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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전봉준 장군 유시)
이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판에는 전봉준 장군 유시(遺詩)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봉준 장군은 공주 우금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뒤 논산, 구미란, 그리고 태인전투를 마지막으로 동지 몇명과 함께 11월 29일 (갑오년) 입암산성 (정읍시 입암면)으로 들어가 밤을 지새고, 다음날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지난날 친구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 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로 이웃에 살고있는 한신현에게 밀고했고,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뜻하지 않은 위기에 놓이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몽둥이로 다리를 얻어 맞고 붙잡히고 만다. 전봉준에겐 이미 현상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1895년 (을미년) 3월 10일 등 5차례에 걸쳐 일본영사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에 "나는 바른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역율(逆律: 반역죄)을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했다. 결국 1895년 3월 29일 사형선고를 받고,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다음날인 3월 30일 새벽 2시 교형(刑)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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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묵 의적비
정창묵(1884 ~ 1961)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38년 4월부터 정읍(井邑)을 활동무대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담하여, 종교적 결합을 바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인동맹은 보천교도(普天敎徒)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로 일제패망을 기원하는 한편 국권회복에 앞장서기를 결의하고 대원 50여명으로 조(組)를 편성하여 경찰서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정창묵은 신인동맹 설립초기부터 활동하며 동지들 규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그런데 1940년 12월 경, 비밀결사 신인동맹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모든 계획들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주도자도 검거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43년 10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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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산리 비석군(애국지사 유혼추도비 외)
춘산리 비석군은 국도 23호선 영광으로 가는 방향에서 지석리로 갈라지는 도로 서쪽에 세워진 비석 10기를 말한다. 대산면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공적비를 한 곳에 모은 것이며 공덕비 2기, 불망비 3기, 선정비 1기, 추모비 2기, 기념비 1기 등으로 총 10기가 세워져 있다. 그 중 독립지사를 위한 비석은 의사 김공 영수 추모비와 건립성취록, 고 애국지사 유혼 추도비가 있으며 그 외에도 진주 정규묵 공덕비, 전 참봉 정규원 영세불망비, 전 참봉 이철환 영세불망비, 전 참봉 이상구 진휼비, 전 면장 여주 이공 병섭 추모비, 면장 황판규 기념비 등이 건립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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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추모비
김영수(1914-1944)는 1940년 2월 17일 전북 정읍(井邑)에서 구국결사단(救國決死團)을 조직하고, 40여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김제(金堤)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헌병대와 경찰서를 습격·멸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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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관 공적비
박영관(1899 ~ 1975)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28년 이리 동척(裡里東拓)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 일명 : 吳海龍)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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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관 집
박영관(1899 ~ 1975)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28년 이리 동척(裡里東拓)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 일명 : 吳海龍)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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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완 묘
김영완(1896 ~ 1919)은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 무장읍(茂長邑) 장날을 이용하여, 이용욱(李用郁)·김용표(金容杓)·김상수(金相洙)·이준구(李準求)·김진호(金辰鎬)·박흥선(朴興先)·오태근(吳泰根)·박흥수(朴興洙)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 참관 차 상경하여 서울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이용욱·김용표 등의 유지들과 만나 서울의 정황을 전하고, 3월 15일의 무장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5일, 계획대로 장터에 많은 시위군중이 모이자, 미리 제작·등사해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로 시위 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1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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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의사 추모비
