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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렬 추모비
곽경렬(1901 - 1968)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라북도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곽봉수(郭奉守)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박곡(朴谷) · 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잠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몰래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6인의 동지를 모아 전라북도 김제군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김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금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활동한 박재문이 1919년에 체포된 이래 남정관, 박봉춘 등이 차례대로 붙잡히게 되자 몸을 숨기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6년 2월 11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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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집
함태영(1872 - 1964)은 일제강점기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 1873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아버지는 함우택(咸遇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광복 후 심계원장(審計院長),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4년(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격동하는 내외정세 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깨치는 한편, 밀려오는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따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듬해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보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覆審法院)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버지가 일찍부터 기독교신자로 장로의 직분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교회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나갔다.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가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3·1운동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독립선언서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았다.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고,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었던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을 지냈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발췌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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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영 출생지 기념비
함태영(1872 - 1964)은 일제강점기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송암(松岩). 1873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 출생. 아버지는 함우택(咸遇澤)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광복 후 심계원장(審計院長),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84년(고종 21) 방랑벽이 심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격동하는 내외정세 하에서 사숙(私塾)을 전전하면서 학문을 깨치는 한편, 밀려오는 신문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895년 재판소구성법 공포에 따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이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이듬해법관양성소 동기였던 이준(李儁)의 뒤를 이어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시보로 임명되면서 법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재직 중 강직한 성품과 불의를 응징하는 성격을 보였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 주최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고, 시국에 대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그 실행을 주청하였는데, 사태전개에 불안을 느낀 고종이 독립협회에 혁파령을 내리고 이상재(李商在) 등 중심인물 17인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당시 한성재판소 검사로 이 사건을 담당한 함태영은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한 결과 내란죄를 적용할 수 없음을 알고 경미한 처벌을 받도록 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大審院) 판사, 복심법원(覆審法院) 판사를 역임하면서 강직함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집권층의 미움을 받아 면관(免官)·복직되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공직에서 벗어나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가 기독교에 입교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버지가 일찍부터 기독교신자로 장로의 직분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교회활동을 통하여 극복해 나갔다. 1919년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운동계획이 구체화되자 교회세력을 배경으로 3·1운동을 막후에서 이끌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계통의 독립운동은 두 곳에서 규합되었는데, 연동교회와 평양신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그가 감리교 세력을 흡수하여 3·1운동을 이끌었다. 이 밖에도 천도교계와의 연락,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통령에게의 독립선언서 발송, 독립선언서의 지방배포 등을 담당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자신은 다른 민족대표들이 잡힐 경우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최린(崔麟) 등의 부탁을 받아 33인의 민족대표로 서명하지 않았다. 3·1독립운동이 계획대로 전개된 뒤 주동인물로 잡혀, 이듬해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종교활동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의 고문을 지냈고, 1946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었던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을 지냈다. 1949년 제2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51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는 발췌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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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상 순절비
김영상(1836 - 1911)은 조선 후기 일본 왕의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여 수감 중 단식하여 순국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영상(金永相)은 183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김경흠과 나주오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6세에 고향인 정읍 칠보면 무성리 원촌으로 이사하여 18세에 인척인 김인흠, 23세에 김기에게 수학하고, 50세에 소휘면(蘇輝冕)의 제자가 되었으며, 기정진 · 송병선(宋秉璿) 등과도 교유하였다. 1911년 5월 9일 옥중에서 단식, 순국하였다. 김영상은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장리(掌理)로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빼앗기자 70세의 고령임에도 최익현 ·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06년 6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총참모장이 되어 지역 유생들을 참여하게 하였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1907년 태산사(台山祠)를 건립하고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때 김영상은 유림들의 요청으로 태산사 상량문을 지었고 한동안 태산사에 머물렀다.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10월 노인들에게 은사금(恩賜金)을 주려 하자 “대한신민(大韓臣民)이 어찌 원수의 돈을 받겠는가.”라며 이를 수차례 거절하면서 사령장에 적힌 자신의 성명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1911년 5월 일제가 일왕을 모독한 불경죄로 그를 체포하여 동곡헌병대에 구금하였다가 군산으로 압송할 때 만경강 사창진(沙瘡津)에서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나, 헌병이 그를 구출하여 실패하였다. 군산 감옥에 투옥된 그는 단식 끝에 7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45년 김환풍 · 안항섭 등이 발의하여 김영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필양사(泌陽祠)를 건립하였다(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51-1-19, 관리자: 필양사보존회). 1978년 지역 인사들이 김제 만경강 사창진에 「춘우정투수순절추모비(春雨亭投水殉節追慕碑)」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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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추모비
