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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춘 기념비
이형춘(1887 - 1966)은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형춘 등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지 5일 후에 전개된 4월 1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남읍 안동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던 이형춘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도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김동훈(金東勳)·조종운(曺鍾運)·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이형춘 등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형춘은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조종운·김흥봉·안창석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이형춘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이형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과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형춘은 1966년 11월 21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형춘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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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면 순절비
송주면(1856 - 1910)의 자는 정여, 호는 규사이며,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을 역임한 문신이자 지사이다. 1905년 10월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여 정3품의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직에서 사퇴하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를 듣고서 ‘우리의 구강(舊疆)을 내놓아라.’라는 요지의 혈서를 통감부에 보내고, 절명시(絶命詩) 5수를 유서로 남긴 다음, 자손들에게 효우(孝友)할 것을 당부하고 음독자살하려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밤을 이용하여 우물에 투신하여 54세를 일기로 순절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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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장터 만세운동 기념탑
능주시장은 능주, 도곡, 도암, 춘양, 한천, 이양, 청풍 등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다양한 소비재들이 거래되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생활 및 경제활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월 13일 관영리 출신 양회준(梁會俊, 당시 23세)의 주도로 시장상인 김정렬(金正烈)과 주재영 등 수십 명의 청장년들이 화순군내에서 처음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던 현장이다. 이후 만세운동은 한천, 춘양, 청풍 등지로 번져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기도 하였고, 밤에는 산 위에서 횃불만세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일로 양회준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그해 4월 2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능주장터 만세운동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에 대항하여 능주노농회, 능주농민회 등에 의해 1930년대까지 이어졌던 지역 주민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의 시작이었고,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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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기 기적비
조준기(1890 - 1929)는 1920년 능주 청년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21년에는 능주 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어 계몽 운동을 벌였다. 이후 광주로 이주한 뒤, 1924년 7월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벌인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무기 정학 처분을 받자 그 수습을 위한 도민 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 발기인[1923], 광주 소작인 연합회 집행 위원[1924], 광주 노동 공제회 집행 위원 및 전라 노농 연맹회 전형 위원[1925] 등으로 활동하며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3월경에는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 공산당에 김재중(金載中)·정흥모(鄭洪模)·최안섭(崔安燮)·최일봉(崔一峰) 등과 함께 가입하여 광주 지역 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조준기는 1928년 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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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호 탄생지 표지석
정광호(1895 - 미상)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의원, 상해유화학생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 동경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최팔용(崔八鏞) 등 한국인 유학생 등과 2·8독립선언을 계획하였으며, 백관수(白寬洙) 등과 동경에서 김마리아(金瑪利亞) 등 한국인 여학생 10여 명을 2·8선언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해 2월 2일 2·8독립선언문을 휴대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김기형(金基亨) 등 10여 명과 같이 2·8독립선언 초안을 국내에서 재제작하여 배포하기로 하고, 2월 4∼5일까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 집에서 선언문을 인쇄하였다. 같은 해 3월 인쇄된 선언문을 휴대하고 광주시에서 최한영(崔漢泳)·김강(金剛) 등 5명과 같이 광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한 뒤, 3월 10∼13일 사이에 광주시민 2,00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규합된 시민을 선도하여 1919년 3·1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런데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배판을 받아 이른바 보안법·출판법 위반죄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경찰의 미행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선편으로 상해(上海)에 도착한 후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의 영접을 받았다. 1920년 2월 13일 부터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 근무하다가 1921년 2월 14일 사임하고 3월 18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동지들과 같이 상해유화학생회(上海留華學生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소집되어 개최될 때, 6월 20일 창조파(創造派)의 한 사람으로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등 30여 명과 같이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9월 러시아로 가서 소련에 의지하려다가 마침 레닌(Lenin, N.)이 죽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924년 3월 동지들과 같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1926년 7월 29일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조상섭(趙尙燮)·진희창(秦熙昌) 등 10여 명과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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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섭 비
