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정태인 충절비
정태인(1874 ~ 1945)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전남 영암군(靈巖郡) 등지에서 의병 수십 명을 모아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나성화의진(羅成化義陣)과 연합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성화 의병장은 당시 심남일의진(沈南一義陣)의 후군장으로 활동했으며, 전남 무안(務安)ㆍ영암ㆍ남평군(南平郡)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였다. 이처럼 전라도 지역의 의병들이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다.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일제가 실시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 시기에 정태인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12월 24일 광주지방재판소(光州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태원 김율 집
김태원 선생(1870~1908)의 자는 태원이고 이명은 김준으로, 어린시절 유학을 배웠고 장사로 이름이 높았다. 25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가 귀가한 후 1896년 경기의병 의병대장 민승천의 선봉장이 되어 수원과 남양 등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다가 나주로 돌아왔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구국투쟁에 동참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7월 아우 김율 등 수 백 명의 항일의병을 거느리고 일본군대와 친일세력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7년 호남의병회맹소 기삼연 대장과 합류하여 장성과 법성포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 후 12월 나주 사호(지금의 광주시 사호동) 전투에서 일본군 200여명을 사살하고 담양 남면 무동촌 전투에서는 광주지구 수비대장 길전 부대를 전멸시키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1908년 3월 25일(음력 4월 25일) 어등산 전투에서 악전고투하다가 박산마을(지금의 광주시 박호동)에서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공훈 훈장이 추서되고 광주시 농성동에는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나주시 남산공원과 함평군 기산공원에도 충혼비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율(1882~1908)은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주에서 형인 김태원(金泰元;金準)과 더불어 거의한 뒤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분진(分陣)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같은 시기인 1906년 10월 5일 김율은 형인 김태원과 함께 나주에서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기삼연의 문하생으로, 1907년 9월 기삼연을 중심으로 김용구(金容球)·김태원·이석용(李錫庸)·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가담하여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태원과 함께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그곳 사창(社倉)을 점령하여 저장되어 있던 양곡을 압수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평(咸平) 순사주재소를 공격 점령하여 무기와 금품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월 22일에도 그는 기삼연 의병장과 합동하여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재차 함평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파다야(波多野) 순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붙잡혀 순국한 뒤, 그는 김태원과 함께 기삼연 의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며 광주 일원 곳곳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술로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는데, 특히 창평(昌平)에서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의 기병대를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3월 30일 그는 광산(光山)군 송정읍(松汀邑)에서 붙잡혀 4월 25일 전사한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도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정동근 추모비
정동근(1867~1945)은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경 뜻을 같이하는 김교락(金敎洛), 양재홍(梁在鴻), 문재교(文在敎), 김영하(金榮夏), 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이후 이들은 나주·함평(咸平)·화순(和順)·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 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권영회 충절비
권영회(1885 ~ 1910)는 전남 남평(南平) 사람이다. 1907년 6월 기삼연(奇參衍) 의병진에서 활동하다가 기삼연이 순국하자 동년 11월 심남일(沈南一) 의병진에 다시 들어가 구국 활동을 하였다. 1908년 3월 7일부터 10월까지 계속하여 전남 영광(靈光)·강진(康津)·장흥(長興)·남평 등 각군에서 5회에 걸쳐 일본헌병 및 순사대와 결사적으로 전투하였다. 동년 10월 조경환(曺京煥) 의진의 참모로 12월경까지 총기를 휴대하고 함평(咸平)·광주(光州) 등지에서일본 헌병대와 4회에 걸쳐 전투하였다. 동년 12월 박민홍(朴珉洪) 의병진이 40여정의 총기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할 때 부하가 40내지 50여명이 되자 이곳의 참모장이 되어 함께 나주(羅州)·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2회에 걸쳐 전투하였다. 1909년 1월 2일에 휘하 40여명의 의병과 함께 무안(務安) 읍내에서 순사 함필영의 숙소를 포위 공격하여 순사제복 및 대검 등 20여점을 노획하고 함필영(咸弼永)을 사살하였다. 동년 2월 1일 이후 행적을 감추고 있다가 구세군(救世軍)의 부위(副尉)가 되었으나, 동년 9월 25일 장흥군(長興郡) 눌양리(訥陽里)에서 일군에 의해 붙잡혔다. 1910년 4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동년 5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6월 11일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으며, 동년 7월 1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
조정인 집
조정인(1872 ~ 1909)은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이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더 이상 일제의 만행과 내정간섭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1907년 12월 6일 호남의병장 김태원(金泰元, 金準)·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총기 4백여 정으로 무장시켜 헌병대 및 경찰과 접전을 전개하여 크나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나주 가산(佳山)에서 의병 심수근(沈守根)과 함께 의병운동에 사용할 탄약을 제조하던 중에 일본 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그후 광주지방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구복심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다시 대심원(大審院)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어 1909년 1월 18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나주 항일학생운동 유적지 표지석(나주성북동우체국 옆)
