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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면 충절비
정윤면(1851 - 1908)은 전라남도 함평(咸平)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거의하였다. 처음에 그는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입대하여 활약하였고, 후에 김태원(金泰元) 의병장 휘하에서 의병으로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그 중에서 나주(羅州) 영산포(榮山浦) 전투와 광산군(光山郡) 본량면(本良面) 어등산(魚登山)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초 의병장 기삼연과 김태원이 전사하자 나머지 의병을 규합하여 재정비하고 계속하여 재기할 것을 도모하던 중 적군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1908년 2월 11일 나주 거평방(居平坊)의 산기슭에서 적에게 살해당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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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행 집(국사재)
국사재(國思齋)는 애국지사 이인행이 태어난 생가이다. 1996년 기존의 낡은 가옥을 원형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이인행(1898 - 1975)은 1919년 10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기산도(奇山度)·김종탁(金鍾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불복·상고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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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행 의적비
국사재(國思齋)는 애국지사 이인행이 태어난 생가이다. 1996년 기존의 낡은 가옥을 원형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이인행(1898 - 1975)은 1919년 10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기산도(奇山度)·김종탁(金鍾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불복·상고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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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행 묘
국사재(國思齋)는 애국지사 이인행이 태어난 생가이다. 1996년 기존의 낡은 가옥을 원형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이인행(1898 - 1975)은 1919년 10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기산도(奇山度)·김종탁(金鍾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불복·상고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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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삼, 장옥삼, 장공삼 형제 공적비
장경삼, 장옥삼, 장공삼은 세 형제이다. 장경삼과 장옥삼은 과거에 뜻을 두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하다가 민씨 척족정권의 세도가 극에 달해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탐관오리가 날뛰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이 노골화하여 세상이 혼탁해짐을 보고 벼슬길을 단념하셨다. 삼형제는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관심이 깊었으며 후진양성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안팎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1894년에 호남인들이 앞장서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이룩하고자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전라도 전역을 휩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이때 장옥삼은 큰 뜻을 품고 있던 차에 처조카로 함평의 대접주인 이화진의 권유를 받아 형인 장경삼 및 동생 장공삼과 함께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여는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삼형제가 군사들을 조련한 들판인 ‘삼정들(三張 들: ‘삼인 장씨들의 들판’에서 ‘삼장’이 ‘삼정’으로 와전)’은 괘치 마을의 앞 들판을 가리킨다. 세형제가 거느린 동학 농민군은 일제 침략군이 주축이 된 관군의 토벌작전에 대항하여 염산 고막원 무안 싸움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장경삼은 체포되어 12월 9일에, 장옥삼과 장공삼은 뒤에 붙잡혀 다음 해 2월 17일에 함평에서 각각 처형되어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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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의병훈련소(남일공원)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 자가 남일(南一), 호는 덕홍(德弘)이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1910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심남일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咸平郡) 월야면(月也面) 정산리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의병을 모집·훈련하였꼬 기삼연 의병장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의 일원이었다. 1909년 7월 30일 영암 사촌(沙村) 전투에서 일본군 평금산 대장 등 적 10여 명을 죽이는 등 전라남도 곳곳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에 대한 조칙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1909년 7월 21일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부대를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1909년 10월 9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심남일은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하였으며, 1910년 7월 23일에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심남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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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면 추모비
정희면(1866 - 1945)은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1906년 봄 국권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김용구(金容球)가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할 때 여기에 동참하여 활동하였고, 이어 1907년 8월에는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김형식(金炯植)·박용근(朴溶根)·오태윤(吳泰允)·이영화(李永華) 등과 함께 의병을 소모하는 한편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10월 일군이 수백 명의 군중을 모아 놓고 김용구의 집에 방화할 때 붙잡혀 광주(光州)로 이송되었으며 1908년 봄 유형(流刑) 6개월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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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동상
