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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홍태 묘
천홍태(1903~1927)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3년 9월 완도군 청산면(靑山面) 모도리(茅島里)의 대모도(大茅島) 서부락(西部落)에서 십수명의 청년들과 함께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 1925년에 茅島靑年會로 개칭)을 조직하여 교양부 위원이 되었다. 청년회조직의 목적은 원래 마을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후원하는 것이었고, 그는 서당의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원들간에 점차로 민족독립사상이 고취되어감에 따라 그들은 회의를 열 때 마다 혁명가를 합창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당 생도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1925년 1월의 월례회의에서 "우리는 절대 일본인 및 친일인(親日人)에게 동정하지 말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같은 해 4월의 월례회의에서는 "경찰당국 및 일본인을 파괴할 것"과 "우리는 절대로 대한(大韓)을 위해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사실로 인하여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6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 7호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7년 6월 18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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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기념탑
이 탑은 한말 위정척사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일컫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적 현실에서 정통사상의 옹호를 위해 뜻있는 선비들이 외친 위정척사사상은 나라와 민족을 보전하려던 유림들의 애국정신이었다. 한말 최초로 서양의 사특한 세력을 배척하고 민족의 정통논리를 보위해야 한다고 1866년[병인(丙寅)] 8월 16일 척사소(斥邪訴)를 올린 최초의 학자는 이곳 장성출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이었다. 그 상소는 어떻게 해야 사를 물리치고 정통논리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밝힌 맨 처음의 상소였다. 이를 뒤이어 경기도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도 같은 상소를 올리면서 호남과 경기도에서 위정척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위정척사운동은 바로 한말의 의병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지키자는 애국운동으로 승화되어 마지막 망해가던 나라에 민족혼을 살아나게 했던 애국 애족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역사의 가르침을 값지게 간직하기 위하여 우리는 맨 처음으로 위정척사정신을 상소로 외친 노사선생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노사선생 묘소 가까운 곳에 이 탑을 건립하여 탁월한 학자의 훌륭한 뜻을 기리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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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사
삼일사는 기미독립열사인 신경식, 유상능, 유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상우, 신태식, 신국호, 유상학, 유상순, 박광우, 오상구, 신종식 등 13열사의 의행과 투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사 지내는 곳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이면 모현리 주민 신태식외 4명이 서울로 올라가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고향에 내려와 그해 4월 3일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3열사는 왜병에게 피검되어 광주지법에서 징역 6월부터 2년까지 선고받았으나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여 각각 6월씩의 감형으로 유상설 고용석은 1년 6월,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호는 1년, 유상학, 유상순, 오상구, 박광우는 6월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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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숭모단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되자 이곳에 애국유림을 모아 일제를 규탄하고, 1910년 08월 한일합방이 되자 지방 애국 유림이 모여 주권회복을 외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광무황제를 향해 방성대곡 한 곳이다. 또한, 1919년 01월 고종(광무황제)이 일인에 의한 독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축단하고 인산(국장)일까지 902일 산통곡 북향을 한 곳이며, 1926년 04월 순종(융회황제)이 승하하자 이곳에 융희황제 숭모단향비를 같은 자리 왼쪽에 세우고 함께 향사한 곳으로서 나라에 대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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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경 구 묘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坡州)군 교하(交河)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유서를 남기고 대로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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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향교 유림항일사적비
장성향교는 1896년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의 창의 장소이자 근거지이다. 기우만(1846~1916)은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있자 겨울부터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 1월에는 복수토적과 단발령 철폐, 옛 제도의 복구, 국왕의 환궁을 내세우며 근왕의병으로서 봉기하자고 전라도 각지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그는 장성향교를 근거지 삼아 장성과 그 밖의 지역에 격문을 발송하며 호응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 호응한 지역이 바로 나주였으며, 장성에서는 1896년 음력 2월 7일 기우만의 주도로 장성향교를 도회소(都會所), 양사재(養士齋)를 향회소(鄕會所)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장성의병이 일어나자 창평유생 고광순(高光洵)도 적극 호응하여 가담하였다. 이처럼 장성향교는 전라도의 전기의병의 최초 봉기장소이며, 이후 의병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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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7일 송주일·조병렬 등이 주도하여 소룡리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3월 21일에도 교사 정선유와 학생 100여명과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4월 3, 4일에도 모현리 유지 유상설·고용석·정병모·신태식 등의 주도로 마을 주민 200여명이 ‘대한독립기’라고 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하고, 사가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시위로 고용석(高龍錫, 1895~1950), 박광우(朴光又, 1866~1940), 신국호(申國浩, 國洪, 1990~1924), 신상우(申商雨, 1892~1981), 신태식(申台植, 1890~1944), 오상구(吳相九, 1891~1942), 유상설(柳相卨, 1890~1943), 유상순(柳相淳, 1876~1932), 유상학(柳相學, 1882~1948), 정병모(鄭秉謨, 1872~1945)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열사장성기념사업회가 장성출신 3·1운동열사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1972년 9월 3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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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순국비
