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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 백두대간 표지석
1894년 갑오년 당시 남원의 서부평야지대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부 고원지대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수성군과 함께 이 능선 백두대간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음)11월 중순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를 비롯한 유복남, 남응삼 등의 전라좌도 농민군은 영남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방아치에서 대규모전투를 벌렸으나 영남지방의 지원을 받은 민보군과 수성군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갑오년 당시 이 능선을 경계로 겨루었던 농민군이나 민보 수성군 모두가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기에 그 분들의 추모하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영원한 평화와 상생을 다짐하고자 이곳 백두대간에 표석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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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홍 묘
유태홍(1867 - 1950)은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그는 천도교(天道敎)인으로서 1919년 3월 2일 남원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그는 당시 남원읍 천도교 교구장으로서,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任實郡屯南面獒樹里)에 사는 천도교 전도사 이기동(李起東)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덕과면 사율리(德果面沙栗里)의 이기원(李起元)으로부터 이날 오전 9시경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았다.그는 즉시 장남인 유 석(柳錫)·천도교인인 김성재(金性在) 등 8명을 불러놓고 서울의 정황을 설명한 후 이들에게 9매의 독립선언서를 건네주어 군내에 배포하게 하였다. 그들은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南原)지청 등 관공서 게시판에 독립선언서를 붙여 군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8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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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쪽뚤 표지석
쪽뚤은 1894년 11월 13일 남원지역에서 일어난 최대규모의 전투였던 방아치 전투와 여원치 전투에서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남원지역 농민군들이 진을 쳤던 곳이다. 남원의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의 민보군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쳤던 곳으로 그것을 기념하여 현재 비를 세워두고 있다.기념비의 정면에는 쪽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측면 오른쪽에는 현위치와 농민군이 깃발을 내걸었던 깃대바위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도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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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물 깃대바위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남원지역 농민군들이 쪽둘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하던 과정 중에 주둔지 위쪽에 승전 결의와 표식을 위헤 깃발을 꽂은 곳이다. 이 바위에 두개의 홈을 파서 깃대를 세웠다고 한다. 농민군이 이곳에 주준한 목적은 방아치와 여원치의 두가지 공격로를 두고 민보군에게 혼선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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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추모비
「항일 독립만세 운동 순국 추모비」를 건립한 이유는 1919년 4월 4일 항일독립 만세운동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치신 방양규, 방진형, 방극용, 방명숙, 방제환 다섯 분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뜻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주생면 출신 5열사는 1919년 4월4일 항일독립 만세운동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순직했다. 5열사는 방양규, 방진형, 방극용, 방명숙, 방제환 다섯 분이다. 5열사는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가 전국에 메아리 칠 때 4월4일 장날을 기해 남원, 순창, 임실 등지에 사는 수천명의 군중들이 광한루 광장과 북부시장터(구남원역전 앞) 등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5열사는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현장에서 여덟 분의 열사가 순절하셨다. 이날 순절자 중 다섯 분의 열사가 남양 방씨 가문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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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동학농민군 유적지 광한루원 표지석
1960년대 광한루원 확장사업 이전에 광한루원의 호수 나목은 성밖시장(남원장)이었다. 동학의 교조 수은 최제우선생이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1861년 겨울, 경주에서 피신차 남원에 들어와 광한루 오작교 주변 서형칠의 약방에 머물다가 공창윤의 집을 거쳐 교룡산성 내 덕밀암으로 옮겨 은적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경전 집필과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 된 시초다. 서형칠약방은 광한루원 경내인 완월정 앞 호석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음) 11월 28일 전라좌도 농민군이 민보군과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들이 성밖시장 저자거리에서 참살당하였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본 잔디광장 시작 지점 부근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때 천도교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실패한 뒤, 덕과면장 이석기가 주도한 3월3일 동해골과 계명당고개 만세운동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장날 성밖시장(현 광한루원)에 모인 군민들이 대대적으로 만세를 부르며 오작교를 거쳐 남원부관아를 향하며 성안시장(현 남원교육문화회관) 군민들과 합류하려다가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잡혀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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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풍 불망비
김시풍(미상 - 1894)은 개항기 전주감영영장을 역임한 무신이다. 전라북도 전주 출신.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장교로 일찍이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60세 가량의 기골이 장대한 노인으로 전주감영의 영장(營將)으로 있었다. 동학농민군을 막아 내라는 임무를 띠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된 홍계훈(洪啓薰)이 5월 11일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과 의논, 전주성내에 동학농민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사람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전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 등과 같이 체포되었다. 같은 달 15일 목이 잘려, 16일 아침 역시 같은 혐의로 목이 잘린 김영배(金永培)·김용하(金用夏)·김동근(金東根)과 함께 전주 남문(南門) 밖 장터에 효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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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 관아 터
