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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숭모비
김철(1886~1934)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교통부차장, 교통부총장대리, 군무장, 재무장, 무임소장, 국무원 비서장 등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살 의거를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1934년 중국 항주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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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3.1운동 발원지 표지석(영광향교)
영광군 3.1운동 발원지로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점화된 후 3월 14일 전남도 내의 군 단위에서는 최초로 영광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되어 총 10여 차례 7,6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차 독립만세 운동은 3월 14일 영광보통학교(현 향교 명륜당)에서 曺喆英(조철영)과 李炳英(이병영), 학생대표 鄭憲模(정헌모), 許奉(허봉), 曺述鉉(조술현) 등이 주도하였으며, 2차 독립만세 운동은 3월 15일 영광읍 남천리 朴靖煥(박정환)의 직포공장에서 金殷煥(김은환), 鄭仁瑛(정인영), 曺喜芳(조희방), 朴炳文(박병문), 朴正淳(박정순), 徐淳彩(서순채), 柳斗燁(류두엽), 金浚獻(김준헌) 등이 주도하였다. 이에 영광군의 독립운동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널린 기리고자 영광읍 교촌리 393번지(영광향교 명륜당 터)에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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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3.1운동 발원지 표지석(구 직포공장)
영광군 3.1운동 발원지로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 함성이 점화된 후 3월 14일 전남도 내의 군 단위에서는 최초로 영광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되어 총 10여 차례 7,600여 명이 참여하였다. 1차 독립만세 운동은 3월 14일 영광보통학교(현 향교 명륜당)에서 曺喆英(조철영)과 李炳英(이병영), 학생대표 鄭憲模(정헌모), 許奉(허봉), 曺述鉉(조술현) 등이 주도하였으며, 2차 독립만세 운동은 3월 15일 영광읍 남천리 朴靖煥(박정환)의 직포공장에서 金殷煥(김은환), 鄭仁瑛(정인영), 曺喜芳(조희방), 朴炳文(박병문), 朴正淳(박정순), 徐淳彩(서순채), 柳斗燁(류두엽), 金浚獻(김준헌) 등이 주도하였다. 이에 영광군의 독립운동 정신과 역사적 의의를 널린 기리고자 영광읍 교촌리 393번지(영광향교 명륜당 터)에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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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환 추모비
황덕환(1895~1929)은 전남 영광 사람이다. 신민부에서 친일파 제거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로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19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 후 다시 서울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에서 군사위원장 김좌진 휘하에서 별동대장에 임명되어 맹렬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친일단체인 하얼빈 조선인민희 토벌과 악명 높았던 해림시 조선인민회장 배두산 제거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체포되어 여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인이 한국인에 대하여 매일같이 모욕적인 언사를 하므로 적개심에 불타 일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에 다시 사형언도를 받게 되어 1929년 9월 20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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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삼 추모비
의병장 이화삼(1866~1910)은 전남 장성 사람이다. 1890년대 동학혁명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중 1906년 봄 의병장인 이대극(李人克)이 영광에서 기병하자 그의 후군장으로 법성포, 무장, 장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1908년 4월 18일 무장, 고산 등지에서 일본 기병을 쳐부수고 동년 5월 8일에는 불갑산(佛甲山) 연실봉(蓮實峰)전투에 참여하였고, 1910년 1월 영광과 백양산 등지에서 많은 전투를 벌여 성과를 거두었으며 본 진영과 합류하여 대혈전을 벌이던 중 1910년 1월 28일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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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호 집
이을호(1910~1998)는 전남 영광(靈光) 사람이다. 1934년 8월, 갑술구락부(甲戌俱樂部)·체육단(體育團) 등의 단체 결성에 참가하여 표면상 체육 장려를 내세웠지만, 내면으로는 단원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영광지역의 민족운동을 주도해 온 청년회(靑年會)와 농민회(農民會) 등이 일제의 강권으로 해산당하자, 어떤 형태로든지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갈 조직이 필요했다. 그때 서울 약학전문학교(藥學專門學校)를 졸업한 이을호가 서울에 보급된 덴마크의 '닐슨북'이라는 도수체조를 배워가지고 귀향하여 영광읍 진명사(珍明社) 마당에서 이 지역의 지성인들을 모아 놓고 매일 아침, 이 도수체조를 가르쳤다. 이때 도수체조를 빙자하여 이 고장의 지도층 인사들은 1934년 4월 영광읍 교촌리 명륜당에 모여 영광체육단(靈光體育團)을 창단하였다. 이을호는 여기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체육단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배일사상이 고조되자, 일경은 1937년 9월 16일 밤에 '동방약소민족 옹호, 대한독립만세'라 쓴 벽보를 빌미로 3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 붙잡혀 1년 4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9년 2월 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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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중등교육 발원지 민립학교 기념비
