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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 집
이종희(1890 - 1946)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를 거쳐 광동(廣東)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를 졸업하고 상해(上海) 남경(南京)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중국군 부대 상위연장(上尉連長)으로 복무하면서 남경(南京)에서 의열단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하여 군사국 특무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제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김약산(金若山)·박효삼(朴孝三)·이익성(李益星)·김세일(金世日) 등과 함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조선혁명청년들에게 정확한 전투적 정치 노선을 제시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의 소교(少校)로 임명되어 총무조장으로 복무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 본부는 중경(重慶)에 있었으며, 주로 대원들의 군량 수급 사무,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훈련과 연합군측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요청할 경우의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지대장 특명으로 수시 적 점령지구로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 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는 초대 지대장인 김약산(金若山)의 뒤를 이어 제2대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전라도 의원선거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 시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광복군 고급참모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귀국 도중 선중(船中)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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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만세운동의 물결이 퍼져나가던 무렵, 김제에서도 만세운동의 목소리가 싹트기 시작했다.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김제에 전달되어 배세동, 전도명, 전도근 등이 3월 20일 원평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그날 오후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큰 태극기를 장대에 달아 들고 원평장터에 나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이날 모인 수백만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1893년 3월 일제에 항거 분노의 함성을 터뜨린 1만여 동학농민들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1919년 3월 20일 원평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뜻을 모아 후세에게 길이 전하고자 원평거사 70주년을 맞이하며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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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이후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거의 1년간 지속된 거국적인 항일 민족 독립운동이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무렵, 만경지역에서는 4월 4일 만경 장날에 만경 보통공립보통학교 훈도와 행도 일백여명이 함께 대열을 지어 만경장터에 진출하였으며, 장터에 모인 수백여 명이 함께 동조하여 시위행진을 전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 이후 임창무 등 주동인물들이 검속되는 등 질기고도 악랄한 탄압이 끊임없이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경지역에서는 만경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역사의 배움을 요구하며 1927년 11월에는 동맹휴학을 집단적으로 단행하는 등 구국 활동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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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친필 육영기념비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한 분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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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조 묘
정한조(1890 - 1945)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26년 1월 25일 전북 이리(裡里) 청년회관 건축위원회 모임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7월 11일에 개최된 이리청년회(裡里靑年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사회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리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할 때에 조선일보 이리지국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거족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그도 붙잡혀,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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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조 사적비
정한조(1890 - 1945)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26년 1월 25일 전북 이리(裡里) 청년회관 건축위원회 모임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7월 11일에 개최된 이리청년회(裡里靑年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사회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리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 명이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할 때에 조선일보 이리지국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거족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그도 붙잡혀,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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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천 사적비
서정천(1917 - 1966)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서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하여 전방에서 광복군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8월 제 5전구 소속 전시간부훈련단(戰時幹部訓練團)에 특설한 정공간부훈련반(政工幹部訓練班) 제 2기생으로 입교하여 3개월 간의 정훈교육을 받았다. 1945년 3월 호북성(湖北省) 담현(潭縣)에서 초모공작 및 적 정보 수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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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사적비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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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집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었던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경세치용(經世致用), 그리고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되는 실학(實學)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에 관심을 기울여 전제(田制)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의 정세는 국내적으로 민씨(閔氏)의 족벌정치(族閥政治)로, 국제적으로는 청(靑)나라와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운을 보존치 못할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서 정치를 개혁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민생의 도탄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1894년 전라도에서 구국을 위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민씨정권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헌(國憲)을 제정하여 나라를 구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05년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나자, 양국은 미국(美國)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드(Portsmouth)에서 강화회의(講和會議)를 열게 되었는데, 그는 이 회의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모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의 동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두 동지와 함께 같은 해 6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선린의 우호로써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이어서 일왕(日王)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통렬히 규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구국의 열정에 불타는 청년들을 교육시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 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울에서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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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연춘 묘
함연춘(1901 - 1974)은 전북 전주군(全州郡) 전주면 남문(南門) 밖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13일, 함연춘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재학 중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후 1시경 전주면 남문 밖 시장 부근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남문을 지나 대정정(大正町) 우편국 부근까지 행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함연춘은 1919년 9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약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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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집
정화암(1896 - 1981)은 일제강점기 흑색공포단, 항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결성 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정철연(鄭轍淵)이고 아버지는 정환전(鄭桓全)이다. 외조부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흔계(姜昕季)이고, 처부는 김제조씨(金堤趙氏) 조응식(趙膺植)과 수원백씨(水原白氏) 백원보(白元普)이다.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8월 극동을 시찰하는 미국의원단의 한반도 방문 때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건의하려다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조국광복운동은 혁명적 무력투쟁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협의하였다. 중국국민혁명의 원로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11월에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직접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을 만나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해로 오면서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배 및 전향자 등을 색출, 사살해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3년 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규합,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 상해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잡혔다. 1936년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탈취한 5만 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편성하는 한편, 중국 항일운동세력과 연합해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를 조직했으며,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였다. 1940년부터 푸젠성[福建省] 내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광복 때까지 광복군 활동의 현지 책임자를 지냈다. 특히, 이 때 일본군의 수송로를 폭파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생포된 연합군의 포로를 구출하는 공작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일본 군내의 한국인 학도병 탈출 공작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광복 후 귀국해,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나의 회고록』이 있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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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렬 구 묘
곽경렬(1901 - 1968)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라북도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곽봉수(郭奉守)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박곡(朴谷) · 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잠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몰래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6인의 동지를 모아 전라북도 김제군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김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금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활동한 박재문이 1919년에 체포된 이래 남정관, 박봉춘 등이 차례대로 붙잡히게 되자 몸을 숨기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6년 2월 11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