김철(1886 - 1934)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철(金澈, 1886~1934)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성필(成弼), 호는 일강(一江)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영탁(金永鐸), 이명은 김중청(金重淸)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영광에 있는 광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하였다. 1917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0년 7월에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부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준비에 가담하였다. 그해 4월 10일 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무부 위원, 교통차장, 지방선전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고,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이외에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하였고, 특히 상해대한교민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상해대한교민단 본구(本區) 임원이 된 이래, 1932년 윤봉길 의거로 항저우〔杭州〕로 피신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하였다.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교민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1월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개조파의 입장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김구 국무령 체제가 수립되면서 법무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에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11월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1933년부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전라도의원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국무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급성폐렴에 걸려 6월에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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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면 묘
정희면(1866 - 1945)은 전남 함평(咸平) 사람이다. 1906년 봄 국권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김용구(金容球)가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할 때 여기에 동참하여 활동하였고, 이어 1907년 8월에는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김형식(金炯植)·박용근(朴溶根)·오태윤(吳泰允)·이영화(李永華) 등과 함께 의병을 소모하는 한편 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10월 일군이 수백 명의 군중을 모아 놓고 김용구의 집에 방화할 때 붙잡혀 광주(光州)로 이송되었으며 1908년 봄 유형(流刑) 6개월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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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묘
김철(1886 - 1934)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철(金澈, 1886~1934)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성필(成弼), 호는 일강(一江)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영탁(金永鐸), 이명은 김중청(金重淸)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영광에 있는 광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하였다. 1917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0년 7월에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부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준비에 가담하였다. 그해 4월 10일 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무부 위원, 교통차장, 지방선전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고,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이외에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하였고, 특히 상해대한교민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상해대한교민단 본구(本區) 임원이 된 이래, 1932년 윤봉길 의거로 항저우〔杭州〕로 피신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하였다.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교민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1월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개조파의 입장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김구 국무령 체제가 수립되면서 법무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에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11월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1933년부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전라도의원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국무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급성폐렴에 걸려 6월에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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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기념관
심수택(본명 심남일, 1871 - 1910)은 1871년 2월 10일(음력)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咸平郡 月也面 新基)에서 출생하였다. 향리에서 면장(面長)·향교장의(鄕校掌議)·도의사(道議事) 등을 역임하고 또 서당의 훈장으로서도 재직한 바 있는 향반(鄕班)이었다. 노일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고,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을 금할 길 없어 거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장 김 준(金準·金泰元)의 아우 율(聿)의 부장이 되어 장성(長城)·영광(靈光)·함평(咸平)·남원(南原)·보성(寶城)·장흥(長興) 등지에서 일군과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 율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율을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1907년 11월 1일 함평군 신광면(新光面)에서 기치를 올려 의병을 모집·훈련하기 시작하여 1908년 2월 13일 남평(南平)으로 행군하면서 적과의 접전을 감행하였다. 그의 첫 접전은 3월 7일 강진면 오치동(吾治洞)에서 있었다. 적병 수백 명을 맞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경까지의 교전 끝에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어서 4월 15일 장흥(長興)·곽암(藿岩)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9일 남평 장담원(長淡院) 전투에서 적 5명을 베고, 6월 25일 능주 노구두(綾州 老狗頭)에서 적 5명을 베고 말 2필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7월 30일 영암 사촌(靈岩 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고, 8월 1일 나주 반치(羅州 盤峙)에서, 9월 20일 장흥 신풍(長興 新豊)에서, 10월 9일 해남 성내(海南 城內)에서, 10월 27일 능주 돌정(石亭) 등지에서 모두 백여 급을 살상하였다. 이와 같은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으나 불행하게도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까지 접전일기에 기록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기간동안 추위와 병고로 인하여 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을 해산한 후 심남일은 강무경과 함께 능주로 잠행하여 전의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 10월 9일(음 8월 26일) 이를 탐지한 일군에게 체포되었다. 9월 2일 광주로 이송되었다가 12월 15일에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한 후 마지막으로 고국 산천에 그의 단심(丹心)을 터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1910년 7월 23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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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덕 집
안후덕(1905 - 1949)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년회 상해지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2월 사재를 정리하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28년 2월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귀국, 자기 소유 토지를 저당잡히고 4만 5000원(圓)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그 금액 중 2만 2000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나머지 2만원은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에 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이 청년회 상해지부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귀국하던 중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