남원은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1861년 경주로부터 피신해 오시어 교룡산의 은적암에 약 반년 동안 은거하시며 논학문(일명 동학론)등 동경대전의 주요 경전을 집필하시며 포교하셨던 동학의 성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장군이 음력 6월 하순에 무혈입성하여 북으로는 금산, 진산에서 부터 남으로는 순천, 광양까지를 관장하는 전라좌도 대도회소와 전라좌도 대집강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관장했는데 그 자리가 여기 남원부 관아 터이다. 7월 중순에는 7만여명의 농민군이 운집하여 남원대회를 열었으며 김개남장군이 정병을 이끌고 북상한 뒤에 남은 농민군이 운봉을 공격하려다가 방아치전투에서 수천 명이 순절하였고 이어서 남원성전투에서 민보군에게 패전하여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 후 일본군이 진주아여 많은 백성을 살상하고 방화하는 참상을 겪었으나 살아남은 농님군은 신간회, 3.1운동 등의 구국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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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의병장사 상
황대연, 이병렬, 이종성 의병장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리고자 건립했다.황대연(1876 - 1908)은 1905년 을사조약 늑결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사재(私財)로 총기를 구입하고 의병을 소모(召募)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수년동안 일군과 항전하였다.그 뒤 1908년 2월 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유종환(劉鍾煥)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포대장(砲大將)이 되어 장수(長水)·무주·함양(咸陽)·안의(安義)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같은 해 3월 23일 무풍면(茂豊面) 지성리(池城里)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이병렬(1888 - 1910)은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일명 병렬(秉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일제의 국권유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자극되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날 때 이에 가담하였다.1908년초 덕유산을 근거로 무주·함양·안의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무주주재소·장수읍 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5월에는 남원에서 일본의 헌병과 교전하여 격파하였고, 8월에는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이종성(李鍾誠)과 연합전선을 펴며 영동·청산·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돌마을에서 이종성 등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이종성(1871 - 1910)은 1908년 의병장 문태서(文泰瑞) 의진에 입대하여 무주·함양(咸陽)·안의(安義)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영남·호남·호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2월 18일 60여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서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였다고 전한다.1909년 5월 8일 남원군 이문성(南原郡 里文城)의 동북쪽에서 백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 헌병과 교전하였으며 8월 중순에는 의병장 문태서와 함께 충북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지에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10월 30일에는 경부선 이원역(京釜線 伊院驛)을 습격·방화하고, 일본군인 3명을 납치하였다. 11월 무주를 근거로 하여 영동·옥천·청산·금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1910년 4월 18일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부락 흑석산(茂豊面 縣內里 文坪部落 黑石山) 계곡에서 소수의 의병과 함께 암중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습격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접전 중 전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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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렬 묘
이병렬(1888 - 1910)은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일명 병렬(秉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일제의 국권유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자극되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날 때 이에 가담하였다.1908년초 덕유산을 근거로 무주·함양·안의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무주주재소·장수읍 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5월에는 남원에서 일본의 헌병과 교전하여 격파하였고, 8월에는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이종성(李鍾誠)과 연합전선을 펴며 영동·청산·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돌마을에서 이종성 등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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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렬 표충비
이병렬(1888 - 1910)은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대한제국기 영동, 청산, 옥천 등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일명 병렬(秉烈). 전라북도 무주 출신. 1905년 을사조약 강제체결 이후 일제의 국권유린과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및 군대해산에 자극되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날 때 이에 가담하였다.1908년초 덕유산을 근거로 무주·함양·안의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무주주재소·장수읍 등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5월에는 남원에서 일본의 헌병과 교전하여 격파하였고, 8월에는 의병장 문태수(文泰洙)·이종성(李鍾誠)과 연합전선을 펴며 영동·청산·옥천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거문돌마을에서 이종성 등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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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경 동상
강무경(1878 - 1910)은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 체결 후 심남일 의진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 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 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 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