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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기 묘
이성기(1890 - 미상)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방극용(房極鏞)·형갑수(邢甲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체포된 덕과면(德果面) 면장이자, 그의 6촌형인 이석기(李奭器)가 남원읍으로 호송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군민의 분노가 더욱 컸다. 4월 4일 정오경, 그는 광한루(廣寒樓)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있던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는 이후 일제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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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기 묘
이용기(1897 - 1933)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조동선(趙東先)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 행사는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덕과면 면장인 이석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갖고 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전례없이 많은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조동선·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만세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쩔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는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조동선의 자진 체포로 시위군중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지만,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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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 충의기적비
황석(1848 - 1919)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전북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乙未事變)]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황석은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전북도내 유림들에게 통문(通文)을 돌려 거의(擧義)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 계획이 실패하자, 장성(長城)에서 기우만(奇宇萬)이 거의할 때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점차 가속화되고, 러일전쟁 직후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에 황석은 의(義)로써 적신(賊臣)들을 단죄하고자 고광순(高光洵)·이석용(李錫庸) 등과 수 차례 거의를 도모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소식에 자결하여 순국(殉國)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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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당고개 대한독립만세탑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식수기념일 행사 후 덕과면 일대에서 8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범수(李範壽, 1893~1945),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이준기(李俊器), 김선양(金善養), 이재화(李裁和)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사매면발전협의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9년 11월 17일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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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유적 교룡산 표지석
교룡산은 수운 최제우가 저술과 포교활동을 하던 곳이자, 전라좌도 동학농민군 김개남 군의 주둔지 및 방아치 전투의 근거지이다. 전주화약 후 6월 25일 남원성으로 들어간 김개남은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맞선 운봉 박봉양의 민보군 규모가 커지자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의 동학농민군 1천여 명은 8월 21일 교룡산성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았다. 당시 임실 상이암에 있던 김개남은 8월 25일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 전라좌도를 비롯한 여러 고을의 농민군 7만여 명과 함께 남원으로 들어왔다. 이들의 규모에 놀란 남원부 내 사족들과 백성들은 모두 도망가고 남원 읍내는 농민군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이때 김개남은 농민군들을 남원성과 교룡산성 두 곳에 주둔시키고 재기포를 준비하였다. 교룡산성 입구에는 2006년 11월 26일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현 위치에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소공원을 건립하였다. 비 기단부 전면에는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실을, 우측 측면에는 동학의 〈검가〉를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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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은적암 터
은적암은 동학 창시자의 최제우가 은거한 곳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던 백용성의 첫 출가성지이다. 최제우는 은적암에서 숨어 지내면서 동학을 수도하고 포교와 저술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나중에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이 되는 호남포의 포덕 씨앗이 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세상 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천명을 돌보지 않아서임을 깨닫고 천명을 밝히기 위한 구도와 수련에 전력을 다했다. 1860년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이치를 체득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한 이후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조정은 두려움을 느끼고 제자 20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했다. 서울로 압송 중 철종이 사망하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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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군의 주둔지였던 교룡산성과 그 입구에 세운 표지목이다. 1894년 5월 8일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하였고, 이때부터 농민군은 각지로 돌아가 도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활동을 추진하였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같은 해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들어왔고, 이때부터 김개남은 좌도지역을 맡아 폐정개혁 활동을 추진하였다. 교룡산성은 김개남이 집강소 시기에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주둔한 곳으로 알려져있다.<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표지목은 교룡산성 입구에 있는데, 이는 1993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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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방아치전투지 표지석
