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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엽 기념비
추기엽(1879~1909)은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7년 전북 익산(益山) 지방에서 윤현보(尹賢甫)·이봉오(李奉五) 등과 함께 황준성(黃俊性)을 의병장으로 삼아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그 뒤 1908년 3월 3일 유형(流刑) 10년을 언도받고 전남 완도(莞島)에 유배되어 있던 중 황준성·이봉오 등과 함께 탈출, 해남(海南)·영암(靈巖) 등지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황준성이 미황사(美皇寺)에, 황두일(黃斗一)이 대흥사(大興寺)에 각자 의소(義所)를 설치하였을 때 그는 대둔사(大屯寺)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이후 1908년 8월부터는 해남·영암 등지에서 150여명의 부하 의병을 이끌고 육지와 해상에서 일군과 대소 40여 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1909년경 부하 6명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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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기 의병 전적지비
양상기는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의 아들로서 부자가 함께 항일의병전쟁에 투신 1909년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희생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그는 한국 진위대(鎭衛隊) 병사 출신으로 1907년 8월의 군대 해산으로 광주(光州) 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으나 부친 양진여가 의병장으로 항쟁하고 있었으므로 파면되었다. 일본 경찰조서에 따르면 "양상기는 1908년 4월까지 광주경찰서에서 순사로 봉직한 자이나 평소 결근을 임의로 하여 직무에 불성실한데다가 실부(實父)가 폭도수괴였으므로 4월 23일 순사를 파면하였다."고 하면서 파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양상기는 평소 실부 및 수괴 권택(權澤) 등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군 경험과 경찰관을 거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파면 즉시 80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양상기의 의병 항쟁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어 호남에서는 가장 강력한 부대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일본 경찰 조서에 나타난 활동 상황은 아래와 같다. 1909년 2월 9일 30명의 병력으로 담양군 우산면 신기리 거주 안판구로부터 군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군 지곡리 거주 김 모씨를 비롯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거출하였다. 1909년 2월 26일, 동복군 외남면 동천동에서 다시 군자금을 거출하였으며, 같은 달 담양군 서기 한응길을 체포하고 군자금을 제공케 하였다. 이밖에도 양상기를 강도범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일본경찰의 취조서는 1909년 4월 패전하기까지 금품갈취의 행적으로 왜곡하고 있으나 일경에서의 그의 언행은 의병장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확고한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즉 그는,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 고 의병 동기를 밝히고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침략자와 싸우겠다." 이처럼 의병장으로서 끝까지 항일의지를 밝힌 양상기는 광주·동복·담양·장성·창평 등지에서 수없이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마침내 1909년 4월 담양군 정면 덕곡리에서 패전하고 체포되었던 것이다. 1910년 대구형무소에서 소위 내란·폭동 등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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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수북면)
담양지역에 언제 동학이 전파되고 동학에 입문한 사람들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담양이 전라도지역에서 가장 먼저 동학을 받아들인 남원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1891년 이전에 담양에 동학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담양 농민군의 동학 세력은 임실, 태인, 남원에 뒤지지 않았다. <천도교회월보 환원록>에 의하면 1892년에는 담양면 백동리(栢洞里) 김학원(金學元)과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 추병철(秋秉哲)이 입도했다. 1894년에는 용면(龍面) 복용리(伏龍里) 전오봉(全伍奉)과 수북면(水北面) 남산리(南山里)의 황정욱(黃正旭), 송구진(宋樞鎭)이 입도했고 1889년에는 고서면(古西面) 보촌리(甫村里) 최수선(崔洙善)이 입도했다. 1894년에는 남응삼(南應三, 南周松), 김중화(金重華), 이경섭(李璟燮), 황정욱(黃正旭), 윤용수(尹龍洙), 김희안(金羲安), 이화백(李和伯) 등 접주들이 기포(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했다. 전북이 동학농민혁명의 근원지였다면 전남은 껴져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항쟁지였다. 담양은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옥과, 구례와 함께 농민군들의 배후 지원 장소였다. 또한 위기 때마다 전투력을 보강시켜주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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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희 추모비
신용희(1874 ~ 1907)는 전남 담양(潭陽) 사람으로서 을사조약 늑결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는 즈음인 1906년 6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擧義)한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에 가담하였으나 순창(淳昌)까지 진격한 뒤 의진이 곧바로 와해되어 항전이 종료되었다. 그 뒤 기삼연(奇參衍)이 1907년 9월 전남 영광(靈光)의 수록산(隨綠山)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고 의진을 조직, 창의대장이 되자 여기에 참가해 항전을 벌여 나갔으며 1907년 9월 10일 장성(長城)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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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의병 전적지비
