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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홍 묘
박내홍(1894~1928)은 서울 사람이다. 1920년대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결성하면서 천도교의 청년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3·1운동 이후 천도교의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조직해 갔는데 이 때 그는 천도교내 젊은 지도자로써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천도교측의 실무담당자 박내원(朴來源)을 후원하면서 만세운동의 조직과 자금에 대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측의 6·10만세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조선공산당과 협동전선을 형성하여 추진해 갔던 6·10만세운동에서 그는 배후 지원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천도교는 6·10만세운동에 필요한 전국의 조직망과 격문 인쇄 등을 맡는 등 만세운동의 대중 확산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발각 후 천도교측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도교 지도층의 6·10만세운동 관여사실을 숨겼으나, 실은 박내홍을 비롯하여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인 권동진(權東鎭)·이종린(李鍾麟)·박인호 등이 배후에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측의 인사들이 이러한 비밀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927년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가 창립될 때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신간회 결성에 크게 힘을 쏟았다. 신간회 창립 간사의 일을 맡았던 그는 1928년 10월 5일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단도를 든 괴한 서을봉에 피습당하여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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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동상
조소앙(1887 - 1958)은 파주 교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유학 시절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박달학원에서 청년 혁명가를 양성하였다. 1917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에 사회당을 창당하고, 1950년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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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의숙 표지석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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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해안초등학교)
홍순창(1904~1956)은 강원도 명주 사람이다. 1938년 양구의 매동공립소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일제의 한국병탄의 부당성과 일제 식민지정책 및 한국인교원에 대한 차별대우를 비판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8년 4월부터 1940년 2월까지 국사 시간에 일제의 왜곡된 교과서대로 수업을 하지 않고 한말의 항일투쟁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가르치는 등 독립사상을 배양하는 국사교육을 하고,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와 공출 등 식민정책을 비판하다가 1940년 3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41년 8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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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원주초등학교)
원주보통학교 학생운동지 1926년 6월 13일 원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순종황제 승하 후 망곡례 및 망곡제 등을 거행하기 위해 시위하고 동맹휴학을 한 곳이다. 원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1926년 5월 순종이 승하한 직후 학교 측이 휴교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맹휴학을 모의했다. 이로 인해 학교측은 1926년 5월 3일에 정식으로 망곡례(望哭禮)를 실시한 후 이틀간 휴교했다. 이후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평소 학생들의 신망을 받던 김용형(金容亨) 교사는 6월 13일에 서울의 인산과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주며 학생들의 궐기를 자극했다. 이에 6학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수업거부와 함께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일본인 교장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궁여지책으로 학교에서 망곡제를 거행했고, 학생들은 전원 등교하여 망곡례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교장은 문책받아 좌천되었고 김용형 교사도 전출되었다. 이후, 원주공립보통학교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1930년 1월에 상급생들이 동맹휴교를 계획하다 검거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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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인제초등학교)
3월 28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서 독립 유인물이 배포되고 약 1,0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8일 미명에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 각 곳에 ‘이번의 소요는 군수와 학교장 등의 설유에 기대할 것이 아니다. 각자 그 뜻하는 바를 향해 돌진하면 가능하다’는 독립만세운동을 격려하는 유인물이 붙여졌다. 또한 약 1,000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인제헌병분대 헌병들이 출동해 진압했고 춘천수비대 병력들이 응원대로 인제에 파견됐다. 4월 18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사전에 제지되었다. 4월 18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인제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인제헌병분대 헌병들이 사전에 탐지하고 출동해 제지함으로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했다. 서병선(1900~1973)은 강원도 인제 사람이다. 1919년 3월 중순 당시 인제군청에 재직 중 춘천에 있는 감리교회 목사 이병찬(李柄燦)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수십 매를 건네 받고 3월 29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인제군 인제읍내를, 이종근(李鍾根)은 합강리, 심한구(沈漢龜)는 덕산리, 이성종(李聲鍾)은 보통학교를 각각 담당, 군중동원의 책임을 맡아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한편 시위참여를 촉구하는 선전문을 각지에 붙이는 등 준비를 하다가 3월 27일 밤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6월 2일 경성지방법원 춘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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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철원초등학교)