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영광지역의 선각자들은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발족하고 10월 15일에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교정에 자리했던 민립고등중학교는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로 성정하고 고등학교는 종합고, 실업고, 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영광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민립학교를 건립할 때 이을호(1910~1998)는 전답 9만여 평과 벼 1천 섬을 출연하여 학교를 열게 하였고,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천여 평을 기증하여 후세 교육을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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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무령리 315 관람산에 위치한 기념비로서,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광지역의 애국지사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영광군의 3.1만세운동은 1919년3월14일에 시작되었다. 영광최초의 만세시위는 영광보통학교 학도들에 의해 일어났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훈도 이병영과 3학년 정헌모 2학년 허봉 1학년 조술현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교촌리 김두학씨 집에서 비밀리에 구한국 국기를 제작하여 전교생 150명에게 나누어 주고 당시 학교였던 영광향교의 명륜당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도동리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는 남천리 조씨의 정미소앞에서 경찰과 충돌을 하게 되었고 150명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한 노도같은 행군은 군청과 경찰서까지 쇄도하여 잔학무도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주동 교사와 학생 대표들이 무장 왜경에게 현장 체포되면서 시위는 오후 5시경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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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민립학교 교가비
본 사적은 영광민립학교의 교가를 적어놓은 비석이다.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영광지역의 선각자들은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발족하고 10월 15일에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민립고등중학교는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로 성정하고 고등학교는 종합고, 실업고, 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영광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민립학교를 건립할 때 이을호(1910~1998)는 전답 9만여 평과 벼 1천 섬을 출연하여 학교를 열게 하였고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천여 평을 기증하여 후세 교육을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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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채 묘
서종채(1881~1916)는 전라북도 고창(高敬) 출신이다. 1907년 40명의 의병을 소집하여 활약하다가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합진하였다. 1908년에는 이대국(李大局) 의병장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의병장이 전사한 후 200여 명으로 부대를 재편성하여 함평(咸平)·영광(光)·무장(茂長)·부안(扶安)·고창(高敞) 등지에서 여러 차례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의병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에도 주력하여 많은 총기를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일군에게 체포되어 1913년 7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살인·강도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동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1914년에 20년으로, 1915년에 15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16년 4월 22일 대구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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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공적비
김재홍(1882~1938)은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4월 10일의 영암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면서기로 재직하면서,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가하였으며, 동료 직원인 최민섭(崔旻燮)과 함께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6백여 매, 태극기 50여 매, 독립신문 5백여 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 매를 비밀리에 등사하였다.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수많은 시위군중이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든 태극기 등의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하다가 일제의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7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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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상 기적비
박규상(1893~1921)은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3월 11일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미리 계획이 일본군경에게 탐지되어 오히려 엄중한 수사와 감시만 강화된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산발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곧 중단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난국(難局)을 이겨내면서 그는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으고, 읍내의 유지 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旻燮)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구림리와 읍내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 본부로 정하고 시위 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군서면 면서기로 있는 김재홍(金在洪)과 최민섭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 매, 독립선언서 6백여 매, 독립신문 5백여 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 매를 등사하여 영암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으로 하여금 배포케 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그는 태극기와 유인물을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며 시위군중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었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 중심가로 시위·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심한 병고로 보석되어 귀향하던 중, 서호강(西湖江)의 배 안(船中)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