역은 예부터 국난이 있을 때마다 구국항쟁을 벌이던 의병들의 요람이었다. 특히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이 강제된 뒤부터 전북 동북부를 무대로 활발히 전개된 중기의병과 후기의병의 대부분은 덕유산 자락의 계곡과 사찰 등지를 근거지로 삼아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문태서, 신명선, 김동신, 박춘실 등이 이끄는 의병이 1908~1909년 원통사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특히 1908년 4월 13일 오전 10시경 적의 기습 공격을 당하여 신명선을 비롯한 의병 수십 명이 희생된 곳이 바로 원통사 인근이었다. 원통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일정한 규모를 갖추었다. 1949년 여순사건 때 소실되자 기존의 절터는 그대로 남겨두고 현재의 가람은 1976년 이후 차례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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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 3.1운동발상지 기념 전일봉 동상
전일봉(1896 - 1950)은 전북 무주(茂朱) 사람이다.1919년 4월 1일 무주군 무주읍(茂朱邑)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이곳 무주에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인근의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3월 7일경이었다. 이에 이곳 인사들은 다른 지방 인사들과 접촉하거나, 군민들간의 연락을 통해 만세운동을 준비해 나갔다.이때 전일봉은 인근의 기독교도들과 접촉하면서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해 갔으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 무주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일로 정하는 한편, 읍내보통학교 학생들과 뜻을 같이하여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거사 일인 4월 1일 오후 2시경, 40∼50여 명이 먼저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세우고 집합한 다음, 전일봉이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주위의 장꾼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헌병 분견소의 무장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들 시위군중을 해산시켜 버렸다. 이때 전일봉과 보통학교 학생 3명이 붙잡혔으나, 그날 밤 읍내 주위 산상에서 청년 및 보통학교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전일봉은 이 일로 이해 4월 11일 광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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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권 묘
박병권(1907 - 1942)은 박병권은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고등과 2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28년 1월 28일부터 1929년 1월 25일까지 부안군 동진면(動津面)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 경부터 최옥환(崔玉煥), 최순환(崔順煥) 등과 함께 신사상 연구를 시작하고 1931년 음력 10월 경부터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堂上里)에서 모여 회의한 결과 1927년부터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전해져 오는 위친계(爲親契)를 바탕으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2월 말 명칭을 당상리저축조합(貯蓄組合)으로 하고, 최상기(崔相基) 등 위친계원 31명의 찬성을 얻어 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농민의 권익보호와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이로 인해 박병권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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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환 묘
최순환(1912 - 1950)은 최순환은 1926년 3월 부안공립보통학교(扶安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4월 경성사립중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자퇴하고 최옥환(崔玉煥),박병권(朴炳權)과 함께 신사상연구를 시작하였다. 최순환과 동지들은 1931년 음력 10월경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에 조직된 '위친계(爲親契)'라는 조직을 '농민조합'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당상리 저축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최순환은 동(同) 조합의 서기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약 1년 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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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구 묘
김철수(1893 - 1986)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군산(群山)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조직에 참가했다.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28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 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4년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26년 9월에는 책임비서가 되었다. 동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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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추모비
김철수(1893 - 1986)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군산(群山)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조직에 참가했다.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28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 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4년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26년 9월에는 책임비서가 되었다. 동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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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산)
부안 백산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을 가르는 대사건으로 평가받는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은 1893년 11울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하고, 이듬해(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 이후 무장기포를 거쳐 1894년 3월 26일(양력 5월 1일), 호남일대에서 모인 구눙이 야트막한 백산에 집결하였다. 그 수는 전라도 34개 지역에서 모인 8천여 명으로 전하는데, 이를 두고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 이라고 하였다. 백산에 모인 군중은 지휘부를 비롯한 혁명군을 조직하고, 봉기의 대의와 지향하는 바를 밝힌 '백산 격문',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군율'을 선포하였다. 이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세상에 알렸다. 백산을 택한것은 '백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라는 비결이 전하는 길지라는 점, 군량확보가 용이한 곡창지대라는 점, 전략적 용충지일 뿐 아니라 사통팔당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1894년 당시 고부 백산이 1914년 일본강점기에 부안 백산이 되면서 한때 백산대회는 잊혔지만,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기념일 제31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9월 17일 국가문화재 사적 제409호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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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
조선 시대 공개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집행하였다. 중한죄를 지으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형하는 것[不待時斬]'과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한다는 선참후계(先斬後啓)를 적용하였다. 따라서 부안에서의 공개 처형은 부안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소, 즉 부안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원루(聚遠樓) 또는 후선루(候仙樓)라 부르는 남문 밖이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으로, 1894년 12월 29일(음력) 정부군의 총살로 순국하였다. 이듬해(1895) 1월 12일에는 주산면 홍해 마을의 박문표(朴文表), 도산 마을의 김봉보(金奉甫), 그리고 송성구(宋成九)가 남문 밖에서 순국하였다. 한 달 뒤 2월 12일에는 남문 밖에서 9명이 순국하였고, 열흘 뒤 22일에는 7명이 순국하였는데, 장소는 무론 이름마저 알 수 없다. '호남의 대괴(大魁)'로 불리던 김석윤(金錫允.김영조)이 순국한 것은 3월 18일이지만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순국한 부안 사람으로 확인된 숫자는 22명이지만, 이름이나마 확인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명은 신원조차 알 수 없다. 12명의 순국 장소는 남문 밖으로 전하지만, 이외는 장소마저 알 수 없다. 이와 함께 부안 읍성의 동문 밖에서도 처형이 자행되었으며, 전남 나주로 끌려간 30여 명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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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관아 터)
조선 시대 부안 관아는 현감이 사무를 보는 동헌[東軒.패훈당(佩訓堂)]이 지금의 감리교회 자리에, 그 서쪽에는 현감의 숙소인 내아(內衙)가 있었다. 관아 출입문으로 2층의 진석루(鎭石樓)가 있었고, 그 앞 좌측 너럭바위에 <주림옥천(珠林玉泉) 봉래동천(蓬萊洞天)>의 여덟 글자가 새겨 있었다. 지금의 부안군청 자리에는 부풍관(扶風館)이라 부르는 객사(客舍)가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이 된 백산대회 이후 부안 동학농민군이 부안읍 모산리 분토동에 최초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일부가 합류하여 부안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먼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전라 감영에서 부안 현감에게 지시하여 모집한 장정(壯丁)들을 해산시켰다. 그 뒤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과 손화중이 부안 관아에 머물렀으며, 관아 뒤편에 있는 성황산에 주둔하였다. 부안에 집결했던 동학농민군은 4월 7일[양력 5.11] 황토현 전투의 주력군으로 참여하여 승리하였고, 황토현 전승일은 2019년에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관아는 동학농민군과 관원이 공존하며 질서를 유지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