철원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3월 10일·11일·18일에 전개된 철원읍 만세운동, 3월 12일갈말면 만세운동, 4월 8일내문면 만세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최병훈(崔炳勳)은 이웃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로에서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가져와 철원의 천도교인에게 전해 주었다. 천도교인들은 곧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 전원이 붙잡히면서 일단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뒤 기독교측에서 청년단원과 각 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3월 7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청년단측에서 서울의 정황을 살핀 뒤 전개하자고 주장하여 10일로 연기되었다. 3월 10일박연서(朴淵瑞) 목사를 중심으로 철원농업학교·보통학교 학생들과 교회·지방청년 등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추진되었다. 철원군청에서 합류한 뒤, 시위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나 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본헌병대로 몰려가 전날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오후 4시경 군청으로 몰려가 일본인 서무주임과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고, 또 윤태항(尹泰恒) 집으로 도망친 군수를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날 운동이 끝난 뒤에도 200여 명의 청년들은 철원역으로 행진하여, 마침 정차하고 있던 열차 안의 승객을 향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때 열차 안에 있던 조화벽(趙和璧 : 柳寬順의 올케)을 비롯한 승객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독립연설회를 개최하고,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을 찾아가 협박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3월 18일 이병준(李炳準)이 철원 장날을 이용하여, 수 백명의 천도교인을 주동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갈말면에서는 3월 12일신성규(申聖奎)·김칠룡(金七龍) 등이 1,0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주도하여 청양주재소와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때 면장 황희수(黃熙秀)도 대열에 합류하여 새벽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내문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최재명(崔在明)·재청(在淸) 형제 등 독검리 천도교인이 주동하여 4월 8일에 일어났다. 이때 모인 700여 명의 군중은 북창리의 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석교리 헌병파견대에서 헌병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자 해산하였다. 박용철(1904~197)은 강원도 철원 사람으로 1919년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경고문 및 호소문 등을 유인 배포하고 군청 앞 등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연소자이기 때문에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응렴(1900~1940)은 강원도 철원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군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지방청년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규정(李圭貞) 등과 함께 북간산(北看山)에 모인 250여명의 학생들을 지휘하여 거리로 나와 군중과 합세 철원군청 앞으로 몰려가서 만세를 불렀으며, 다음날인 3월 11일에도 군중과 함께 철원역앞 광장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4월 형과 벌금 20원(圓)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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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소양고등학교)
춘천공립농업학교의 제1차 동맹휴학은 1927년 9월 11일 학생들에 대해 전제적 구속과 민족차별적 발언을 한 일본인 교사 오카와[大川立七]의 배척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손의재(孫義在, 孫泰基)·박웅남(朴熊南)·장삼영(張三英)·홍완식(洪完植)·정재철(鄭在哲)·김윤옥(金潤玉)·김기영(金琪榮)·김중영(金仲榮) 등이 주동하여 교장인 시부다[澁田市造]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3일을 기한으로 정해 해답을 요구했다. 학교 측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9월 12일 3학년 학생들이 퇴학원을 제출하고 교내 농성 시위를 전개했고, 요선동 거리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학년생들도 이에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에 학교 측은 강경한 태도로 3학년 전원에게 퇴학 허가장을 발부하는 동시에 2학년 학생 중 주동 학생 2명을 퇴학시켰다. 사태 악화에 학부모와 졸업생들이 중재에 나서면서 동맹휴학은 10월 말에 일단락되었고 3학년 학생들은 다음해에 졸업했다. 그러나 새로 3학년이 된 학생들은 1928년 여름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 아직 남아 있는 오카와 교사 축출을 위해 또 다시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결국 학교 측과 도당국이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오카와는 면직당했다. 그 과정에서 7명의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1937년 6월 1일에 학생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일본인 교장 노나카[野中鼎]의 유임과 그를 모함한 교무주임 나카노[中野久雄]를 포함한 일본인 교사 4명의 배척을 요구하며 청평사에 들어가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6월 1일 새벽에 약 280여 명의 학생들은 농성지로 예정된 청평사로 출발했다. 이 농성을 주동한 학생들은 이준환(李俊桓)·반영균(潘榮均)·김창경(金昌卿)·정태화(鄭泰和)·이종엽(李鍾燁)·고광돈(高光敦) 등이었다. 이들은 학교측과 강원도 내무부 학무과에 '1. 노나카 교장의 유임과 나카노 교무주임의 축출, 2. 실습시간의 단축과 학과 이론의 확장, 3. 기숙사 급식 제도의 개선과 자율적 운영 방안'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동맹휴학은 춘천공립농업학교의 동맹휴학 가운데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학교, 경찰은 물론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학교 측은 경찰과 학부모를 앞세워 신분 보장을 약속하며 학생들을 회유했다. 학생들은 교무주임 나카노를 비롯한 기피 인물을 추방한다는 언약을 받고 전원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사흘 동안 농성을 벌였으나 학부모와 교사들의 회유와 설득이 계속되고, 주동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동맹휴학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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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춘천고등학교)
