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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기적비
김태원(1870 ~ 1908)은 1870년 9월 16일, 전남 나주군 문평면 갈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리한 지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순릉 참봉 벼슬로 시작했지만 조국의 운명이 어긋나자 독립운동에 힘쓰기로 결심했다. 갑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 동학에 참여하다가 민폐를 피해 동지 율과 함께 수원으로 피난했다. 1907년 9월, 군사인 성재 기삼연이 장성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어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김 준은 고창의 적군을 무찔렀으며, 의진 전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결의했다. 1908년, 김 준은 나주, 함평, 28장성, 무안 등지를 휩쓸어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적수를 사살하고, 토벌대와 몇 차례 접전하며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의진 역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과 규모는 이미 체포된 부하들의 재판기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 준은 광주, 나주로 이동하고 의진은 동복, 창평 등으로 옮겨갔다. 이때, 율의 진이 적의 공격으로 흩어졌지만 율과 함께 의진을 동복과 창평으로 이동시켰다. 김 율은 항상 스스로 대장으로 칭하며 활약했고, 그의 전공은 동료 의병들 사이에서 크게 평가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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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진압구 초토영 우영터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당시 1895년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다 폭발한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초토영이 설치된 곳으로 당시 이곳 우영터에서는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추포되어 힘없이 쓰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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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항일학생운동 유적지 표지석(나주초등학교 앞)
나주 항일 학생운동 유적지로서 1929년 11월 27일 정오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들과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250여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한 곳이다. 이날의 시위는 학생시위가 전남 각지로 확대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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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인 집
조정인(趙正仁, 1872~1909)은 1907년 12월 김태원(金泰元)·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고 총기 4백여 정으로 무장시켜 나주·함평·장성 등을 무대로 일본 헌병대 및 경찰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린 의병장이다. 1908년 6월 나주 가산(佳山)에서 의병 심수근(沈守根)과 함께 의병투쟁에 사용할 탄약을 제조하던 중 일본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 그 후 광주지방에서 소위 내란죄의 주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고, 대심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1909년 1월 18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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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춘 집
이광춘(1914 ~ 2010)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당시 광주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이광춘과 박기옥을 희롱하였다. 이로써 발단된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간의 충돌은 광주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다.이렇듯 광주학생 운동의 도화선의 한사람이었던 그는 같은 해 11월 3일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솔선하여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주도하여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그후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광주학생들의 시위는 다시 추진되었다. 이무렵 광주학생의 시위소식은 전국으로 퍼져 전국 각처에서 학생시위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광춘은 광주여고보를 중심으로 다시 학생시위의 계획을 준비해 갔다. 그리하여 1930년 1월 13일 시험시간 중, 돌연 교단으로 뛰어 올라가 붙잡힌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험을 거부하자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갔다. 그는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고 일경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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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현 기적비
윤승현(1912 ~ 1950)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그는 1928년 6월에 일제의 군국주의화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된 교련교육과 교내학우회의 자치권 획득 등을 목표로 진행된 광주고보(光州高普) 맹휴(盟休)를 주도하였다. 광주고보의 맹휴는 맹휴본부를 설치하고 참모부(參謨部)·통신부(通信部)·외교부(外交部)·회계부(會計部) 등의 진행부서까지 둔 조직성과 독립운동적인 성격이 강화된 것이었다. 그는 이 맹휴사건으로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고 일경의 추적을 받자 은신하여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후 그는 1931년 12월 19일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전남 도내의 17개 단체를 통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농민부서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4년 11월 27일 일경에 노출되어 붙잡혀,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이듬해 1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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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 묘
