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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사당(덕산사)
백정기(1896~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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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희 묘
노병희(1849 ~ 1918)는 전북 고창(高敞) 출신으로서 일찍이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국운이 점차 기울어 가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군자금에 충당시킬 목적으로 현금을 준비해 두었다가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06년 4월 면암이 의진의 거점을 태인(泰仁) 일대로 확정하고 남하할 때 16일에 미리 종성리(宗聖里)에 당도하였다가 최학엽(崔學燁)·고석진(高石鎭)·고제만(高濟萬) 등과 더불어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면암은 일찍부터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으로 일본의 주목을 받아 왔으므로 곧 이들의 의병운동은 관군과 일병의 추격을 받아 끝내 면암과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 등은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고 말았다. 본래 면암은 노환의 지병을 갖고 있었으므로 곧 득병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연락을 받은 노병희는 12월에 한의(漢醫)의 자격으로 대마도로 가서 치료에 전력을 다하다 끝내 별세하자 호상(護喪)으로 참가하여 유해를 본국으로 반장(返葬)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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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룡 묘
노진룡(1894 ~ 1950)은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말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밀명을 띠고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은 국내 각지에 임시총판부(臨時總辦府)를 설치하였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중 임시정부의 총판부설치에 적극 찬동하여 전북감독부(全北監督府)를 조직하고 감독에 취임하였으며, 부감독에 오의균(吳毅均), 재무원에 이휴열(李烋烈) 황종관(黃鍾寬), 고문에 강대직(姜大直) 이석열(李錫烈) 나홍균(羅鴻均) 이종택(李鍾澤) 등을 임명하고 군자금 모집, 격문 살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22년 5월에 노진문(魯鎭文) 김성균(金聲均) 등과 함께 전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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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운동사적비
대한독립운동사적비는 경술국치 이후 3.1 운동부터 임시정부, 국내외 항일투쟁 등의 역사를 회고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해당 비석은 1960년 삼일절 고창군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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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남 추모비
고제남(1887~1909)은 고석진(高石鎭)의 문인으로 전북 고창 사람이다. 스승 고석진은 고제만(高濟萬 致範)과 함께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부름에 호응하여 정산(定山)에서 기의하여 태인(泰仁)일대에서 활약한 바 있다. 고제남은 그 영향을 받아 1907년 의병장이 되어 동지 김영백(金永伯) 이화일(李花一) 등 의병 2백 여명과 더불어 장성군 일대를 행군하면서 창의 포고문(倡義布告文)을 살포하고 정읍(井邑)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크게 이겼다. 1908년 흥덕(興德) 소려령(小蘆嶺) 등에서 왜군과 접전하고 일군 병참소(兵站所)를 공격하여 장총 3정 군도 5정 및 탄환 다수를 노획하였다. 1909년 동지들과 정읍군 소성면(所聲面)에서 작전 계획을 구상하던 중 일헌병에게 체포되어 북이면 헌병분견소(北二面 憲兵分遣所)에서 총살되었다고 전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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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만 사당(옥제사)
고치범(1849~1943)은 고제만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북 고창 사람이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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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만 의적비
고치범(1849~1943)은 고제만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북 고창 사람이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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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만 묘
고치범(1849~1943)은 고제만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북 고창 사람이다. 그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의 명을 받고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후 면암이 태인(泰仁)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정산(定山)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여 올 때, 4월 16일 고치범은 고석진(高石鎭), 노병희(魯炳喜) 등과 함께 종성리(宗聖里)까지 나아가 면암 일행을 맞이하였다. 당시 면암 일행은 김태원(金泰元), 임현주(林顯周), 김경하(金敬河), 오상철(吳相喆) 그리고 임병찬(林炳瓚)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이들 면암 의진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하고 의거를 결의하여 많은 유생들이 면암의 뒤를 따를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속하여 의진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갈 때 합세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 의해 면암과 그의 문하생 수십 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면암과 안병찬 등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고치범은 1914년에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의 직을 칙명하사(勅命下賜)받고 다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러한 활약상이 일경(日警)에게 노출되어 체포 수감되었다가 발병하여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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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주 기적비
이종주(1901 ~ 1921)는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1920년 3월 10일을 전후하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하여 3월 10일 밤에 이종철(李鍾喆)·이대성(李大成)·유판술(劉判述) 등의 동지들과 함께 그의 집에 모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구한국 구기를 만들어 이를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꽂아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날 밤 고창군 성내면(星內面) 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가져와 독립선언문 수천매를 등사하여 각처에 배부하고 태극기 12매를 만들어 대한독립이라고 써넣은 다음, 이를 파기하는 자는 참살하겠다"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성내면사무소 구내의 공터에 꽂아 놓고 시민들의 독립운동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3월 12일 성내면장의 고발에 의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1월 15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7월 13일 대구(大邱) 감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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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구 집
황영구(1918 ~ 1947)는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 한동정(韓東正) 등의 동교생들이 1933년 경에 조직한 사상연구단체인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35년 2월 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두 학생의 복교를 요구하며 교실에서 농성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반제동맹의 조직이 노출되어 그는 1935년 6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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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포교 활동지 도소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전북 고창에서 활동한 동학의 대접주(大接主)이자, 교도들을 이끌고 전봉준(全琫準),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3대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주역으로서 황토현·황룡촌 전투의 승리에도 기여했으나, 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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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해 충효비
정시해(1872 - 1906)의 자는 낙언, 호는 일광이며, 대한제국기 최익현 의병부대의 소모장 겸 중군장으로 활동한 의병이다. 1905년 말 시묘(侍墓)를 마치고 하산하자,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 최익현을 찾아갔다. 당시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다 지친 최익현은 정시해에게 영남지방의 지사를 규합하여 의병 봉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경상도 일대를 누비며 동지 규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나라를 잃은 미친 백성이란 뜻으로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 자칭하고, 일광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906년 봄, 태인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영남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의 반응을 보고하고 거의모사(擧義謀事)에 참여하였다. 영남과 호남의 의병이 함께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해 다시 영남으로 떠나 19일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최익현의 의거 소식을 듣고 모여든 지사와 포수(砲手)는 날로 늘어나, 지방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고 군량을 확보해 의병대의 병력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6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장 겸 중군장(召募將兼中軍將)으로 태인을 출발하였다. 6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龜巖寺)로 진을 옮기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6월 8일에는 곡성으로 진출하였다. 6월 10일 순창으로 회군해 포진 중, 6월 11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 · 남원의 진위대(鎭衛隊)와 충돌하다가 전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