이인섭(1888 - 1908)은 화순 출신의 의병이다. 심남일은 강무경(姜武景)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1907년 11월 1일 함평군(咸平郡) 신광면(新光面)에서 기치를 올린 후 1909년까지 나주(羅州)·장성(長城)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2월 13일 남평(南平)으로 행군하고 3월 7일 강진면 오치동(吾治洞)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수십 명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4월 15일에 장흥(長興)·곽암(藿岩)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였으며, 6월 19일 남평 장담원(長淡院)과 6월 25일 능주(綾州) 노구두(老狗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심남일 의병장은 1909년 7월 의진을 해산할 때까지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같은 해 10월 9일 체포되었다. 이인섭은 1908년 4월부터 6월경 사이에 심남일 의진에 참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장흥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큰 전투에서 분개하여 홀로 싸우다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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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룡 의적비
서상룡(1852 - 1954)의 자는 사필, 호는 라은, 서강이며, 화순 출신의 의병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11월에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이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제천(堤川) 지역에서 진을 재편하였다.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제천 의진(堤川義陣)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제천 의진은 1896년 2월에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퇴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하였으나,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황해도(黃海道) 장산(長山)에서 패하였다. 그 후 유인석을 수행하여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후, 중국 북경(北京)에 있던 원세개(袁世凱)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등 계책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 만에 귀국하여 은거하였다. 200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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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룡 유적비
서상룡(1852 - 1954)의 자는 사필, 호는 라은, 서강이며, 화순 출신의 의병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11월에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등이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한 후 유인석(柳麟錫)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제천(堤川) 지역에서 진을 재편하였다. 1896년(건양 1)에 유인석(柳麟錫) 의병장이 이끄는 제천 의진(堤川義陣)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제천 의진은 1896년 2월에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퇴하게 되었다. 이어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하였으나,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황해도(黃海道) 장산(長山)에서 패하였다. 그 후 유인석을 수행하여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후, 중국 북경(北京)에 있던 원세개(袁世凱)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등 계책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 만에 귀국하여 은거하였다. 200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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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홍 의적비
양재홍(1888 - 1945)은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초 뜻을 같이하는 정동근(鄭東根)·김교락(金敎洛)·문재교(文在敎)·김영하(金榮夏)·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이후 이들은 나주(羅州)·함평(咸平)·화순(和順)·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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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부대 노구머리 전투지 표지석
의병부대 노구머리 전투지는 1907년~1909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심남일(1871~1910)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1908년 7월 23일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기마병을 격퇴하였던 곳이다. 심남일(1871 - 1910)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여, 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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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수 항일 기적비
장희수(1924 - 1990)는 1943년 10월 중순 경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 지구(安邑地區) 주둔 일본군 3541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던 중 1940년 중경 임시 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는 것을 알고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1944년 12월 부대를 탈출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1945년 4월 중경에 도착한 후 광복군 토교대(土橋隊)를 거쳐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장희수는 1986년 4월 26일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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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상, 김영하 충혼탑
김용상(1858 - 1919)은 1914년 서울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용상은 이낙정(李樂正) 등과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9월부터 11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서울 종로 김태영(金泰榮) 집에서 유병하(柳秉夏)·성기섭(成基燮)·오덕영(吳悳泳) 등 수명에게 '국권회복의 기회가 성숙되었으니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라'고 권유하였다. 그 결과 김용상은 유병하로부터 금 80원·성기섭으로부터 금 35원·오덕영으로부터 금 22원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다른 3명으로부터 금 백십 원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모금 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김용상은 1915년 2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후 김용상은 고문의 여독으로 4년간 병석에 있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하(1878 - 1920)는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경 뜻을 같이하는 김교락(金敎洛)·양재홍(梁在鴻)·문재교(文在敎)·정동근(鄭東根)·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이후 이들은 나주(羅州)·함평(咸平)·화순·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