나주 항일 학생운동 유적지로서 1892년 11월 27일 정오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들과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250여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이날의 시위는 학생시위가 전남 각지로 확대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
조기보 추모비
조기보(1854 ~ 1908)는 1854년 10월 7일 아버지 조달용(趙達湧, 1838. 12. 8 ~ ?. 5. 26)과 어머니 광산 김씨(1841 ~ ?)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심남일 의병진에 입대하여 활동하다가, 그해 8월 1일 전라남도 영암군 금마면 반계리 반치(盤峙)[2]에서 일본군과 교전 끝에 전사하여 현장에서 순국했다. 1946년 전라남도지사 최영욱(崔泳旭)으로부터 표창장이 추서되었고,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 1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나성화 기적비
나성화(1881 ~ 1910)는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07년 박영근(朴永根)·유종환(兪鍾煥)과 함께 나주(羅州)에서 기의한 그는 1908년 2월에 심남일(沈南一) 의진의 후군장으로 총기 40여정으로 무장한 40여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무안(務安)·영암(靈岩)·남평(南平)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였다. 그리고 1909년 7월에는 사초십장(四哨什長) 정낙중(鄭洛中) 등 20여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일인 율산학길(栗山鶴吉)을 총살하였으나, 1909년 일군에 붙잡혀 광주(光州)로 이송 도중 일군 2명을 때려눕히고 탈출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기념비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산 27-5에 위치한 나주궁삼면 항일 농민운동 기념비는 1991년 11월 5일에 나주궁삼면 항일농민운동기념사업회의 주체로 건립됐다. 나주 궁삼면은 19세기말 경선군의 궁터가 있었던 나주군 지죽면(현 세지면), 욱국면(현 왕곡면), 상곡면(현 가야동)을 이르는 말이다. 이 땅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가뭄으로 세금을 내지 못하자 이를 대난해 주겠다고 속여 토지를 수탈해 감으로써 농민들의 항거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지만, 땅은 결국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가고 말았다. 농민들은 이 땅을 찾기위해 법정싸움을 계속하면서도 항일농민운동으로 발전시켜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이 된 이후에도 땅을 돌려받지 못하고 다시 돈을 주고 사야했던 고통이 있는 뒤에야 이 농민운동은 마무리되었다. 건립취지는 1908년 식민지 치하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수탈 대항, 36년 동안 가열찬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온 궁삼면(現영산포,세지,왕곡,다시,봉황면) 농민들의 구국정신의지를 기리기 위하여 궁삼면 항일농민운동 기념사업회가 지역 주민들의 1천만원에 달하는 성금을 토대로 전남도와 나주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건립했다.기념비의 전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농민항일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인 궁삼면 농민들의 항일투쟁 역사가 담겨져 있다.
-
궁삼항일농민운동공적비
1888년부터 1889년까지 영산강 유역인 지죽, 욱곡, 상곡 등 3개 면에서 가뭄으로 인한 농작물 실패로 약 4만5000두락의 농토를 소유하던 1400여 명의 농민 중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게 된다. 그 중 한 농민인 경저리 전성창은 세금을 속여 대납했다 속이며 이 땅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주인 없는 전답에 이르러 약 1100여 두락의 토지를 강탈한다. 1894년, 채규상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토지가 되찾기 시작되지만, 1897년 토지환부판결로 인해 다시 토지를 잃게 된다. 이후 전성창은 반대하는 면민들을 포박하고 구타하여 4만5000두락의 농토를 또다시 약탈한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가 토지를 매수하려고 하지만 면민들은 매매를 거부하고, 이때 일본 이민들을 앞세워 강력히 저항한 결과, 이회춘의 노모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등 많은 희생과 항쟁이 이어진 곳이다
-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나주역사는 1913년 7월 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된 건물로,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남학생의 편싸움을 발단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진원지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알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옛 나주역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학생독립운동의 과정과 나주지역의 식민지적 상황, 만세운동, 나주 출신 학생운동지도자 등을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나주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당시 나주역에서 나주-광주 간 기차를 이용해 통학하던 일본 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찬 한국 학생들이 대항하여 생긴 충돌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학생독립운동은 흔히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학생독립운동 진원지 ‘옛 나주역’ 옆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울 수 있도록 전남지역의 식민지적 상황과 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 등을 주제로 2008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
-
나월환 비
나월환(1912 ~ 1942)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上海), 만주(滿洲)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하였는데, 그는 전지공작대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대원들은 중국에서의 항일전이 곧 우리의 독립전쟁이라 인식하고, 중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 청년들을 총집결시켜서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공작대장이었던 그는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군 제5지대는 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남·화북성(河南·華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 및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5월에는 서안(西安)에서 군민위안 및 일선장병위문품 모집 공연을 하였는데 그는 이 대회주임으로 "국경의 밤", "한국의 1용사", "아리랑" 등을 공연토록 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42년 3월 31일까지 서안(西安)의 한국광복군훈련소에서 광복군을 훈련하였으나 동료간의 불화로 인하여 5지대 간부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