유한의사 추모비는 일광 정시해, 강재 오장환, 입신 유경구, 참봉 김재화 네 분의 의사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정시해(1872~1906)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6년 4월 최익현이 기의하자 그의 친서를 영남의 지사들에게 전달, 영남에서 면암의 의거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병력 모집을 관장하는 소모장이 되어 6월 정읍으로 나아갔다.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돌아왔으나, 조정의 진위군을 맞아 관군과 싸울 수 없다며 면암이 전투를 포기하였다. 진위대의 공격 속에서 정시해는 순국하였다. 이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강재 오장환(1863~1909)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그는 기삼연(奇參衍), 전해산(全海山, 垂鏞), 이대국(李大國), 김태봉(金泰鳳) 등 동지와 같이 거의하였다. 이들은 장성 및 고창, 영광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활동하였다. 오장환은 기삼연 의진에서 1907년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 1909년 6월까지 적과 교전해 전과를 올렸다. 1909년 6월 10일 야밤을 틈타 귀가하여 가사를 정리하던 중, 광주에서 기습해 온 경찰에게 회유를 권유받았으나 격투 끝 체포되어 반항 중 현장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입신재(立身齋) 유경구(庾敬求)는 고창 공음면 출신으로, 부모의 6년 시묘살이와 의로운 거사로 충신이자 효자로 이름 높았다. 한일합병이 일어나자 영광 구수산에 들어가 칩거하던 중 1918년 12월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이를 통분하여 기미년(1919) 정월 7일 절립이사(絶粒而死)하였다.1963년 고창군의 주도로 이들 네 의사를 기리기 위한 비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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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군의 무장읍성 입성)
동학농민군의 무장읍성 입성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진격로 안내판은 고창 무장읍성에 세워져 있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군은 정읍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감영군을 일거에 무찌르고 남으로 내려와 정읍 흥덕을 거쳐 8일 석양에 고창으로 진주하여 먼저 옥문을 부수고 억울하게 갇혀 있는 동학교인 7명을 석방시켰다. 동헌과 아사를 부수고 들어가 인부를 접수하여하였으나 이미 현감이 도피한 후였고 군기와 장적을 압구하고 동부에 있는 은대정(제주도 대정 현감을 지낸 은수룡)의 집으로 몰려가 가산을 부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9일 신시(오후 4시전후)에 농민군 일만여명은 무장읍내로 들어가 옥중의 동학교인 44명을 석방하고 성내외 7거리 인가에 방화하니 화염이 충천하였다. 무장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은 3일동안 머물면서 황토현싸움 이래 휴식을 취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이미 전주에 도착한 홍계훈 초토사가 거느리는 경군의 추격에 대비하여 읍에서 5리쯤 떨어진 여시뫼봉에 진을 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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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호산봉과 1차 봉기 모의지)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호산봉(여시뫼봉)과 1차 봉기 모의지에 대한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산봉은 순 우리말로 여시뫼봉이다. 또는 왕재산이라고도 한다. 호산봉에서 보면 낮은 산 같지만 반대편은 지대가 낮아 산이 높아 보이고 또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탁트인 전망이 장성 영광 쪽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무장읍성을 접수하고 3일 동안 머물며 휴식을 취할 때 농민군의 일부가 호산봉에 진을 치고 휴식과 재정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호산봉 남쪽 아래 마을이 신촌인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서인수 등 13명이 김성철 접주집에 회동 손화중을 설득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때 김성철 접주는 그 준비 공작금으로 쌀 50석을 내놓았으며 그의 아들 김홍섭은 전봉준 장군 수행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출발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천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京軍)을 크게 물리치고 다음날 전주성을 향해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곳부터 남도에서 올라오는 큰 길과 합류하게 된다. 말무덤(큰무덤) 뒷편의 오솔길이 영광 함평 목포로 내려가는 길이다. 또한 오솔길을 가다보면 오른쪽 산 밑에 바가지 샘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이 좋다. 농민군들이 숙영할 때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철 접주의 집자리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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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사충혼탑
오열사 충혼탑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유공자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이준 열사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후대에게 위국충절의 정신을 이어받게 하기 위해 설립된 이 충혼탑은 고창북중학교를 설립한 이승연 선생이 1977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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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피체지
손화중(1861~1895)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보국안민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키고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근간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하던 중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수강산 산당 이씨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욱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부경, 처남 유용수가 또다시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손화중은 재실지기인 이봉우의 고발로 1904년 12월 11일 피체되어 195년 3월 30일 그의 나이 36세로 전봉중, 최경산,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