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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 유언비
기산도(1878-1928)는 을사조약에 의분하여 결사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던 의병이다. 기산도는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기도 하다. 일찍이 기독교계교의 교사를 지냈으며 1905년 11월 18일 기필코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 세자루에 실탄을 장전하고 단도(短刀) 네자루를 헝겊으로 싸서 준비를 완료한 후 동지 손성원(孫聖元)·박용현(朴鎔鉉)·김필현(金弼鉉)·이태화(李太華) 등으로 하여금 적의 동정을 살피게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9시경 결사대 본부인 한성모(韓聖模)의 집을 급습한 경무고문이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의 부하에게 붙잡혀 그를 비롯하여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손성원(孫聖元) 등과 결사대 동지가 전원 옥고를 치렀다. 1920년 기산도는 임정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광주(光州)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가혹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長興)에서 병사(病死)하였다. 流離焉乞之士(유리언걸지사, 떠돌이 거지 지사)라는 표현은 이에서 기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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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 추모비
기산도(1878~1928)는 전남 장성(長城) 사람이다. 식재(植齋) 기재(奇宰)의 장자이고 의병장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의 종손이며 의병장 녹천(鹿泉) 고광순(高光洵)의 사위이다.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이 늑결된 1905년 11월 18일 기필코 매국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 세자루에 실탄을 장전하고 단도(短刀) 네자루를 헝겊으로 싸서 준비를 완료한 후 동지 손성원(孫聖元)·박용현(朴鎔鉉)·김필현(金弼鉉)·이태화(李太華) 등으로 하여금 적신배(賊臣輩)의 동정을 염탐케 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9시경 결사대 본부인 중서(中署) 니동(泥洞) 한성모(韓聖模) 집에서 경무고문(警務顧問) 환산중준(丸山重俊)의 부하에게 그를 비롯하여 박종섭(朴宗燮)·박경하(朴敬夏)·안한주(安漢朱)·이종대(李鍾大)·손성원(孫聖元) 등과 결사대 동지가 전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06년 2월 16일 퇴궐한 적신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은 내방한 6인의 방문객들과 담화하다가 상오 1시경에 후실과 취침하였다. 이때 의사 세사람이 뛰어들어 이근택을 붙잡고 마구 찔렀다. 당황한 이근택은 전신의 힘을 다하여 촛불을 껐다. 방안이 캄캄해지자 의사들이 닥치는 대로 칼을 내리쳐서 이근택은 10여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이때 이근택의 머슴이 이근택의 신음소리와 그의 후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뛰어들다가 자객의 칼을 맞아 얼굴·배·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었다. 이때가 되서야 비로소 소란한 소리를 듣고 이근택의 집을 지키던 병사 6인과 경위원(警衛院) 순검(巡檢) 4인이 달려오고 이근택의 방에 장치하여 둔 설렁줄 소리를 듣고 일제 헌병과 경찰이 뛰어왔다. 그러나 의사들은 담장에 줄사다리를 놓고 도망한 뒤였다. 이때가 17일 상오 2시경이었다. 이근택은 한성병원에 입원 가료한 결과 추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혈안이 되어 의사들을 검거하고자 날뛰었다. 이근택의 집 대청 위에 변장하였던 가발 하나가 단서가 되어 그와 이상철(李相哲)이 붙잡혀 악형을 받게 되었다. 그와 공모하였던 전 경무사(警務使) 구완희(具完喜), 전 경무관(警務官) 이세진(李世鎭)은 도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가 심문을 받을 때에 동지가 800여 명이 된다고 말하자 매국적신들은 일본헌병까지 끌어들여 집과 신변을 엄하게 경계하였으며 내방객에게 꼭 명함을 받고 몸을 수색한 후에야 들여보내곤 하였다 한다.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고 나온 그는 1920년 임정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광주(光州)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심한 고문 끝에 다리를 상하여 절름발이가 된 채로 출옥한 그는 일생을 이곳저곳 유랑하다가 전남 장흥(長興)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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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 집
서민호(1903 ~ 1974)는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월파(月坡). 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다. 1919년 보성중학교 재학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 지원을 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르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한편 서민호는 해방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를 지냈으며 제2대, 5대, 7대 민의원(오늘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교외의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나의 옥중수기』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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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 제실(고흥 죽산재)
고흥 죽산재(竹山齋)는 죽파 서덕봉(字화일, 1860~1933)이 서재로 쓰고자 지었으나 준공 후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월파 서민호(1903~1974)선생이 부친의 제실과 서재로 사용한 공간이다. 죽산재는 정면 5칸, 측면 3칸, ‘ㄷ’자형 구조이며, 기단이나 초석을 잘 다듬어 품격을 높인 근대기(1933년) 의 목조 건축물이다. 건축적으로 부재의 기법이 정교하고, 화려하지만 민화풍의 해학적인 느낌과 단청은 불교적인 요소와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을 표현하는 등 여러 문화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건축적으로 정교하고 화려하며, 불교적 요소에 근대기의 풍물이나 경관이 녹아든 민화풍의 단청이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1.03.04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3호로 지정되었다. 죽파 서덕봉(화일)은 월파 서민호의 부친으로 생전에 사회사업과 교육 등에 심혈을 기울였고 아들인 서민호(1903-1974)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이후 전라남도지사, 제 2, 5, 7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서민호(1903 ~ 1974)는 본관은 이천(利川). 호는 월파(月坡). 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다. 1919년 보성중학교 재학시절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 1927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사회학부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 지원을 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르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한편 서민호는 해방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를 지냈으며 제2대, 5대, 7대 민의원(오늘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3년 정계를 떠났으며, 이듬해 72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교외의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나의 옥중수기』가 있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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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호 묘
