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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하송마을)
하송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순천의 유림지사로서 1906년 최익현이 호남에서 거병할 때 의병이 참여하였던 김종주는 유흥주, 배형주, 배윤주, 박태문, 김선제 등과 같이 1919년 4월 13일 낙안 장날에 독립 만세 시위를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들은「조선독립」, 「대한독립」이라고 쓰인 2개의 대형 깃발을 가지고 읍내 서문 밖으로 나가 150여 명의 시위 군중들과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 안으로 행진하였다. 일본군의 제압으로 김종주, 유흥주는 부상당한 채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각각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배형주, 배윤주, 박태문은 순천구재판소에서 보안법 및 공무집행방해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김종주, 유흥주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배형주, 배윤주, 박태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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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규 묘
안상규(1890~1973)는 전남 순천(順天) 사람이다. 1919년 4월 14일 보성군(寶城郡) 벌교면(筏橋面)에서 안응섭(安應燮)·전호규(田戶奎) 등 33명의 동지들과 같이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벌교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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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주 묘
유흥주(1870~1952)는 전남 순천 사람이다. 1919년 4월 13일의 낙안읍(樂安邑) 장날을 이용하여 김종주(金鍾胄)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정오경 호남유사(湖南有司)를 지낸 애국 유림지사 김종주와 함께, 자신이 직접 「조선독립기」·「대한독립기」라고 쓴 2개의 대형 깃발을 만들어 읍내 서문 밖으로 나갔다. 이날은 마침 장날이어서 박태문(朴太文)·배윤주(裵潤柱)·배형주(裵炯柱)·김선제(金善濟) 등 1백 5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그는 김종주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 제의가 있었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국내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리고 이곳에서도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군중이 적극 찬성하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서문 안으로 시위행진하였다. 당시 서문 안에서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 2명의 보초를 밀어내고 시위군중은 서문으로 들어갔다. 일본 헌병과 보병 6명이 총검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무력을 행사하니, 그는 이때 일본 헌병과 보병에게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으며 시위하다가 일본 군경이 휘두른 총검에 부상당한 몸으로 체포되었다. 결국 그해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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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주 묘
유흥주(1870~1952)는 전남 순천 사람이다. 1919년 4월 13일의 낙안읍(樂安邑) 장날을 이용하여 김종주(金鍾胄)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정오경 호남유사(湖南有司)를 지낸 애국 유림지사 김종주와 함께, 자신이 직접 「조선독립기」·「대한독립기」라고 쓴 2개의 대형 깃발을 만들어 읍내 서문 밖으로 나갔다. 이날은 마침 장날이어서 박태문(朴太文)·배윤주(裵潤柱)·배형주(裵炯柱)·김선제(金善濟) 등 1백 50여명의 군중이 모였는데, 그는 김종주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 제의가 있었으며 서울을 비롯하여 국내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리고 이곳에서도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군중이 적극 찬성하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서문 안으로 시위행진하였다. 당시 서문 안에서 수비하고 있던 일본군 2명의 보초를 밀어내고 시위군중은 서문으로 들어갔다. 일본 헌병과 보병 6명이 총검을 휘두르며 마구잡이로 무력을 행사하니, 그는 이때 일본 헌병과 보병에게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으며 시위하다가 일본 군경이 휘두른 총검에 부상당한 몸으로 체포되었다. 결국 그해 6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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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래 기적비
박항래(1861~1919)는 전라남도 순천(順天) 사람이다.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조국광복을 위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파리 강화회의의 내용과 서울에서 거사된 독립선언식 및 독립만세시위에 대하여 전해 듣고, 순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7일 오후 1시경, 마침 순천읍 장날이어서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그는 백지 1장을 사 가지고 남문 누상(南門樓上)에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와 정당성을 연설한 뒤, 백지를 흔들며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남문 부근에 모여있던 수백 명의 시위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회창하여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만세소리로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헌병이 와서 그를 잡아가자, 그는 의연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결국 그해 4월 26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10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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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용암마을)
용암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박항래(1861~1919)는 전라남도 순천(順天) 사람이다.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조국광복을 위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파리 강화회의의 내용과 서울에서 거사된 독립선언식 및 독립만세시위에 대하여 전해 듣고, 순천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4월 7일 오후 1시경, 마침 순천읍 장날이어서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그는 백지 1장을 사 가지고 남문 누상(南門樓上)에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와 정당성을 연설한 뒤, 백지를 흔들며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남문 부근에 모여있던 수백 명의 시위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회창하여 장터는 삽시간에 독립만세소리로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헌병이 와서 그를 잡아가자, 그는 의연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결국 그해 4월 26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징역 10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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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추동마을)
