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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현 사적비
임정현(1874~1909)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그의 고향 보성은 호남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이 의병을 일으켜 후기 의병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여러 전투가 전개되었던 고장이다. 당시 의병운동의 양상은 전기 의병운동이 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에 반해 서민 의병장이 배출되는 등, 대중적 운동으로 심화되어 발전되어 가고 있었다. 임정현 역시 일반 서민으로서 지연과 신분적인 유대감에서 안규홍의 의진에 입대하여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다. 임정현은 당시 염재보(廉在輔)·이관회(李貫會)·임병국(任秉國)·정기찬(鄭基贊)·장재모(張載模)·송경회(宋敬會)·임덕호(任德浩)·안택환(安宅煥)·소휘천(蘇輝千)·오주일(吳周一)·나창운(羅昌運)·박제현(朴濟鉉) 등으로 구성된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 일제가 안규홍 의진을 섬멸하고자 작전을 전개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수색 노선에 미리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을 궤멸시킨 파청대첩(巴靑大捷)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전개된 진산대첩(眞山大捷)과 운월치(雲月峙)전투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또한 8월에는 원봉산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 주둔소 야습에 참여하여 50여명의 적을 사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8년 10월 9일 순천(順天) 병치( 峙)에서 일군과 교전 중에 유격장 안택환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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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 묘
안규홍(安圭洪, 1879~1910) 의사는 1879년 4월 10일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안달환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담살이(머슴)로 모친을 극진히 봉양한 효자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70여명의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보성, 순천, 여수, 곡성, 구례 등지에서 맹활약을 하다가 토벌대가 대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압축해 오자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어 한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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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규 추모비
박창규(1880~1973)는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고 인적·물적자원을 강제로 수탈하는 한편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 등 한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향인 전남 보성군에서 기독교 교회 전도사로 있던 그는 1940년 4월 신도 30여명에게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여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강력히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소위 일황불경죄 및 일본국체변혁 선동혐의로 일경에 붙잡혀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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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원터 기념비
양정원터는 학산(學山) 윤승원(尹承遠) 선생은 1939년 4월 12일 이곳에 민족, 자주교육의 요람인 양정원을 세워 일본 관헌의 갖은 박해와 억압을 무릅쓰고 우리 역사와 한글을 가르치며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병들고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와 의약품을 나누어 주었으며, 흉년에는 해조류를 식량 대용으로 나누어 주어 고통을 같이 하였다. 야학의 문도 활짝 연 이 양정원의 민족 교육은 초등에서 중등과정의 의무 교육으로 우리 민족사와 교육사에 큰 뜻을 가지고 있다. 보성, 장흥, 강진, 영암, 완도, 고흥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배출된 인재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 민족교육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250여 명의 재학생을 기반으로 양정원이 모태가 되어 1947년 4월 24일 보성 회천에서 국민학교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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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건수 위적비
정건수(1924~2002) 지사는 1943년 10월 중순 경,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당하여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지구(安邑地區)에 주둔하는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때,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일본군 병사로부터 전해듣고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1944년 11월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한 그는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고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光復軍 總司令部 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맡아 수행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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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추모비
정해룡(丁海龍, 1913~1969)은 1913년 7월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영성 정씨 종갓집의 종손으로 태어난다. 그의 집안은 봉강리에서 13대가 살아온 종가로 천석꾼 부자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정해룡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 거액을 기부하고, 양정원을 설립해 인재 양성을 하고, 독립자금을 만주에 전달하였다. 1934년에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인쇄소인 ‘보성인쇄소’를 차려 전남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한편, 그는 구국에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교육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37년 그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민족 교육을 위해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 여러 차례 거액을 기부한다. 1938년 정해룡은 고향에 책과 학용품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는 무상교육기관 ‘양정원'을 설립한다. 윤윤기에게 양정원을 운영하게 하고, 회천면 주민 교육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제수 전예준도 폐교될 때까지 양정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42년 독립운동을 위해 울산 달천철장을 인수해 운영하고, 1944년에는 무장투쟁 단체를 만나러 만주에 다녀오다가 체포돼 4개월 간 옥고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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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제 집
김선제(1891~1959)는 1919년 4월 13일 낙안 장날에 김종주·유홍주·배형주·배윤주·박태문과 함께 장터에 모인 15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으로 진출하던 중, 일본 헌병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순천구재판소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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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3.1운동기념탑
안호형(1873~1948)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소식을 전해 듣고, 결사투쟁을 계획하고 이병채·안규휴·안주환·오병원·김규석(1880~1941)·김종주 등과 함께 도란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또한 이병채 등은 김규석을 비롯한 청장년 33인으로 이팔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하였다. 김규석 등은 4월 9일 벌교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투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9일 오후 1시 30분경 김규석 등 이팔사 대원들은 장좌리 아랫 시장에 모여 앞장서서 대한독립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4월 13일 도란사 결사대원들도 낙안읍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워 행진시위를 하다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시위가 중단되었다. 이 시위로 도란사, 이팔사 결사대원 27인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본 비는 1919년 4월 낙안 및 벌교장터에서도 도란사(桃蘭社), 이팔사(二八社) 등 구국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경찰에 피체된 애국지사 27인 등을 위시한 지역 주민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추진위원회가 1956년 2월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60-1번지(낙안민속마을 앞)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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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운동기념탑 비석
순천시 낙안면 서내리 80-1번지 낙안읍성 민속마을안에 있는 기념탑이다. 1956년 낙안초등학교(현 객사 앞 광장)에 건립되었던 것인데, 기존에 있던 이 탑이 작고 초라해서 1998년 2월에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269-3에 있는 3.1독립운동기념탑으로 이전 중건하였다. 이 탑은 이전되기 전에 있던 탑이다. 탑문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이신 연당 이갑성 선생이 쓰신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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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신기마을)
신기마을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1919년 4월 30일 순천 낙안 동초 신기마을에서 강정수, 전평규, 전인채, 안용갑, 안응섭 등 청장년 33명은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다짐하는 2.8사(二八社)를 조직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서약하였다. 장날 장좌리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던 중 체포되어 순천구재판소에서 강정수, 전인채는 6월 형을 선고 받고 전평규는 10월 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전평규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전인채, 강정수는 1992년, 1993년에 각각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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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태 묘
신종태(1890~1968)는 전남 순천(順天) 사람으로, 이명은 신용석이다. 1919년 4월 3일 순천군 동초면(東草面)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전평규(田平奎) 등 33명과 위친계를 조직하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4월 9일 보성군(寶城郡) 벌교면(筏橋面) 벌교리(筏橋里) 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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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이곡마을)
이곡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안운수(1882~1973)는 전남 순천(順天) 사람으로, 본 안내판이 놓인 지역 출신이다. 1919년 4월 14일 보성군(寶城郡) 벌교면(筏橋面)에서 안응섭(安應燮)·전호규(田戶奎) 등 33명의 동지들과 같이 결사단을 조직하여, 제2조장으로서 시위 책임을 맡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준비한 후, 벌교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