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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충삼의사추모비
일충삼의사추모비는 양한규, 박재홍, 양문순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양한규(1844 - 1907)는 개항기 임오군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양월서(梁月瑞).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초계(初桂, 草溪). 전라북도 남원 출신. 증호조판서 양맹석(梁孟錫)의 아들로,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1년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이듬해 통훈대부초계군사 겸내금위장(通訓大夫草溪郡事兼內禁衛將)에 제수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으나 사양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널리 우국지사와 연락하여 군사를 모으니 영남·호남에서 1,000여 명이 호응하였다. 1907년 2월 12일(음력 12월 30일) 남원 진위대 성내 장병이 연말연시를 맞아 휴가나간 틈을 이용하여 읍을 점령, 무기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그의 휘하 100여 명의 정예병을 비롯,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 많은 의병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뒤 13일 새벽 읍내로 진군, 남원성에 입성하였다.광한루에 본진을 두고 있던 일본군과 진위대가 의병들의 급습에 놀라 무기를 둔 채 성밖으로 도주하자, 무기·군수품을 그대로 접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죽었다.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박재홍(1845 - 1910)은 전북 남원(南原) 출신이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박재홍은 진사(進士) 출신의 호남 유림인사로서 인근의 우국지사들과 더불어 시국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이때 양한규(梁漢圭)가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영남·호남의 인사 일천여 명을 규합하여, 1906년 2월 12일(음 12월 30일) 일제히 남원읍에 진격할 것을 결의하였다.이것은 남원 주둔 진위대(鎭衛隊)의 장병이 연말 연시를 기하여 휴가로 나가고 성내의 병력이 적은 틈을 타서 읍을 점령하고 무기를 전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박재홍은 이 작전을 위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과 함께 양한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받기를 청하였다. 13일(음력 1906년 1월 1일) 닭이 울 무렵 남원 의진은 양한규의 지휘하에 읍내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불의의 습격에 놀란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그중 경부 1명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 겨우 달아났다. 이로써 큰 희생 없이 남원 성중을 장악할 수 있었다. 4대문은 의병들에 의해서 파수되었으며, 진위대 소속 무기와 군수품은 모두 의병들에 의하여 접수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병 대장 양한규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가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양문순(1862 - 1927)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이즈음 양문순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양한규(梁漢奎)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7년 박재홍(朴在洪) 등과 함께 군사들을 규합하여 양한규를 의병장으로 추대한 후 거의하였다. 이들은 이어 같은 해 2월 전북지역의 요충지인 남원읍을 기습,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던 양한규가 불의의 총격을 받고 전사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적의 반격이 시작되자 의진은 그만 와해되었다. 이에 따라 연합작전을 위해 남원읍으로 향하던 고광순(高光洵)의진은 남원읍 재탈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양문순은 의진이 와해되자 재기를 기약하며 은신하였으나 결국 붙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진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같은 해 11월 광무황제의 사면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병고에 시달리다가 1927년 서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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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현 숭모비
한태현(1878 - 19510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8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이후 고향인 남원 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동단의 조직 확대를 위해 그는 남원군내에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의 일을 맡으면서 주로 청년 단원의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와 같은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그는 동지 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과 함께 동지를 포섭하였고, 또 자금모금 활동도 전개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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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상 항일공적비
박준상(1914 - 1943)은 박준상은 전북 남원 운봉에서 1925년 4월부터 1929년 2월에 걸쳐 이명수(李明壽) 등 사회주의자의 지도를 받아 신사상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의 기구』 등 사회과학 서적을 강독, 연구하였다.1931년 11월 25일 안희탁(安禧鐸)·임철호(林喆鎬)·박종암(朴鍾岩)·박순영(朴舜永) 등과 함께 한국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를 재조직하였다. 남원청년동맹은 1927년 8월 12일 결성되었고 운봉지부는 이듬해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운봉지부는 남원 형평사(衡平社)와 운봉 권농회(勸農會)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서 1929년 3월 13일에 열린 예정이었던 정기대회가 관할 주재소로부터 금지 명령이 내려지는 등 제대로 활동을 못하게 되자, 이때 재조직하려고 했던 것이다. 재조직된 운봉지부에서 박준상은 박순영과 함께 농민부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소작료 불납운동과 강제 부역동원을 반대하였다.운봉지부는 표면적으로 ‘운봉단발회(雲峰斷髮會)’를 결성, 일반인에게 단발의 필요함을 선전하는 한편, 이발업까지 경영하여 이발요금을 운동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 자금으로 각종 사회과학 서적들을 구입하고, 이를 통해 신사상을 고취하였으며 운동자 양성에 주력하였다.이 사건(속칭 ‘운봉단발회 비사사건’)으로 1932년 9월 남원경찰서에 체포된 박준상은 1933년 4월 1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70일 통산)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러나 1934년 2월 1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1934년 칙령 제19호에 따라 징역 1년 9월 17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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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극용 숭모비
방극용(미상 - 1919)은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형갑수(邢甲洙)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일으켰다. 그는 이날 정오경, 광한루(廣寒樓) 광장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헌병분견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던 일군경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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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음원 표지석