정병모(1872 - 1945)는 1919년 3월 26일 함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조사현(曺士鉉)·송대호(宋大浩)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곳의 유지인 조사현·송대호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마침 국장에 참배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에 그는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大洞面),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의 야만적인 무력행사로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결국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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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모 묘
정병모(1872 - 1945)는 1919년 3월 26일 함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조사현(曺士鉉)·송대호(宋大浩)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곳의 유지인 조사현·송대호 등과 접촉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마침 국장에 참배하고 귀향한 윤백언(尹伯彦)도 이에 가담하여 함평 장날인 3월 26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에 그는 김용언(金用彦)·윤태완(尹泰完)·이행록(李行錄) 등과 사전준비를 하면서 윤치영(尹致榮)·김재문(金在文)은 함평면, 김준령(金俊鈴)은 대동면(大洞面), 모현기(牟顯基)·정영조(鄭永祚)는 그 밖의 다른 면의 책임자로 뽑았다. 3월 26일 오후 4시경 보통학교 학생과 청년·주민들로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장날인 함평 장터에 모이자,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조사현 등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 ·헌병의 야만적인 무력행사로 1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결국 1920년 5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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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3.1만세운동발상지 기념탑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덕과면장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신경화(申京化, 1872~1940), 신봉순(申鳳淳, 1887~1959), 이석기(李奭器, 1880~1938), 이석화(李石和, 1868~1931),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승순(李承珣, 1868~1936), 이용기(李龍器, 1897~1933), 이풍기(李豊基, 1881~1932), 조동선(趙東先, 1871~1930) 등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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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항일운동기념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항일운동, 일본지역항일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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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3일 이석기·이성기·조동선 등의 주도로 덕과면에서 식수행사 후 면민 800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4월 4일 남원읍 장날에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방극용·형갑수 등을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1천여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과 헌병이 무차별 발포하여 방진형(房鎭馨, 미상~1919), 방양규(房亮圭, 1879~1919), 방명숙(房明淑, 미상~1919), 김홍록(金洪祿, 1895~1919)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황찬서(黃贊西, 1873~1919), 정한익(丁漢翼, 1890~1977) 등 10여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김해근(金海根, 1860~1946), 박정석(朴正錫, 1897~1933), 유창근(柳昌根, 1874~1938), 이성기(李成器, 1890~1978), 이형기(李炯器, 1884~1936) 등 20여명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와 남원지역 청년회의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4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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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유적지 남원성 북문
이곳은 남원성 4대문 중 북문(공진루)터 앞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은 전라좌도 농민군의 대도회소와 집강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방아치 패전후 세력이 급격하에 떨여져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승세를 탄 운봉,남원 연합의 민보군이 (음)11월 18일 남원성을 공격하였고 다시 패전한 농민군이 이 북문을 통하여 물러나면서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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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구 묘
이석기(1879 - 1931)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조동선(趙東先) 등과 함께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덕과면 면장으로 재직하면서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고, 6촌 동생 이성기·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의 비밀회의를 통하여 4월 3일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의 식수행사는 각 관청에서 연례적으로 행하던 연중행사였기 때문에 일제의 의심을 받지 않고 사전준비가 가능했다. 이에 그는 3월 31일 회의석상에서 각 가정에서 반드시 1명씩 당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으로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도화곡에는 유례없는 식수기념일 행사에 8백여명이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난 다음, 그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하고, 이들의 앞에 나아가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으로 변한 행사참여자를 지휘하여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그는 길가에 있던 오백룡(吳伯龍)의 지붕위에 올라가서 격문을 낭독하고 20여장의 격문을 살포하였다.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여 헌병주재소 앞 큰길에 당도하여서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남원읍에서 헌병분견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증원 출동하여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조동선과 함께 스스로 책임을 지기로 하고 시위군중들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서대문(西大門)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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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기, 이용기 형제기적비
이성기(1890 - 미상)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남원읍 장날을 이용하여 방극용(房極鏞)·형갑수(邢甲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은 전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체포된 덕과면(德果面) 면장이자, 그의 6촌형인 이석기(李奭器)가 남원읍으로 호송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군민의 분노가 더욱 컸다. 4월 4일 정오경, 그는 광한루(廣寒樓)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南門)과 시장을 거쳐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미리 장날에 대비하여 헌병과 수비대의 병력을 증원 받아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있던 일제는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는 이후 일제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마포(麻浦)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이용기(1897 - 1933)는 전라북도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이석기(李奭器)·조동선(趙東先)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덕과면(德果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 행사는 일제 치하에서 매년 행해지던 연례적인 것이었다. 당시 덕과면 면장인 이석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갖고 면직원 조동선 및 면내 유지들과 비밀회의를 통하여 이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석기는 그의 집에서 각 면장에게 보내는 만세운동의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란 격문을 작성하여 각각 20여매씩 등사한 후, 면사무소 사환인 김광삼(金光三)으로 하여금 각 면장들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4월 3일 신양리(新陽里) 뒷산의 도화곡(桃花谷)에는 그를 비롯하여 전례없이 많은 8백여명이 식수기념일 행사에 참여하였고, 헌병주재소 소장과 보조원들도 점심식사에 초청되었다. 오후의 식수가 끝나자, 이석기는 여기에 참가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한 후, 독립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그를 비롯하여 조동선·이풍기(李豊基)·이석화(李石和)·복봉순(卜鳳淳) 등이 호응하여 식수기념일 행사장은 삽시간에 독립만세시위장으로 변하였다. 너무나 돌발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 행사에 함께 참여했던 헌병주재소 소장도 어쩔바를 몰랐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남원·전주(全州)간의 도로를 따라 사매면 오신리(巳梅面梧新里)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그는 사율리(沙栗里)를 지날 무렵, 이석기의 격문낭독으로 더욱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앞 큰길가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남원읍에서 응원 출동한 헌병분대장 무장군인이 자동차로 도착하자, 사태가 긴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석기와 조동선의 자진 체포로 시위군중과 함께 무사히 귀가하였지만, 이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광주(光州)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