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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화 집
권대화(1871~1909)는 권병안이라는 이명이 있으며, 전남 순천 사람이다. 의병으로 전남 순천(順天)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었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권대화는 무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전남 순천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중 1909년 6월 20일 전남 순천군(順天君) 쌍암면(雙岩面) 서변리(西邊里)에서 일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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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사현마을)
사현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장남현(1911~1947)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光州高普)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사건을 계기로 광주지역 학생들의 학생운동을 전개하자, 동년 12월 말 부산공립제2상업학교(釜山公立第二商業學校)에 재학 중이던 임기홍(林基弘)·문길환(文吉煥)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할 목적으로 항일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동월 말경 문길환의 고향인 경남 고성(固城)으로 내려가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대한동포여 들어라」,「피압박 민족 대중에 격(檄)한다」,「일본제국주의를 멸망시키라」,「총독정치에 절대 반대하라」 등의 격문을 작성하고 임기홍·문길환 등과 함께 별동대를 조직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1930년 1월 7일 밤, 광주학생항쟁에 동조 궐기해야 한다는 격렬한 요지의 격문을 부산2상(釜山二商) 전 학급, 전 학년의 책상마다 살포하였으며, 도립부산여고보(道立釜山女高普)에 들어가 격문을 투입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년 1월 19일 조선방직주식회사 직공들의 요구 관철을 위해 문길환 등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타도 일본제국주의」,「반대 조선총독부 정치」등의 전단을 작성하여 같은 달 21일 부산 시내에 약 150매를 살포하였다. 그 후 2월 9일 도참여관(道參與官)인 남궁영(南宮營)이 부산2상에서 광주학생운동을 왜곡되게 설명하고 일장 훈시를 하자, 퇴교 및 맹휴에 돌입하고 가두시위를 추진하였으나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1930년 7월 1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8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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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 묘
강진원(1881~1921)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구학문을 수학하며 배움에 열정을 보였다. 26살 때 스스로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황제가 퇴위되자 강진원은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강진원과 그의 동지들은 여러 전투에서 노력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전라도 일대에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의병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의병항쟁이 쇠퇴하면서 강진원의 의병진도 활동을 중단하고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결국 그는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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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화 일가 구 충효비, 추모비, 동상
권대화(1871~1909)는 권병안이라는 이명이 있으며, 전남 순천 사람이다. 의병으로 전남 순천(順天)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었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권대화는 무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전남 순천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의병활동 중 1909년 6월 20일 전남 순천군(順天君) 쌍암면(雙岩面) 서변리(西邊里)에서 일병에게 붙잡혔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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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한 추모비
조경한(1900~1993)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1900년 순천군 주암면 한곡리 한동마을[현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만주[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단의 국내 연락원으로 참여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한족총연합회의 후신]를 모체로 민족주의 단체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홍진(洪震)[1877~1946]·지청천(池靑天)[1888~1957] 등과 함께 창당에 직접 참여하고, 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한중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1932년 쌍성보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중국 관내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조경한은 1933년 5월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내에 한국독립군 특별반이 설치되었을 때 교관이 되었다. 1937년 8월 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운동 연합 단체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운영 간부로 선임되었다. 1939년 말부터 1942년 10월경까지 사이에 중국 중앙 전시 간부 훈련(中央戰時幹部訓練) 제4단(第四團) 특과 총대 학원대 한청반(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의 군사 교관으로 있었다. 1940년 5월 9일에 통일된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의 일원이 되었다. 또 1939년 11월부터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설기구 선전위원회[주임위원 조소앙]의 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과 함께 주계장이 되었고, 1940년 10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처장[정훈처장 겸임]에 선임되었다. 1942년 10월 30일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3분과[재정·예산 결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3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4월 20일 국무위원으로 당선 취임하였다. 조경한은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3년 1월 서울특별시에서 타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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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죽림마을)
죽림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조기섭(趙璣燮,1858~1958)은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은 1912년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고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어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치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조기섭은 대한독립의군부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임병찬과 함께 뜻을 같이 하고자 결의하고 대한독립의군부 순천군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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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율지마을)
율지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염현두(1870~1933)는 1919년 3월 2일 밤 전남 순천군(順天郡) 순천면(順天面) 저전리(楮田里) 천도교(天道敎) 교구소(敎區所)에서 천도교인 김종웅(金鍾雄) 등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가지고 온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 등을 천도교 동지들과 함께 받아 보았다. 김종웅 등은 이것은 서울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송부해 온 조선독립선언서인데 밤에 관공서 등 사람 눈에 띄기 쉬운 게시판에 부착하라고 전달하며 당시 순천교구장 대리인 강형무(姜瑩武)에게 35매를 교부하였다. 이날 밤 강형무는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다수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와 동지들에게 각자 부칠 구역을 정하고 다시 이를 교부하였다. 염현두는 이날 모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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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기 집
