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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현 추모비
오문현(1911 - 1943)은 광주공립농업학교를 다녔으나 학비 마련이 어려워 중퇴한 후 1929년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1932년 4월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해남에 돌아온 오문현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야학을 설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남 지역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1933년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대중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해남 김홍배(金洪培) 등이 주도하여 만든 전남운동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지역 조직의 기반을 만들고자 한 단체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 단체 중 하나였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9개 군 청년들이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成道庵)에서 첫 모임을 갖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소작쟁의 운동과 야학, 무산자 해방운동 등이었다. 1933년 8월에 명칭이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편되었고, 완도(莞島)·장흥(長興)·강진(康津)·영암(靈岩) 등에 지부 조직이 설치되었다.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는 농민운동의 지도 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지에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결성한 후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오문현은 자신의 고향인 북평면에서 정맹영(鄭孟永) 등 3명을 포섭하여 청년반을 건설하는 등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4년 2월에 조직 활동이 발각되었고, 1934년 9월 오문현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오문현은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오문현은 1943년 10월 29일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오문현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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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마을 표지석(북평 이진마을)
북평 이진마을은 1909년 항일 의병운동과 1930년대 전국 최대 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중심 마을이다. 이진마을 출신인 황두일은 1909년 서남해안에서 활동했던 의병대장 중 한 명이었다. 황두일을 비롯한 해남의병들은 북평면 성동암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왜군에 밀려 대흥사 심적암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심적암에서 일본군에 의해 의병 대부분은 참사를 당하고 황두일도 이후 사형을 당한다. 1930년대 북평 이진마을을 중심으로 전국최대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가 구성된다. 중심인물은 이진마을 출신인 동경 유학파 김홍배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 완도를 비롯해 10개 군에 걸쳐 조직된 당시 최대 규모의 항일조직이었다. 이진에 있던 사설학원인 동강학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주로 성도암과 심적암에서 비밀모임을 갖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활동은 2년여 만에 막을 내리지만 활동범위가 워낙 넓어 사건 발각 당시 연행된 숫자만도 1000여명이 넘었고 구속된 사람은 57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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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옥 묘
손승옥(1898 - 1979)은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해남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손승옥 등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지 5일 후에 전개된 4월 1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농사를 짓고 있던 손승옥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김동훈(金東勳)·조종운(曺鍾運)·이형춘(李亨春)·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손승옥 등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손승옥은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김흥봉·안창석·이형춘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손승옥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손승옥은 행진 도중 해남공립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에 호응하여 학생들까지 시위에 동참하여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손승옥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언도받았다. 손승옥은 1979년 2월 20일 사망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승옥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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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암 의병 위령탑
대흥사는 한말 의병의 마지막 전적지 심적암이 있는 곳이며, 심적암 의병 위령탑은 해당의병운동에 참여한 분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은 1909년 7월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어난 항일 의병운동이다.1909년 7월 8일 황준성 의병 부대는 해남 미황사 및 대흥사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일진회 회원 박원재(朴元在)와 일본 헌병의 밀정인 진태진(陳泰鎭)을 해남군 현산면 초평리에서 처단하였다. 1909년 7월 8일 밤 10시 경 해남 대흥사에 집결하여 있던 황준성 의병 부대는 7월 9일 새벽 4시~4시 30분 경 요시하라 대위 이하 7명의 일본 헌병 및 경찰을 포함한 20여 명의 의병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약 2시간 30분 동안 전투를 하였다. 전투 결과 의병 약 70명 중 24명이 희생당하고, 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화승총과 군도 등 무기를 압수당했다. 황준성, 추공엽, 황두일은 탈출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 토벌대의 피해는 없었다. 심적암 의병 전투 이후 황준성은 일제를 피해 보성, 순천 등지로 이동하면서 은거하던 중 1909년 12월 7일 체포되었다. 이후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사형당하였다. 추공엽은 의병 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1909년 7월 18일 부하들에게 피살당하였다. 황두일의 행적은 심적암 의병 전투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으로 인해 해남 지역민들의 사회의식,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지면서 1919년 3·1운동과 1935년대 전남운동협의회 결성 참여 등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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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적암터 호남의병 전투지
대흥사 심적암은 한말 의병투쟁의 최후 격전지이자 의병 대학살의 현장이다. 대흥사 심적암을 중심으로 대흥사 일원은 한말의병투쟁의 격전지로, 1907년 한국 군대 해산을 기점으로 호남지방 의병활동은 민중의 의식 성장과 함께 양적, 질적 확대를 가져왔다.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은 1909년 7월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어난 항일 의병운동이다. 1909년 7월 8일 황준성 의병 부대는 해남 미황사 및 대흥사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일진회 회원 박원재(朴元在)와 일본 헌병의 밀정인 진태진(陳泰鎭)을 해남군 현산면 초평리에서 처단하였다. 1909년 7월 8일 밤 10시 경 해남 대흥사에 집결하여 있던 황준성 의병 부대는 7월 9일 새벽 4시~4시 30분 경 요시하라 대위 이하 7명의 일본 헌병 및 경찰을 포함한 20여 명의 의병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약 2시간 30분 동안 전투를 하였다. 전투 결과 의병 약 70명 중 24명이 희생당하고, 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화승총과 군도 등 무기를 압수당했다. 황준성, 추공엽, 황두일은 탈출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 토벌대의 피해는 없었다. 심적암 의병 전투 이후 황준성은 일제를 피해 보성, 순천 등지로 이동하면서 은거하던 중 1909년 12월 7일 체포되었다. 이후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사형당하였다. 추공엽은 의병 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1909년 7월 18일 부하들에게 피살당하였다. 황두일의 행적은 심적암 의병 전투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으로 인해 해남 지역민들의 사회의식,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지면서 1919년 3·1운동과 1935년대 전남운동협의회 결성 참여 등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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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생가