기삼연(1851 - 1908)은 개항기 때, 호남 창의회맹소의 대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를 맹세하고 장성에서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해 광산(光山)에서 거의(擧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해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 · 부안 · 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이어 12월에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00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해 불태웠다. 그리고 그 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전세가 달라지자 전투 양상을 바꾸어 소단위로 나누고 유격전으로 돌입하였다.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의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해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 명이 돌입해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해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했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 의병은 김준 · 이석용(李錫庸) · 김용구(金容球) 등이, 김준이 순국한 다음에는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에 재편성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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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묘
김용규(1898 ~ 1924)는 전남 광주 사람이다. 1919년 일제강점기 3월경 광주 남문로일대에서 독립선언문 독립가 등 수천통 인쇄하고 일제강점에 저항 만세시위를 주도 고창하면서 인쇄물을 반포하며, 도민에 독립운동참여를 권유하는 등 3.1독립운동과 일제에 대한 항거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았다. 이날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곧바로 몸을 숨겨 일경에 체포되지 않았지만,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 궐석(闕席)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그후 1923년경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9년 8월 15일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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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집, 사당(포의사)
녹천 고광순은 담양 창평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을 당하자,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나주공관에 본영을 두고, 기우만은 우도의병대장에, 고광순은 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적을 토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宣諭)가 있어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더욱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1906년 말에 다시 의진을 구성하여 남원에서 거의한 양한규(梁漢奎)와 합세하여 남원성을 공격하였으나, 양한규가 전사함에 일단 창평으로 회군하였다. 진용을 정비한 후 능주성을 함락하고 구례의 연곡사(燕谷寺)에 본영을 정하였다. 이곳에서 맹훈련을 한 후에 화개동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하동, 순천의 적군과 연합하여연곡사를 완전 포위하고 맹사격을 가해오니 불의의 습격을 받은 고광순 이하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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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사적비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 의병장은 담양 창평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을 당하자, 기우만(奇宇萬)과 같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나주공관에 본영을 두고, 기우만은 우도의병대장에, 고광순은 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적을 토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의병을 해산하라는 선유(宣諭)가 있어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더욱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1906년 말에 다시 의진을 구성하여 남원에서 거의한 양한규(梁漢奎)와 합세하여 남원성을 공격하였으나, 양한규가 전사함에 일단 창평으로 회군하였다. 진용을 정비한 후 능주성을 함락하고 구례의 연곡사(燕谷寺)에 본영을 정하였다. 이곳에서 맹훈련을 한 후에 화개동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하동, 순천의 적군과 연합하여연곡사를 완전 포위하고 맹사격을 가해오니 불의의 습격을 받은 고광순 이하 모두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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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 표지석(창평면)