독립 유공 애국지사 추모비 표지판의 내용으로서는 여기 이곳은 남원지역 출식으로 항일운동 헌신하다 순열한 독립 운동가 10인의 추모비가 세워진 곳이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다 1907년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원읍에서 왜군들을 기습공격하다 순열한 양한규 선생과 그 휘하에서 활동했던 진사 박재홍,참봉 양문순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의적비, 남원,구례,곡성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전규문 선생, 독립운동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대한 국민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한 박기영, 박권영선생 1919년 4월4일(장날) 남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적군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고 순열한 정한일, 황찬서 선생, 1929년 야학을 세워 문명퇴치 활동을 펴면서 민족의식고취에 앞장 선 이두석 선생의 추모비이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을 규탄하여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순열의사 정암 이태현선생의 추모비등이 세워져 독립 유공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고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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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우 항일운동의적비
이태우(1867 - 1923)는 전북 임실(任實) 사람이다.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屯南面) 오수리(獒樹里) 장날에 이기송(李起松)·오병용(吳秉鎔)·김영필(金永弼)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오수장터에 모인 8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주동자 이기송·김영필 등이 일경에 구속되자 2,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기송 등을 탈출시켰으나 자신은 일경에 붙잡혔다.같은 해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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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극용 기적비
방극용(미상 - 1919)은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형갑수(邢甲洙)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일으켰다. 그는 이날 정오경, 광한루(廣寒樓) 광장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헌병분견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던 일군경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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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요천 표지석
이곳은 집강소 시기 남원대회 및 군사훈련지이다. 전주성 점령 후 김개남은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돌아와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농민군에 대한 훈련을 지속하였다. 이때 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7월 15일 전봉준과 함께 이곳에서 ‘남원대회’를 개최하였다.남원대회 이후 김개남은 7월 17일경 100여 명의 정예농민군만 거느리고 임실 상이암(上耳庵)으로 들어갔으며 8월 25일 남원으로 돌아올 때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의 농민군과 함께 왔으며 이때 숫자가 무려 7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개남은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고 요천변에서 훈련을 하며 재기포를 준비하고 10월 14일에 5천여 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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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 묘
이태현(1907 - 1942)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호남 유학(儒學)의 거두 간재(艮齋) 전 우(田愚) 계열인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문하생으로 한학과 유학에 정통하고 우국충절의 기개가 높은 유학자로서 1932년 흠재의 문인들과 함께 경앙계(景仰 )를 조직하였다. 그를 비롯한 경앙계의 계원들은 일제가 강요하던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정오묵도(正午默禱) 거부, 삭발 거부, 일장기게양 거부운동을 주도하며 동포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2년까지 이와 같은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도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1942년 5월 23일 남원에 소재한 주생(周生) 순사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죄악을 폭로·규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그 자리에서 자결·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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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 표지석
유치는 유치재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남원과 운봉의 사이에 있는 고남산의 봉우리다. 집강소 통치기 동안 남원에 머물렀던 김개남 부대가 청주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남원에 남아있던 동학농민군은 운봉의 민보군을 격파하기 위해 나섰다. 남원의 농민군 지도자 김홍기, 유복남, 남응삼, 유태홍 등은 11월 13일 전라좌도에서 모인 농민군들을 방아치와 여원치의 갈림 길목인 쪽뚤에 진을 쳤다. 어느 쪽으로 공격해 갈 지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원치로 향하는 깃대바위에 부대기를 꽂아놓고 승리를 다짐하였다. 전투는 11월 14일 새벽 4시경 시작되었다.농민군들의 공격 낌새를 눈치 챈 운봉 수성군은 14일 새벽 2시에 2천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였다. 박봉양은 민보군의 절반을 이끌고 산 밑으로 내려가 선제공격하여 접전할 기세를 보이다가 후퇴하여 산상, 곧 방아치 쪽으로 적을 유인하여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역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 운봉 수성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한 후였다.담양의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을 중심으로 남원 부동촌(釜洞村)에 둔취하고 있던 농민군은 군악을 울리며 수천 명의 병력을 산상으로 진격시켰다. 이때 농민군들을 소 떼들을 앞세우고 공격해 갔다고 한다. 11월 14일 새벽 4시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이어졌다.방아치를 중심으로 여원치, 관음치 등 운봉과 산동 및 남원의 경계 일대 전체가 전장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끝난 결과 관군도 30여 명이 전사하였지만, 농민군 측이 입은 피해는 더 컸다.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접주급 인물 5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박봉양경력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은 2천여 명에 달한다 하였다. 이 방아치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동학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운봉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박봉양은 11월 28일에 재차 남원으로 출동하였다. 방아치 전투에서 기세가 꺾인 농민군들은 완강하게 방어하였으나, 서문과 남문이 불타 버리자 밀려드는 민보군을 막을 길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농민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백여 명을 생포했으며, 민보군도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84명이라 하였다.격렬했던 남원전투는 고남산을 중심에 두고 남원쪽에서 여원재에서 방아치로 방안치에서 유치로 이어졌다. 유치재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남원시 운봉읍의 매요리다. 매요리는 백두대간 등산로의 한 중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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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장군비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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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방아치
이 고개는 북쪽의 남원평원과 남쪽의 운봉고원을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의 방아치이다. 1894(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전라좌도를 관장하던 김개남 장군이 농민군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북상한 뒤 남원의 김홍기, 장수의 황내문, 담양의 남응삼, 임실의 최승우, 진안의 이사명 등의 농민군이 영남지방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통하여 운봉현을 공격하였다.운봉현은 박봉양이 민보군을 이끌고 수성군과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면서 영남지방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방어했는데 1894년 11월 14일~15일의 방아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남원성으로 패퇴하였다. 이때 민보군은 방아산 산성의 성돌을 중요한 무기로 이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