동학농민군이 민보군과 맞서 싸운 전투지이다. 방아치전투는 1894년 9월 17일 남원의 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과의 사이에서 방아치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박봉양의 민보군이 규모가 커지자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남원성과 교룡산성의 무기들을 빼앗아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의 부동(釜洞, 부절리) 지역으로 옮겨 민보군에 대비하였다.박봉양은 100여 명의 포창군(砲鎗軍)과 이의경의 수성군 및 함양의 원병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10여 리 밖으로 몰아냈는데 농민군측의 사상자는 17명, 부상자는 다수였다. 이에 반해 수성군 사망자는 1명, 부상자는 20명으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박봉양은 운성(雲城)을 방어하기 위해 순무영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9월 17일의 전투와 11월 14일의 전투 모두를 방아치전투, 혹은 관음재 전투로 혼재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9월의 전투는 방아치, 11월의 전투는 관음치 전투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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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현 추모비
이태현(1907 - 1942)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호남 유학(儒學)의 거두 간재(艮齋) 전 우(田愚) 계열인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문하생으로 한학과 유학에 정통하고 우국충절의 기개가 높은 유학자로서 1932년 흠재의 문인들과 함께 경앙계(景仰 )를 조직하였다. 그를 비롯한 경앙계의 계원들은 일제가 강요하던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정오묵도(正午默禱) 거부, 삭발 거부, 일장기게양 거부운동을 주도하며 동포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2년까지 이와 같은 항일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도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1942년 5월 23일 남원에 소재한 주생(周生) 순사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죄악을 폭로·규탄하였다. 이에 일경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그 자리에서 자결·순국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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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 의적비
박재홍(1845 - 1910)은 전북 남원(南原)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박재홍은 진사(進士) 출신의 호남 유림인사로서 인근의 우국지사들과 더불어 시국을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이때 양한규(梁漢圭)가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영남·호남의 인사 일천여 명을 규합하여, 1906년 2월 12일(음 12월 30일) 일제히 남원읍에 진격할 것을 결의하였다.이것은 남원 주둔 진위대(鎭衛隊)의 장병이 연말 연시를 기하여 휴가로 나가고 성내의 병력이 적은 틈을 타서 읍을 점령하고 무기를 전수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박재홍은 이 작전을 위하여 참봉 유병두(柳秉斗)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과 함께 양한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지휘를 받기를 청하였다. 13일(음력 1906년 1월 1일) 닭이 울 무렵 남원 의진은 양한규의 지휘하에 읍내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불의의 습격에 놀란 진위대 군사와 순검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중 경부 1명은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채 겨우 달아났다. 이로써 큰 희생 없이 남원 성중을 장악할 수 있었다. 4대문은 의병들에 의해서 파수되었으며, 진위대 소속 무기와 군수품은 모두 의병들에 의하여 접수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병 대장 양한규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다가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장병들을 향하여 "나는 지금 죽겠소. 국사가 망극(罔極)하오. 제공들은 힘써 싸우기 바라오." 하고 전사하였다. 양한규는 남원 의진의 중심적 존재였다. 의병들은 전혀 훈련받은 바 없는 일반 백성들이었으므로 순간 당황하였다.이러한 정황을 안 관군이 다시 대열을 정돈하여 반격태세를 취하니 당황하고 낙심한 의진 소속 장병들은 모두 흩어졌다. 모처럼 이루어진 의진의 남원성 함락이 백지로 돌아갔다. 이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인근의 의진들도 남원 일대로 집결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하고 본래의 근거지로 돌아가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홍은 처음에 남원성을 탈출할 수 있었으나, 월여(月餘)간 은신생활을 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자진하여 경찰에 출두하였다. 그리고 남원 의진의 양문순과 박봉양(朴鳳陽)도 남원진격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도 박재홍은 주먹을 부르쥐고 큰소리로 "반드시 왜를 멸망시키고 역적들을 토벌하고야 말겠다" 고 부르짖는 말과 기색이 준엄하여 적들이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다만 장기간 가두어 두었다가 진도(珍島)로 유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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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규 의적비
양한규(1844 - 1907)는 개항기 임오군란 당시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양월서(梁月瑞).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초계(初桂, 草溪). 전라북도 남원 출신. 증호조판서 양맹석(梁孟錫)의 아들로,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1년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이듬해 통훈대부초계군사 겸내금위장(通訓大夫草溪郡事兼內禁衛將)에 제수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으나 사양하였다.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널리 우국지사와 연락하여 군사를 모으니 영남·호남에서 1,000여 명이 호응하였다. 1907년 2월 12일(음력 12월 30일) 남원 진위대 성내 장병이 연말연시를 맞아 휴가나간 틈을 이용하여 읍을 점령, 무기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휘하 100여 명의 정예병을 비롯,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 많은 의병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뒤 13일 새벽 읍내로 진군,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광한루에 본진을 두고 있던 일본군과 진위대가 의병들의 급습에 놀라 무기를 둔 채 성밖으로 도주하자, 무기·군수품을 그대로 접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죽었다.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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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 애국지사 추모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임시정부, 노동운동, 국내항일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분들은 다음과 같다. 박권영(朴權永, 1898~1967), 박기영(朴琪永, 1893~1938), 박재홍(朴在洪, 1845~1910), 양문순(梁文淳, 1862~1927),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이두석(李斗碩, 1921~1947), 이태현(李太鉉, 1907~1942), 전규문(田圭文, 1881~미상), 정한익(丁漢翼, 1890~1977), 황찬서(黃贊西, 1873~1919) 남원 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0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