기삼연(1851 - 1908)은 개항기 때, 호남 창의회맹소의 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를 맹세하고 장성에서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해 광산(光山)에서 거의(擧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해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 · 부안 · 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이어 12월에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00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해 불태웠다. 그리고 그 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전세가 달라지자 전투 양상을 바꾸어 소단위로 나누고 유격전으로 돌입하였다.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의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해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 명이 돌입해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해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했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 의병은 김준 · 이석용(李錫庸) · 김용구(金容球) 등이, 김준이 순국한 다음에는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에 재편성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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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기,변진설 독립운동 근거지(영사정)
본래 이름은 산정(山亭)이었으며, 1930년경 황주변씨 후손들이 중건하면서 선현을 사모하는 뜻에서 永思亭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변순기선생 기적비에 3.1독립만세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후 '장남 변진설이 광주고보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앞장 섬에 선생은 이를 적극 지원하여 민중대회까지 벌였으나 진설은 결국 체포되어 징역 6월에 4년 집행유예를 받았으니 그는 나와서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하여 승려가 되고 말았다. 출옥한 후 1921년부터 송사 기우만의 제자로서 전남학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장성지회가 창립되자 적극 가담하였고,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장안리 입구에 있는 영사정(永思亭 : 서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는 날까지 후배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변진설은 출가하여 법명 월주가 된 그는 백양사에서 송만암스님에게 처음 참선 공부를 시작하여 화엄사에서 당대의 불교학의 대가였던 진진응 스님에게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1939년 독립선언문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법을 전하는 전법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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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기 기적비
변순기(1885~1971)는 전남 장성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교사로 재직 중 광주군(光州郡) 광주읍(光州邑)에서 김복현(金福鉉)과 함께 1,000여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및 독립가(獨立歌)를 인쇄 살포하고 태극기와 모자 등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1년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의 문인으로서 전남학계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장성지회(長城支會)가 창립될 때 가입하고 농민운동에 참가하여 수세 불납(收稅不納)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영사정(永思亭 : 서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는 날까지 후배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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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구 공적비
박일구(1898~1942)는 전남 장성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김 강(金剛)·김 철(金鐵)·최병준(崔丙浚)·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日本東京)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를 이곳 청년들에게 알려, 최한영·김복수(金福洙)등이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일찍부터 만세시위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례(參禮)하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김 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하여, 이날 밤 남궁 혁(南宮赫)의 집에서 김 강·최병준·최한영·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奎)·서정희(徐廷禧)·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 등과 만나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알리고 광주에서도 똑같은 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니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을 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어 이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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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집
기우만(1846 - 1916)은 개항기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의분하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합세하여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4년(고종 31)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고종 32) 나주에 세워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고종 33)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호남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치면서 의병 봉기의 기운이 짙어져 갔다.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다. 그 동안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의병의 형세가 커지자 관리들은 자기들 신변에 위험을 느껴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주1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 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 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