추동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박병두(1883~1936)는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전남 순천군(順天郡) 서면청년회(西面靑年會) 부회장, 순천군농민연합(順天郡農民聯合) 집행위원 등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친일적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 및 소작권 이동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여수(麗水)·광양(光陽)·보성군(寶城郡)의 농민운동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남선농민연맹(南鮮農民聯盟)을 조직하고 선전부 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순천 지역 농민·청년운동을 주도하다가 1924년 일경에 체포되어 상당한 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순천군수가 향교 토지에 무리한 소작료를 징수하고, 일제의 농업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농민들에게 횡포를 부리자 농민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박병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순천지역 책임자로 일제의 지배체제를 배척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26년 6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전남순천농민조합(全南順天農民組合) 위원장을 맡아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두 차례 검거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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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 순의비
강진원(1881~1921)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구학문을 수학하며 배움에 열정을 보였다. 26살 때 스스로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황제가 퇴위되자 강진원은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강진원과 그의 동지들은 여러 전투에서 노력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전라도 일대에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의병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의병항쟁이 쇠퇴되면서 강진원의 의병진도 활동을 중단하고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결국 그는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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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 독립운동가 공훈비 표지석
강진원(1881~1921)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구학문을 수학하며 배움에 열정을 보였다. 26살 때 스스로 서당을 열고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황제가 퇴위되자 강진원은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강진원과 그의 동지들은 여러 전투에서 노력하며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몇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며 전라도 일대에 그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1909년 일제의 의병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의병항쟁이 쇠퇴되면서 강진원의 의병진도 활동을 중단하고 은거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결국 그는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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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각자
이범진(1852~1911)은 함경남도 사람이다. 그는 18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에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농상공부대신서리가 되어 친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친로파로 지목되어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에 춘생문사건을 일으키는데 주역이 되었다가 실패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였다. 이범진은 을사조약에 통분하여 일제의 소환에 불응하고 양국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계속 러시아 수도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밀사로서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로 임원 겸 통역으로 동반케 했으며,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면서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케 하고,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 밀사 파견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8년에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내었으며, 1909년에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계동학교(啓東學校), 세동학교(世東學校), 신동학교(新東學校)를 통합하여 큰 규모의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설립할 때에도 1천 루블을 보내어 교포들의 교육 구국운동을 지원하였다.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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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평촌마을)
평촌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이 마을 출신인 오윤칠(1878~1909)은 1908년 전남 보성군 북내면에서 거병한 안규홍(安圭洪) 의병 진영에 들어가 파청(巴靑).진산(眞山) 등지에서 1909년 7월 안규홍 의병 진영이 해산될 때까지 항전하였다. 1909년 7월 전남 함평군 송광면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12명의 의병과 함께 활동하다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하여 함평군 대화면 이교리 홍정에서 격전을 펼치던 중 체포되어 1909년 9월 12일 일본 군인에게 불법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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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칠 집
김기칠(1907~1965)은 1944년 6월 상순 하동순호(河東淳浩), 동년 4월 14일 광산치홍(光山治洪), 동년 9월 1일 박성춘근(朴城春根) 등에게 “일본이 점령한 싱가폴을 미영군이 재탈환하여 일본군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 지원병제를 선포하고 훈련을 시키고 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징병제를 선포할 것이며 싱가폴을 재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전쟁 중에 있으며 기회가 오면 일본인에게 역습을 가하고 죽창 등을 갖고 관청을 습격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유포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44년 10월 9일에는 전남 화순군(和順郡) 도암면(道岩面) 원천리(源泉里)에서 일본의 패전에 대한 시국담과 징병제에 대한 문제를 주위 사람에게 유포하였다. 이로 인해 김기칠은 일경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