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별 검색
TOTAL. 4,004 건
-
황순모 기적비
황순모(1877-1908) 광양의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장.자는 사중(士重). 전라도 광양 출신. 통정대부 황윤락(黃潤珞)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1906년 당질(堂姪)인 황병학(黃炳學)과 함께 100여명의 포수를 모아 의병부대를 조직, 광양의 백운산(白雲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7월 광양군 망덕만(望德灣)에 정박하여 있는 일본인 배를 습격하여 격침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 때 황병학이 총탄에 맞자 의병들이 흩어져 인근 산골짜기에 피신하였는데, 그 해 10월 일본헌병대에 붙잡혀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황병학 의병 백운산 전투비
황병학(1876-1931)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책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 전라남도 광양 출생. 황재모(黃在模)의 아들이다.1905년 황사중(黃士中)·한성순(韓性純)·고견(高堅)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1908년 포수 100여 명을 규합,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병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어 모병함으로써 수백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望德灣)에 일본선박 수십 척이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야밤에 기습공격하여 침몰시키고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 뒤 옥곡면(玉谷面)을 근거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또, 광주(光州)의 일본군 수비대본부를 기습공격하여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으나 많은 동지를 잃었고,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금차 국내에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받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31년에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섬거역전투지(동학정)
과양시 진상면 섬거리 622-1 동학농민군 섬거역전투지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이다. 동학농민혁명당시 농민군과 일본군, 관군, 민보군 사이에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농민과 마을 주민들이 일본군, 관군, 민보군에 의해 전사하거나 처형된 곳이다. 섬거역(蟾居驛)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갈 무렵 이 일대의 농민군들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수차례에 걸쳐 많은 희생을 당한 곳이다. 섬거마을도 동학교도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역시 관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
황병학 의병 전투지(망덕포)
황병학(1876-1931)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책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 전라남도 광양 출생. 황재모(黃在模)의 아들이다.1905년 황사중(黃士中)·한성순(韓性純)·고견(高堅)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1908년 포수 100여 명을 규합, 백운산(白雲山)에서 기병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어 모병함으로써 수백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望德灣)에 일본선박 수십 척이 집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야밤에 기습공격하여 침몰시키고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 뒤 옥곡면(玉谷面)을 근거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또, 광주(光州)의 일본군 수비대본부를 기습공격하여 무기 다수를 노획하였으나 많은 동지를 잃었고,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군자금 모금차 국내에 입국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받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31년에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임태일 집
임태일(1898-1959)은 전남 광양(光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15일 광양군 진월면(津月面) 송금리(松琴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서당 학생들과 같이 태극기를 제작하며 주민들에게 통문을 보내는 등, 준비를 갖추고 이날 진월면 선소리(船所里) 무적도(無敵島)에서 시회(詩會)를 가장(假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려다가 일군헌병에 붙잡혔다. 이해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해운정
해운정은 1940년, 당시 진월면장을 지내던 안상선(소설가 안영 부친)이 진월면 차동마을 본가 소유의 나무를 베어 실어 나르고 찬조해 배알도 정상에 건립한 정자다. 안상선 면장은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김구 선생으로부터 친필 휘호를 받아『海雲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해운정은 지역의 기관장과 방문한 인사들이 올라 담소를 나누고, 지역민들도 즐겨 찾는 명소였는데, 1959년 태풍 사라호로 붕괴되고 말았다. 2015년 광양시가 지역민들의 뜻을 수렴해 정자를 복원하였다.
-
황현 사당(매천사), 황현 순절지(대월헌)
매천 황현 선생은 장수(長水) 본관이며 운경(雲卿) 자와 매천(梅泉)이란 호를 가진다. 황현 선생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자랐다. 왕석보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시문에 능했다. 이후 서울에서 살다가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4편의 저작과 함께 남겼다.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고, 이듬해 <매천집>과 <매천야록>이 발간되어 한말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되었다
-
호양학교 복원기념비
지리산 주령인 '호양맥'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양학교는 1908년 구례출신 학자 천사 왕석보(1816~1868) 선생의 후학인 현곡 박태현 선생(1856~1925)이나 매천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과 전남 구례군 광의면 주민 200여명이 민족자각 운동의 일환으로 뜻을 모아 만든 학교이다. 교사 6명이 12년 동안 학생 100여 명에게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호양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폐교되었고, 주민들은 광복 다음해인 1946년 호양학교의 후신인 방광초등학교를 설립했다.
-
박경현 추모비
박경현(1859-1923)은 전남 구례(求禮)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구례군 광의면(光義面) 지촌리(芝村里)에서 박해운(朴海運)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이튿날 3월 24일 구례읍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 앞에서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연설을 한 후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4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박경현 기미독립만세 의거터 표지석, 박경현 3.1만세운동 기념 동상
박경현(1859-1923)은 전남 구례(求禮)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구례군 광의면(光義面) 지촌리(芝村里)에서 박해운(朴海運)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이튿날 3월 24일 구례읍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 앞에서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벌이자는 내용의 연설을 한 후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다수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4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불원복 태극기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에 있는 대한제국시대의 태극기인 불원복 태극기는 1919년 3.1 만세운동에서 사용되었으며 1945년 광복 다음날인 8월 16일에는 구례군민 200여명이 합명주조장 마당에 모여 불원복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불원복을 실현하였다고 한다. 불원복 태극기는 2008년 8월 12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역사적 공간인 ‘구례 합명주조장’이 주민문화 공간인 ‘구례주조장’으로 재생되었다. 불원복(不遠復)이란 “머잖아 반드시 광복이 된다”는 뜻으로 녹천 고광순 의병장이 피아골 일원에서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하여 태극기에 혈(血)로 새겼다고 한다.
-
양용환 기념비
양용환(1904~1943)은 전라남도 구례(求禮) 사람이다. 1937년 3월에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로 취임하여 전라남도 구례에서 기독교 신도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거부하도록 설교하였다. 1940년 2월 전라남도 고흥(高興)군 포두(浦頭)면 송산교회(松山敎會)에서 개최한 고흥연합사경회(高興聯合査經會)에서 다수의 신도들에게 예수 재림 때 우상을 숭배한 자에게는 십계명위배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요지로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적극 거부할 것을 권유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9월 30일 이로 인하여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