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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로 집
이태로(1899 - 1932)는 군산(옛 옥구)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태로는 1925년 10월 전북 청년 연맹(全北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에서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계급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활동 범위를 넓혀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 11월에는 옥구 청년 동맹 창립 준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 노동 연맹 집행 위원회에서 서무 및 재정부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 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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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로 묘
이태로(1899 - 1932)는 군산(옛 옥구)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태로는 1925년 10월 전북 청년 연맹(全北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에서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계급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활동 범위를 넓혀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 11월에는 옥구 청년 동맹 창립 준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 노동 연맹 집행 위원회에서 서무 및 재정부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 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 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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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3.1운동기념비(구암교회)
군산3.1운동기념비는 군산의 자긍심을 세우고, 선열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및 후세까지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군산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군산 3.5만세운동의 발원지인 구암동산에 건립한 비이다. 군산은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처음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가 주도하였는데, 여기에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등의 영명학교 교사들과 양기준, 유한종 등의 예수병원 직원들이 합세하여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에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경찰 10여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이 잡혀가자 계획한 다음날을 기다리지 않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병원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과 주민들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출발하여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며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느새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길에 휩싸이게 된다. 그 후 점차 수가 늘어나자 일본 경찰은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은 약 90여명으로 모두 군산경찰서에 투옥되었고,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는 헌병대와 일본경찰들이 수색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압수하고 학교의 기물을 파손하였다. 심지어 두 학교의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연행되어 며칠씩 심문을 받는 고충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산에서 3월 5일에 일어난 3·5만세운동은 호남지방 최초로 일어난 봉기로 이후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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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3.1운동기념비(구암동산)
군산은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위는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처음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가 주도하였는데, 여기에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등의 영명학교 교사들과 양기준, 유한종 등의 예수병원 직원들이 합세하여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에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3월 5일,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경찰 10여 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이 잡혀가자 계획한 다음날을 기다리지 않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예수병원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과 주민들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여 출발하여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며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어느새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길에 휩싸이게 된다. 그 후 점차 수가 늘어나자 일본 경찰은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은 약 90여명으로 모두 군산경찰서에 투옥되었고,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는 헌병대와 일본경찰들이 수색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문서를 압수하고 학교의 기물을 파손하였다. 심지어 두 학교의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련이 있든 없든 모두 연행되어 며칠씩 심문을 받는 고충을 당하기도 하였다. 군산에서 3월 5일에 일어난 3·5만세운동은 호남지방 최초로 일어난 봉기로 이후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군산의 자긍심을 세우고, 선열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및 후세까지 역사현장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군산 3.1운동기념사업회에서 군산 3.5만세운동의 발원지인 구암동산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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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과 28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구암동산에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을 건립하여 그 정신을 기리고자 하였다. 군산의 역사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염원을 실현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및 호국보훈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선조들의 고귀한 나라사랑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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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남 최초 3.1운동 발상지
군산3.1만세운동은 김병수(군산영명학교 졸업/당시 세브란스 의전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200여매를 전달받아 군산 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에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3,500매) 복사와 태극기(수백 장)를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착수하여 3월 6일(음력 2월 5일) 설에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영명학교 전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 등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여 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든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은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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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옥삼일운동기념비
군옥 삼일운동 기념비는 1919년 4월 군산과 그 외곽 옥구지역 주민들이 일제의 조국침략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국권회복과 광복을 위하여 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 옆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의 만세상도 건립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군산에서는 3월부터 5월까지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이 21회이며, 동원 참가 인원이 총 25,800명이고, 피검자 145명, 사망자 21명, 부상자 37명이었다. 옥구 군내의 3.1운동 만세시위 역시 3월부터 5월까지 7회의 만세시위와 5,700명이 시위운동에 참가하고 50명의 피검에 32명 사망, 35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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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옥출신독립운동공적기념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군산 옥구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전투,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군산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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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순 공적비
심재순(1899 - 1939)은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 졸업 후 사립 구암영명학교(龜岩永明學校)에서 2년간 수업하고 서울에 와 대동인쇄주식회사에 다니면서 부기학교에 통학하였다. 1925년 5월 부기학 연구 목적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츠카하라[塚原某] 경영의 춘양당(春陽堂)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경부터 일본인 가나자와[金鐸]가 경영하는 인쇄소 동성사(同聲社)에 취업하여 문선공(文撰工)으로 일하였다. 그는 이 인쇄소에서 주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던 중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독립 실현의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써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경 전북 옥구(沃溝)의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동년 12월 일본 도쿄에서「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으로,‘자본주의제도 아래 현대사회의 유산자 생활의 호사로움과 노동자 생활의 궁핍을 비교하고 그것이 착취와 압박을 능사로 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 소산물로 단정’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였다. 군산(群山)·강경(江景)·논산(論山) 등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가와사키[川崎]·오오쿠라[大倉]·척식회사(拓植會社)·불이회사(不二會社)·이엽사(二葉社) 등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은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한 이 글은 국내의 신현국(申鉉局)·심상악(沈相岳)·심상호(沈相鎬)·황봉규(黃琫珪)·심호택(沈鎬澤)에게 발송되었고, 특히 신현국은 이엽사농장의 소작쟁의에 관련된 농민들에게 이를 배부하였다. 1928년 1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병우(金柄祐)에게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9월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옥구로 귀향하여 활동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31년 8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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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식 공적불망비
이인식(1901 - 1963)은 일제강점기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군자금 모집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춘고(春皐). 전라북도 옥구 출생. 서울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정동 예배당 구내의 이필주(李弼柱)목사 집에서 중학생 대표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실행을 계획하였는데, 보성중학교 대표로 참석하여 최후의 목적을 달성할 때 백절불굴의 투지로 최선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으로 학생들을 참석하게 하고 선언서를 배포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며 미국영사관과의 연락 책임을 지고 활동하였다. 3월 5일 오전 9시 서울역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하자마자 전재산을 방매하여 동삼성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에게 8,000원의 군자금을 주고 군자금모집원이 되어 계속 투쟁하였다. 그 뒤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를 졸업하고 8·15광복 이후 고향에 임피중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고 전라북도교육위원에 선임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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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여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관리인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하지만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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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렬 구 묘
김홍렬(1898 - 1924)는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 연락 요원으로 1919년 2월 28일 서울 천도교 교구당에서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5,000장을 전해 받아 평안도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았다. 3월 5일 서울 시내에서 전개되었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뒤 고향인 전라북도 옥구군으로 귀향하였다. 1919년 3월 25일 자택에서 진장권(陳壯權), 김석종(金錫宗), 황봉규(黃琫奎), 최한례(崔翰澧) 등과 함께 3월 29일 임피시장에서 만세운동할 것을 계획하였다. 3월 28일 진장권의 집에서 태극기 200매를 제작하였다. 3월 29일에는 김석종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독립만세시위 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6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4년 청년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인 삼성구락부(三省具樂部)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