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일광기념관(정시해 기념관)
정시해(1872~1906)는 면암의 문인으로서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신이다. 1906년 4월 호남에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는 의보(義報)를 받고 면암의 친서(親書)를 영남지사들에게 전달하여 영남에서 면암의 의거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면암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병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6월 5일 임병찬, 김기술, 유종구, 김재귀, 강종회 등과 부서를 나누어 관장하고, 정읍(井邑)으로 출발하였다. 정읍에서 각종의 무기를 접수하고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한 후 6일 순창에서 무력을 증강하여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회군하여 오산촌(鰲山村)을 거쳐 10일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이때 왜병이 읍 동북쪽에서 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임병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 접전에서 중군장의 임무를 맡은 정시해는 적의 탄환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시해는 임종할 때 면암에게 '시해는 왜놈 하나도 죽인 일이 없이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라도 선생을 도와 적을 죽이겠습니다.' 하고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정인승 민족정신 선양비
정인승(1897 ~ 1986)은 전라북도 장수(長水) 사람이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후 독립의 길이 국어국문의 수호와 발전에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사전편찬회의 주무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어의 보급과 한국문의 출판을 일체 금지하여 한국어말살정책을 야수적으로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과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여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박도경 추모비
박도경(1874 ~ 1910)의 본관은 밀양이고 대대로 모양(牟陽, 지금의 고창)에서 살았다. 을사조약의 늑결 이후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의진을 일으켜 모양현의 무기고를 기습, 무장한 뒤 의병 투쟁에 나서 교전하으나 패했고, 이후에는 성재 의진 소속으로 전남 각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의병장인 성재 기삼연이 1908년 1월 순국한 뒤 의진을 지휘하는 포사장이 되었으며,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 순국하며 형세가 어려워지는 와중에도 광주와 장성, 대체로 남포(藍浦)·부안(扶安) 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월 20일에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上西面)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점차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가협(加峽) 산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자 "내가 여기에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하였다. 체포되어 구금된 중에도 적을 꾸짖는 말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받았으나 그는 끝내 의연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송 받았다. 1909년 12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기각, 그해 2월 22일 상고기각, 3월 18일(음력 2월 8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파리장서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37분의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무단 식민통치를 강하게 규탄하고 민족독립을 강조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비밀리에 작성하여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해 열린 파리만국평화회의의 대표단을 비롯해 국내외에 대거 배포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을 일컫는다. 현재 파리장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 전국 여러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고창의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는 고창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네 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있다. 이들은 파리장서 서명 이외에도 의병활동 및 계몽활동, 포고문 작성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독립운동을 해 나갔던 분들이다.
-
오의균 묘
오의균(1883 ~ 1957)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내 독립운동단체들 가운데 하나인 감독부(監督府)의 부감독(副監督) 직책을 맡아, 감독인 노진룡(魯鎭龍)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인원 파송 및 군자금 모금, 밀송 등의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펴 나갔다. 1927년 1월에는 농촌개발과 문명퇴치를 목적으로 최정익(崔正益)·여운홍(呂運弘) 등 10여 명의 발기에 의해 창립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의 전라북도 대표 겸 이사(理事)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전봉준 집(고창)
전봉준 장군 생가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이 1855년 12월 3일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자랐던 곳이다. 위치는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이며 당시엔 서당,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모두 소실되었다.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 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표지석
이 곳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으로 1888년경 대접주 손화중과 근동에 세거해 온 천안 전씨 종친들과 연루된 전봉준 장군은 동지를 규합 이곳 당산골에서 농민군을 양성해오던 차 1894년 1월 10일 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고부 농민들의 봉기로 인해 마침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대의를 밝히는 무장포고문을 발표, 흥덕을 거쳐 23일 고부를 다시 점령하고 25일 백산성에 총집결하는 대장정을 이른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탑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갑오농민혁명의 제 1차 봉기가 일어난 발상지인 이 곳 고창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이 곳에서 창의 포고문이 발표되었으며, 기념탑은 전체적인 모형은 농민 혁명의 의지와 열성의 횃불을 형상화하였으며, 포고문을 선포하는 모습을 담아내었다. 탑 본문에는 기의의 목적을 담아낸 포고문을 새겼다. 이 기념탑은 2002년 고창군 및 고창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건립하였다.
-
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안내판은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인 이 곳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당시 고창의 손화중 (남접) 대접주는 이른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사발통문 거사계획등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두어 달 동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인 계사년 12월 10일 공음년 구수내 송문수집에서의 회동에 이어 갑오년 2월 19일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시기상조(時機尙早)를 말하며 미루어 오던 손화중을 설득, 동참을 이끌어 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구적산 아홉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고부 농민봉기 이후 전봉준은 그리하여 전봉준을 도솔대장(都率大將)으로 한 농민군은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등을 띄우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
고창주 추모비
고창주(1858~1895)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 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1894년 당시 아들 고광철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황토현, 장성 황룡촌, 전주성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2차 농민봉기에도 참가했다 전봉준 및 손화중 등의 농민군의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 압송되었는데, 1895년 3월 재판을 받고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중 정읍에서 지방 유지들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금 체포된 뒤 3월 27일 총살 순국하였다. 해당 비석은 1994년 5월 고창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 의해 동학 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세워졌으며, 고창주 의병장을 기리고 있다.
-
고창무장동학농민혁명기포지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는 1차 동학농민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뜻하는 서학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에 해산하였으나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봉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횡포가 극심해지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는 무장현에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3월 20일경 「무장포고문」을 발표하고 재봉기를 선언하였다. 무장기포는 고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1894년 3월 20일경에 재봉기하면서 밝힌 무장포고문에는 봉기의 이유와 목적 등이 담겨있다. 이는 세상에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 반침략을 지향하는 개혁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이 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의병운동과 3.1독립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동학농민군 진격로(도솔암 마애불 미륵비기 탈취)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를 따라 세워진 안내판으로 <도솔암 마애불 미륵비기 탈취>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라도 무장현(현 고창) 선운산 도솔암 남쪽에 충암절벽의 불상 속에 비결이 들어있고,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동학 손화중의 접중에서 이 비기를 손에 넣어 사람을 끌어모으고 농민혁명을 일으켰다는 일화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