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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 농민항쟁사적비
서태석(1884~1943)은 전남 무안 사람으로, 신안군(新鮟郡) 암태소작회(岩泰小作會) 회장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였다. 서태석은 1920년 3월 28일에 전남(全南) 목포(木浦)에서 표성천으로부터 태극기와 대한독립을 촉구하는 격문 200여 매를 전달 받고, 이를 이튿날 29일 밤에 송도공원(松島公園) 및 철도정거장 등지에서 붙이거나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3년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암태소작회 회장으로서 부당한 소작료율 개선을 위해 소작투쟁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1924년 4월 전조선노동대회(全朝鮮勞動大會)에 참석차 상경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 일로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6년 말 조선공산당(춘경원당)에 입당하여, 전라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7년 9월 9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붙잡혀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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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석 추모비
서태석(1884~1943)은 전남 무안 사람으로, 신안군(新鮟郡) 암태소작회(岩泰小作會) 회장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였다. 서태석은 1920년 3월 28일에 전남(全南) 목포(木浦)에서 표성천으로부터 태극기와 대한독립을 촉구하는 격문 200여 매를 전달 받고, 이를 이튿날 29일 밤에 송도공원(松島公園) 및 철도정거장 등지에서 붙이거나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3년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암태소작회 회장으로서 부당한 소작료율 개선을 위해 소작투쟁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1924년 4월 전조선노동대회(全朝鮮勞動大會)에 참석차 상경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 일로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6년 말 조선공산당(춘경원당)에 입당하여, 전라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7년 9월 9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붙잡혀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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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준 구 묘
장병준(1893~1972)은 전라남도 무안(務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에 전라남도 무안(務安)에서 광무황제(光武皇帝)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고 집합시킨 주민들 수천 명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도록 유도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일경의 추격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손두환(孫斗煥)·한위건(韓偉健)·장도정(張道政)·임봉래(林鳳來) 등 의원과 연서(連署)하여 "한 나라에 국회가 둘이 될 수 없으니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는 시급히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해(上海)에 설립된 의정원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를 분립(分立)하기 어려운 즉 다른 곳에 설립된 의회를 속히 본 의정원에 통일케 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하였다. 1920년 초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 등과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3월 2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동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목포(木浦) 지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중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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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준 집
장병준(1893~1972)은 전라남도 무안(務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에 전라남도 무안(務安)에서 광무황제(光武皇帝)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고 집합시킨 주민들 수천명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도록 유도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일경의 추격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손두환(孫斗煥)·한위건(韓偉健)·장도정(張道政)·임봉래(林鳳來) 등 의원과 연서(連署)하여 "한 나라에 국회가 둘이 될 수 없으니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는 시급히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해(上海)에 설립된 의정원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를 분립(分立)하기 어려운 즉 다른 곳에 설립된 의회를 속히 본 의정원에 통일케 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하였다. 1920년 초에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 등과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3월 2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동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목포(木浦) 지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중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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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염 흉상
장홍염(1910~1990)은 전남 목포(木浦) 사람이다. 1928년 11월 9일 서울에서 사숙(社塾) 고학당(苦學堂) 교사 이종률(李鍾律)이 기초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정책 비판 격문을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내의 다수 학생들에게 약 40장을 배포하였다. 그 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각 학교 대표들과 함께 회합하여 1930년 1월 15일 9시를 기해 궐기할 것을 결의하고 항쟁하다가 퇴학을 당했다. 같은 해 3월, 중국으로 건너가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1932년 9월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32년 12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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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3도 농민운동기념탑
조선후기부터 해방까지 360년간 하의 3도(하의, 상태, 하태)의 농민들의 토지탈환을 위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4년 11월에 하의3도 농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고귀한 뜻을 기려 하의3도 도민들이 본 탑을 건립하였다. 서남해 대부분의 섬들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정부의 공도(空島)정책에 의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다가 임란 이후 사람들의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토지의 개간이 시작되었다. 원래 조선시대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이 토지의 소유권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서남해 연안에서 이미 개간되고 있던 많은 토지를 국왕으로부터 사패(賜牌)받아 그 소유권을 빼앗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홍씨가에 혼인하게 되면서 하의3도의 개간된 땅 24결을 홍씨가문에서 독점하였다. 한말에 이르러 그 토지는 홍씨가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가로, 그리고 결국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그리고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하의3도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도세 혹은 도전의 납부를 거부하고, 각종 소송을 통하여, 그리고 농민조합 등을 통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결국 해방 후인 1950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으로 1956년에야 비로소 농지상환조치가 이루어졌다. 3백여년에 걸친 하의3도민의 이러한 저항운동은 한국사에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농민들의 항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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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적려유허비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24년 9월 그의 문하생 오준선, 임동선 등이 지장암 아래에 선생의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의 뜻을 기리기 위해 본 비석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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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구 청년회관
여수지방 항일 구국운동의 근거지로서, 일제 강점기에 여수 청년들이 조직 한 사회운동 단체 '맞돕회'가 건립한 '청년회관' 건물이다. '맞돕회'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3.1운동 때에 퇴학을 당하여 고향에 온 학생들이 1921년에 김백평을 중심으로 만든 단체로, 단체의 이름은 이름은 청년들이 '맞잡고 돕고 살자'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 건물은 '맞돕회'가 '덕지'라는 저수지를 구입하여 메우고, 당시 우편국으로 사용하던 진남관 왼쪽 건물의 철거현장에서 건축 자재를 마련한 다음, 천일화학 김영준의 도움을 받아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1층 건물 위에 전통 건축물을 앉힌 독특한 모습으로, 여느 전통 건축물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한 전통 건축물의 자재를 활용하여 지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지역의 항일운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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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연 기념관
주재연(1929~1945)은 1943년 3월 여수군 돌산면 공립국민학교 제6학년을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突山面) 율림리(栗林里)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朝鮮日本別國)', '일본(日本)놈 져라',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지광(朝鮮之光)'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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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연 묘
주재연(1929~1945)은 1943년 3월 여수군 돌산면 공립국민학교 제6학년을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突山面) 율림리(栗林里)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朝鮮日本別國)', '일본(日本)놈 져라',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지광(朝鮮之光)'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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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연준 순교기념비
손연준(1902~1950)은 손양원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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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순지비
임병찬(1851~1916) 의병장은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신이다. 39살에 낙안군수(樂安郡守)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에 의병장(義兵將) 최익현(崔益鉉)과 더불어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招募), 군량(軍糧)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洪州)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井邑), 순창(淳昌), 곡성(谷城)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陣容)을 정비하였다. 그 해 6월에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 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監禁)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은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 일제합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不服)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구축하려는 항일의병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 해 5월 일본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巨文島)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