송홍(1871 ~ 1949)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운인공은 한말에 일본인의 횡포를 제지코자 5차의 상소와 복합상소 일헌에게 체포되어 옥고 출사표와 귀거래사에 필적하는 명문의 복합상소문(한자 1334자) 을 올리고, 중국 망명 귀국 후 교육혁신방안의 제창 광주 농고 광주고보 등에서 교사생활 20여년 3.1운동때 격문을 지어 공포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일시 미국 망명 제자들에게 애국애족정신 민족의 얼을 고취시켜 1929년 드디어 광주학생독립운동 의거 15년 간의 고분당생활 8.15 해방 후 광주서중과 광주의대에서 국사학 강의 1949년 6월 18일 광주 자택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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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동 학생독립운동 기념비
당시 노안공립보통학교는 1924. 4. 1일에 개교한 4년제 학교였다고 한다. 노안공립보통학교 3회 졸업생 정찬교(鄭燦敎)와 4회 졸업생 정찬주(鄭燦胄)는 나주보통학교 5학년, 6학년에 다니고 있었다.이들과 나주농업보습학교 유찬옥(柳贊玉)은 11월 23일 후배인 노안보통학교 홍달식(洪達植)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문서를 건네며 노안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했다.홍달식은 동급생인 4학년 학우들을 규합하여 수차례에 걸친 계획 끝에 12월 2일 월요일, 아침 조회를 마친 직후 전교생을 이끌고 교문을 향해 나아갔다.“대한독립만세!” 태극기를 힘껏 들고 목청껏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사태는 곧 진압되었다. 학교 근처에 숨어있던 일경이 득달같이 달려왔고, 일인 교사들이 뛰쳐나와 홍달식은 교장관사로 연행되고 학생들은 교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홍달식은 주재소에 9일간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고, 지역 유지들의 석방운동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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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택현 순국유덕비
최택현(1862 ~ 1909)은 전남 나주 사람이다. 선생의 자는 정만이며 1862년(철종13) 1월 29일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일제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침략을 본격화하자 울분을 참지못하고 종형 광현, 종제 병현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최씨문중에 20여명이 참집하였다. 선생은 이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영산포에 주둔한 왜병을 수차 충격했었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은 1907년 8월 10일 학교면 석정리에서 영산포 헌병부대에 소속한 40여명의 적과 마주쳐 혈투를 벌렸으나 선생을 비롯한 광현, 병현, 선생의 아들 운용과 함께 순국하였으니 그때 나이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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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나주임씨 실적비
최윤용의 처 나주임씨는 사인 임병언의 딸이다. 정미년(1907) 가을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윤용의 부친 택현도 종형 광현, 종제 병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들 윤용도 종군하였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최택현 의진은 용전분투했다. 최택현과 종형제, 그리고 그의 아들 모두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광현 55세, 택현 48세, 병현 47세, 윤용 26세였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의병부대 결성 과정에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일본군과 전투를 몇 차례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윤용의 아내 나주 임씨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애도했다. 그리고 돌을 껴안고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현재 나주 다시 동곡에는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 4명은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됐다. 그리고 비석 옆에 목숨을 끊은 나주 임씨의 충절을 기리는 '열부(烈婦) 나주 임씨 실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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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택현 최광현 최병현 최윤룡 충의비
정미년(1907) 가을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윤용의 부친 택현도 종형 광현, 종제 병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들 윤용도 종군하였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최택현 의진은 용전분투했다. 최택현과 종형제, 그리고 그의 아들 모두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광현 55세, 택현 48세, 병현 47세, 윤용 26세였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의병부대 결성 과정에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일본군과 전투를 몇 차례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윤용의 아내 나주 임씨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애도했다. 그리고 돌을 껴안고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현재 나주 다시 동곡에는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 4명은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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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 나주임씨 석비
1909년 음력 8월 10일 전남 함평군 학교면 진례 들판. 최택현(崔澤鉉·48), 최윤룡(崔潤龍·26), 최광현(崔匡鉉·55), 최병현(崔炳鉉·47) 등 네명이 들판에 세워둔 나무 형틀에 묶였다. 죄목은 의병운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최택현과 최윤룡은 부자간이고, 최광현과 최병현은 최택현의 4촌. 네 사람은 전남 나주의 명문가인 수성(隋城) 최씨의 일가들이다. 이들 최씨 집안 네 명은 일본군이 쏜 총에 살해됐다.일주일 뒤인 1909년 음력 8월 17일. 시아버지(최택현)와 남편(최윤룡)의 장례를 치른 나주 임(林)씨는 큰 돌을 가슴에 안고 동네 우물에 몸을 던졌다. 수성 최씨 대종회 최병석(崔炳錫·72) 서울지부회장은 “우물에서 발견됐을 때 치마에 돌이 묶여 있었다고 집안 어른께 전해 들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