양한묵(1862 - 1919)의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며, 일제강점기 탁지부주사, 능주세무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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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순국비
양한묵(1862 - 1919)의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며, 일제강점기 탁지부주사, 능주세무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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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서당(소심재)
양한묵(1862 - 1919)의 자는 길중, 호는 지강이며, 일제강점기 탁지부주사, 능주세무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가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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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기념비
해남보통학교 학생 김규수는 1919년 4월 1일 해남보통학교의 기숙사로 김한식·임영식·신건희·윤옥하 등을 찾아가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만세시위를 제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거사일은 4월 6일의 해남 장날로 정했고 천과 종이로 만든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고 신건희가 기초한 독립선언 광고문을 등사하였다. 4월 6일 오후 1시경,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 광고문 등을 감추어 가지고 시장으로 간 해남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광고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상인들과 주민들이 이에 환호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해남보통학교 생도들이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으로 나섰고, 장터에 모였던 사람들도 이를 따라 나섰다. 일경은 이를 폭력 진압하고 학생들을 대량 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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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항일운동추모비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海南抗日運動追慕碑)는 해남군 해남읍 신안리에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3년 7월 9일 해남항일독립운동희생자추모사업회가 건립하였다.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는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 글자가 새겨진 비석[높이 6m] 1개와 1592~1945년까지 왜군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한 순국열사와 애국지사의 이름이 새겨진 와비 2개가 있다. 글은 모두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는 해남 지역에서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며 순국·참살·옥사·투옥 등 희생을 치른 325명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2013년 7월 9일 건립되었다. 비석에 새겨진 순국열사와 애국지사의 이름은 1592년 임진왜란 구국공신 순국열사 64명, 1597년 정유재란 구국공신 순국열사 18명, 1636년 병자호란 구국공신 순국열사 13명, 1890~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참형 희생자 66명, 1909년 심적암 항일 투쟁 희생자 54명, 1919년 기미 3·1 독립 만세 사건 희생자 75명, 1934~1936년 호남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관련 애국지사 21명,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관련 애국지사 14명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해남 항일운동 합동 추모제는 2007년 3월 1일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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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춘 집
이형춘(1887 - 1966)은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형춘 등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지 5일 후에 전개된 4월 1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남읍 안동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던 이형춘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도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김동훈(金東勳)·조종운(曺鍾運)·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이형춘 등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형춘은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조종운·김흥봉·안창석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이형춘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이형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과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형춘은 1966년 11월 21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형춘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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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춘 묘
이형춘(1887 - 1966)은 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해남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6일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형춘 등은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난 지 5일 후에 전개된 4월 1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해남읍 안동리에서 잡화상을 운영하고 있던 이형춘은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도 독립 만세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김동훈(金東勳)·조종운(曺鍾運)·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및 읍내의 유지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과도 연락을 취해 뜻을 모았다. 이형춘 등은 해남읍 남동리에 있었던 김동훈의 집에서 목판을 제작하여 종이 태극기 800여 매를 인쇄하였고, 당목으로 대형 태극기 6개를 만들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형춘은 구교리에 있었던 김양운(金良云)의 집에서 김동훈·조종운·김흥봉·안창석 등과 협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 11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6일에 있었던 해남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사를 군민들에게 알리며 분발을 촉구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거사 당일 이형춘 등은 미리 제작하여 천병유(千炳有)의 집에 보관하였던 태극기를 해남로(海南路) 큰길로 운반하였고, 시장에 모여든 수백 명의 인파를 규합하여 정오를 기하여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며 해남읍 곳곳을 누비는 사람들의 대열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일로 이형춘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17일 대구복심법원과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형춘은 1966년 11월 21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형춘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