창평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과정이나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890년을 전후한 무렵, 이웃한 남원 등지를 통해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교조신원운동 시기에도 창평지역 교도들의 참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동학사』에 따르면 제1차 기포시에 창평에서 백학, 유형로 등이 기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김낙철역사」에는 강재정(姜在貞)이 창평의 두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차 기포 당시 창평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확인되지 않으며, 집강소 시기에는 남원에 웅거하던 김개남의 세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월 3일 대위 모리오 가이찌(森眉雅一)가 이끄는 일본군과 이규태가 이끄는 경군이 담양부에 도착하면서 담양 일대의 농민군에 대한 진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창평에서도 농민군 지도자 한충상(韓忠相)이 12월 6일 체포되었고, 농민군 백처사(白處士)·조공서(曺公瑞)·장영옥(張永玉)·하재원(河在元)·김봉철(金奉哲)·백준수(白俊水)·한성옥(韓成玉)·원만석(元萬石)·이석용(李石用)·강판석(姜判石)·정영운(鄭永云) 등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창평현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죄의 경중을 가려 처리하도록 하였다. 또 담양에서 놓쳤던 농민군 가운데 용구동의 우두머리 김형순(金亨順)·김문화(金文化)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창평(昌平) 용구산(龍龜山)에 은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담양부의 수성군을 출동하여 연일 용구산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우두머리들이 백양사(白羊寺) 등지로 도주하였다. 기념비에는 “12월 6일 접주 한충삼을 총살하고 백처사(白處士), 조공서, 장영옥, 하재원, 김봉철, 백준수, 정영운은 체포 투옥되었다”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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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목포지회 활동사적지 표지석
신간회 목포지회 활동의 터전(목포청년회관)으로서 1927년 6월 18일 설립된 일제 강점하 국내 최대 항일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목포지회가 활동한 곳이다. 신간회는 1927년에 민족주의 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독립의 뜻을 모아 만든 사회단체이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합법적인 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일제의 탄압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1931년에 해체되었다. 그 중에서 목포지회는 강연회․정기대회.시민대회 추진, 하의도 농민운동 지원, 재만동포 탄압 규탄 등을 통해 항일 의식 고취와 민족협동전선 형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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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세 순교비
박연세(1883~1944)는 전라북도 김제(金堤) 사람으로서 1919년 3월 5일에 전개된 군산(群山)의 독립만세운동을 김병수(金炳洙)·이두열(李斗悅) 등과 함께 계획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매를 전해받고, 군산에서 활동하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 학생인 김병수가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주면서부터 계획되었다. 당시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인 그는, 2월 26일 자기 집에서 김병수를 비롯하여 동료교사인 이두열·김수영(金洙榮)·고석주(高錫柱)·김인묵(金寅默)·이동욱(李東旭)·김윤실(金允實)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군산 장날인 3월 6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5일 오전 수업을 마칠 무렵, 시위계획을 눈치챈 군산 경찰서에서 이두열·김수영과 함께 강제로 연행되었다. 비록 김윤실 등에 의하여 예정일을 하루 앞당겨서 만세시위는 전개되었지만, 그는 이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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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교회 3.1운동만세시위지
목포의 4.8독립만세운동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 등이 주축을 이뤘다. 양동교회는 목포가 개항했던 1897년에,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는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이 세웠다. 당시 동경 유학 중이었던 유학생과 상인들을 통해 동경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목포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시기 양동교회 지하실에서 곽우영 장로를 비롯해 서기견, 서상봉, 서화일, 박여성, 강석봉, 양병진, 박복영 등 교인들은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격문, 독립신문 등을 만들며 만세운동을 모의했다. 일본경찰과 헌병은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고 8일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친다. 드디어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아침, 양동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기독교인들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로, 오재복, 이금득, 박상오는 북교초등학교로 각각 뛰어들었고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과 양동교회 교인들은 삽시간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시민들도 합세해 이들이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가 목포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후 정명여학교는 1921년 만세운동을 다시 펼쳐 많은 학생들이 옥고를 치렀고 1937년에는 영흥학교와 함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복교하였다.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 역시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목포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과 기독교인, 상인 등이 주도했으며 4월 8일 만세운동 이후 목포의 항일 정신은 일제 강점기 내내 저항과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