서정기(1897~1964)는 전라남도 순천(順天)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부터 4월 25일에 걸쳐 출판을 통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그는 당시 중앙학교(中央學校) 4년생으로 4월 1일 이춘봉(李春鳳) 및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3년생인 장용하(張龍河)와 함께, 자기집에서 등사판으로 「반도의 목탁 제1호」라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유인물 100여 매를 인쇄하여 서울 안의 각 가정에 배포하였다. 또 4월 12일 자기 집에서 이춘봉·장용하와 함께 「반도의 목탁 제2호」 100여 매를 인쇄하여 각 가정에 배포하였고, 이튿날 역시 자기 집에서 이춘봉·장용하·염형우(廉亨雨)와 함께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 이래의 갖은 수난과 압박을 폭로하는 8매에 달하는 유인물 20여 부를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22일에도 자기 집에서 이춘봉 등과 함께 「반도의 목탁 제3호」 100여 매를 인쇄하여 배부하였고, 25일에는 「반도의 목탁 특별호」라는 이름으로 서양인들이 조선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70여 매를 등사하여, 배부하는 등 출판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 해 11월 24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1년 일본 명치대학(明治大學)에 유학 중,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단체인 재일본 조선유학생동맹(在日本朝鮮留學生同盟)을 조직하여 부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에는 북간도(北間島)에서 김창진(金昌珍) 등과 그 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길림성(吉林城)에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신의주(新義州)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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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한 조옥현 집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백강 조경한 선생과 아우이며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한 우청 조옥현 선생의 생가이다. 조경한 선생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238번지(한동마을)에서 옥천조씨 20세 우곡 조정순 선생과 고령신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차남(백강 조경한 : 1900~1993)으로 태어났다. 장남 벽하 조태현(1898~1970), 삼남은 제헌국회의원 우청 조옥현(1903~1950.6. 납북), 사남은 조규현(1905~1950)이다. 조경한 선생은 1915년 동래 정동현 여사와 혼인하여 1924년 한곡리 224번지(남측 건너편)로 분가 시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조경한(1900-1993)은 1918년에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의 국내지하공작단원으로 항일운동을 활발히 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장례)일에 수많은 주암면민의 애도회를 선생이 주도하여 광천소재 도리봉산에서 거행하였다. 1927년 2월 중국 망명길에 올라 그해 5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만주)에 도착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만주지역에서 왜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회 하였는데, 특히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과 쌍벽을 이루는 큰 전투였다. 1933년 연말부터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로 옮겼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과 광복군 창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백범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귀국시까지 임시의정원(현 국회)의원, 비서처 부비서장, 국무위원(비서장 겸임)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옥현(1909-1940)은 1927年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생으로 수학하면서, 신간회(新幹會) 교토지회[京都支會] 재정부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또한 재일본조선청년동맹과 문화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여름방학 때 귀국하여 재외영광유학생학우회(在外靈光留學生學友會)의 일원으로 전남 영광(靈光)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순회강연을 하다가 20일간 구류된 일이 있었다. 1929년 3월 교토[京都]에서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동지 규합에 힘을 쏟다가 체포되어 1931년 5월 징역 2년을 받고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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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준 집
성동준(成東準, 1912~1980)은1944년 일본구주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학병으로 동원되었으나 중국 소주에서 김영남 등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일본군 60사단을 탈출하였다. 제3전구 충의구국군사령부에 도착하여 미국 고문관에게 일본군 문서와 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사실은 3전구 사령부에 보고되어 전선일보(戰線日報)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구국군 정치부 대일선전과에서 박 영과 함께 선전활동을 전개하다 광복군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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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홍 집
독립운동가 문경홍(1863~1932)은 1919년 3월 2일 순천 저전리 교구소에서 천도교인 김종웅 등이 남원으로부터 가져온 조선독립선언서를 천도교인들과 함께 받았다. 김종웅은 강형무에게 조선독립선언서를 35매를 건네주고 관공서 등 사람 눈에 띄기 쉬운 곳에 부착할 것을 전달하였다. 강형무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김희로, 염현두, 윤지환, 윤상윤, 문경홍과 함께 여러 곳에 독립선언서를 붙였다. 이 일로 문경홍은 체포되어 1919년 4월 26일 순천구재판소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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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동 집
박순동(1920~1969)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학병으로 미얀마 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미군 첩보요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미군포로수용소 시절「자유한인보(自由韓人報)」를 발간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박순동은 1945년 3월 학병으로 미얀마 쿰(Kume)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4월 경 동료 이종실(李鍾實) 등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하여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대일항전을 자청하였고, 이에 따라 인도내에 있던 미군 OSS에 넘겨지게 되었다.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같은 해 5월 OSS의 특수공작인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하였다. 냅코작전은 '한국 내에 당장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하고 사보타지와 무저항운동으로 이어갈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군의 국내 침투작전으로, 이를 통해 2300만 한국 국민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특수훈련이 끝나면 각각 5∼10명의 공작조로 나뉘어 서울, 평양, 평남의 농촌지역 등 국내 각지에 침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이들은 OSS의 첩보요원훈련(諜報要員訓練)을 받기 위해 미서부 산타카타리나 섬으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6월부터 OSS의 냅코작전을 위한 첩보활동, 태업선동, 무선연락 등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나, 태평양전쟁의 종전으로 말미암아 참전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