춘천고등보통학교 상록회 활동지는 1920~30년대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상록회의 활동지이자 3차에 걸쳐 항일 동맹휴학이 전개된 곳이다.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요구하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며 3차례에 걸쳐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1차 동맹휴학은 1926년 10월 4일에 2·3학년 학생 120명이 일본인 교무주임 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4명의 주동자가 퇴학처분을 당했다. 2차 동맹휴학은 1929년 5월 10일에 1·2학년을 중심으로 조선역사와 조선어문법의 교수(敎授) 등을 요구하며 계획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 6명이 정학처분을 당했다. 1935년 7월 4일에 일어난 3차 동맹휴학은 3·4·5학년생 250여명이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결국 일본인 교사는 사직했으며 24명의 학생이 징계를 당했다. 1937년 3월 14일에는 비밀결사인 상록회가 결성되었다. 창립 당시 회장은 조규석(曺圭奭), 부회장은 남궁태(南宮珆), 선전부장은 문세현(文世鉉), 조직부장은 이찬우(李燦雨), 서적부장은 백흥기(白興基), 회계는 용환각(龍煥珏)이 맡았다. 산하에 독서회를 두어 ① 회원으로서 자기 완성 ② 지도자로서 책임 완수 ③ 단결력 배양을 3대 강령으로 삼아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귀농운동 등을 전개했다. 춘천공립농업학교 독서회 등 춘천 지역 각 학교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갖는 등 이 지역 항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신북면 천전리에서는 농민단체인 수양단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가을 발각되어 1939년까지 졸업생과 재학생 137명이 검거되었다. 춘천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문세현(1917~1945), 백흥기(1920~미상), 용환각(1917~미상), 이찬우(1918~1983), 조규석(1918~1963)은 1937년 3월에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항일학생결사 상록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상록회는 신입회원을 가입시켜 회세를 확장하여 전교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록회의 주요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서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 회원은 졸업 후에도 그러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여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롭게 상록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상록회는 더욱 조직을 확대하면서 춘천농업학교의 독서회와도 연락을 통하였고, 졸업생들은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면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졸업생과 긴밀한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런데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자 전회원이 붙잡히게 된다. 이들은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이들 모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이찬우에게, 1977년에는 나머지 이들 모두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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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모곡초등학교)
1919년 9월에 남궁억(1863~1939)이 사재를 털어 홍천군 서면 모곡리(일명 보리울) 부근에 대지를 매입하고 남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건평 30평에 8칸짜리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교회 건물에 무인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0년 2월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아 4년제 보통학교 정도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9월 4년제 사립 모곡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주변의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자,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1922년 10월 100평의 새 교사와 기숙사를 건립하였다. 1925년 3월 6년제 사립학교(보통학교)의 인가를 취득하여 정식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24년 겨울에 역사교과서 『동사략』(4권)을 간행하고, 1929년에는 사화집(史話集)인 『조선이야기』(5책)를 저술하였다. 또한 국어와 역사 교육, 농촌을 잘 살게 할 수 있도록 실업교육을 시행하고, 독서회를 만들어 독서활동을 장려하였다. 그는 학교 실습지 500여 평에 무궁화 묘목을 기르고, 무궁화 묘목을 교회와 사립학교의 지우들에게 보급하였다. 그러나 1933년 11월 일제 경찰이 학교·교회와 청년들의 집을 급습, 남궁억과 교사, 그리고 마을청년 등 28명을 홍천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1933년 12월 모곡학교가 폐교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34년 3월 12명의 청년과 함께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7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9년 4월 5일 모곡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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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흉상
남궁억 선생(1863~1939)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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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3.1공원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정해경(1877~1926), 하돌임(이명 : 하영현, 1878~1919), 강승문(이명 : 강사문, 1893~1919)은 강원도 횡성군 횡성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일 하돌임과 강승문은 헌병들의 발포로 순국하였고, 체포된 정해경은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2014년 하돌임에게, 2010년 정해경에게 추서했고, 강승문에게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