송년호(1844-1908)는 여산 본관이며 고흥군 점암면 연봉리 출생으로 호는 수암(洙菴), 자는 재국(在國)이다. 고흥 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1890년 무렵인데 1891년, 정영순(丁永詢)과 동학에 입도하였으므로 최초 입도자 중 하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고흥에서는 송년호를 비롯하여 유희도, 구기서, 정영순 등 4인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북 부안의 백산성으로 진군하였으며 같은 해 전주 화약(全州和約)이 체결되었고 고흥 집강소가 조직되었다. 2차 기포 후 1894년 말까지 고흥 동학농민군은 10여 차례 고흥을 공격하였는데 농민을 이끌던 유복만과 오준언 등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송년호는 체포되어 나주로 이송되는 중 탈출하여 활동을 이어가다 1908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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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구 묘
윤정구(1882-1953)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한제국의 군인출신으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반발해 공성찬, 임세묵, 임기숙, 임기서 등과 함께 섬진강 유역에서 일제를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군자금 모금 및 일군과 경을 참살하며 일제의 냉혹함을 상존시켰으나, 1909년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15년 중형 선고로 옥속의 7년을 보냈다. 정부는 그의 끈질긴 항일독립운동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82년 대한민국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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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기념비(곡성)
본 사적은 곡성지역에서 있었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본래 1978년에 세웠으나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2011년, 새로 곡성 3.1운동기념탑 건립하면서 이동하였다. 곡성 지역의 3.1운동에 대한 개괄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24일, 곡성공립보통학교 신태윤(中秦允) 선생의 주도로 학생 정래성(丁來聖), 정용태(丁泰), 김중호(金仲浩), 양성만(梁成滿), 박수창(朴秀昌), 김경석(金敬錫), 김기섭(金起燮), 김태수(金泰洙), 오종태(吳鐘泰), 정연시(鄭練時), 임락기(林洛驥), 김경택(金京)과 군민(郡民)이 함께하여 3월 24일부터 29일까지 왜경의 눈을 피해 치밀하게 거사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음력 월 28일)을 기하여 곡성 5일시장에서 신태윤 선생을 선두로 독립만세를 펼쳤다. 이어서 옥과 5일시장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국성군내 여러곳의 높은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며 조국 독립을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섬진강가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하여 백당 신태윤 선생은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확정,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어 2년 옥고를 치루었으며, 정래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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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유공자 위령탑(곡성)
곡성 출신 독립유공자 20인의 위령탑이다. 2005년 11월 17일, 독립 유공자 유족회 곡성군지회에서 건립하였다. 국가 현충시설로서 관리번호는 55-1-43이다. 위령탑은 가로 8×세로 7.5×높이 9m 규모로 독립 운동으로 나라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20명의 곡성출신 독립 열사들의 뜻과 활약상을 선각화로 표현하였다. 본 사적에 추서된 분들의 성함은 다음과 같다. 김성언, 김영학, 김용표, 김재룡, 노인선, 노임수, 신문선, 신유선, 신정백, 양원모, 유건영, 유인수, 유해용, 윤정구, 이종협, 이초립, 장기문, 정재건, 조영선, 조옥희, 조우식, 한방섭 20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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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탑(곡성)
"곡성 3.1운동기념탑"은 1978년에 세웠던 곡성 3.1운동 기념비의 기단이 붕괴되는 등 세월에 마모되어 2011년 3월 1일 (사)국조단군곡성숭모회가 주축이 되어 곡성군민의 뜻을 모아 국비 4천5백만원과 군비 1억 5백만원 총사업비 1억5천만원으로 건립한 탑이다. 한편 곡성 지역의 3.1운동에 대한 개괄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24일, 곡성공립보통학교 신태윤(中秦允) 선생의 주도로 학생 정래성(丁來聖), 정용태(丁泰), 김중호(金仲浩), 양성만(梁成滿), 박수창(朴秀昌), 김경석(金敬錫), 김기섭(金起燮), 김태수(金泰洙), 오종태(吳鐘泰), 정연시(鄭練時), 임락기(林洛驥), 김경택(金京)과 군민(郡民)이 함께하여 3월 24일부터 29일까지 왜경의 눈을 피해 치밀하게 거사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음력 월 28일)을 기하여 곡성 5일시장에서 신태윤 선생을 선두로 독립만세를 펼쳤다. 이어서 옥과 5일시장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국성군내 여러곳의 높은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며 조국 독립을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섬진강가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하여 백당 신태윤 선생은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 확정,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어 2년 옥고를 치루었으며, 정래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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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윤 동상
신태윤(1884-1961)은 전라남도 곡성군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09년 곡성보통학교의 훈도(訓導)로 취임하였다. 나철(羅喆)과 교유하면서 대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곡성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곡성군 청년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 · 준비하였고, 3월 29일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태윤은 1925년 대종교의 교리를 다룬 『삼일신고강의(三一神詁講義)』를 발간하였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받았지만 거부하고 칩거하였다. 광복 후 곡성군 건국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조선대학교가 설립되자 사학과 교수로 재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애국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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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기념관
백당기념관은 신태윤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으로 곡성 단군전 안에 있다. 단군전은 단군왕검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16년 신태윤이 학정리 삼인동에 세웠던 것을 1931년 봉황대로 옮겨 중건하였다. 백당 기념관은 단군전 경내에 신태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신축한 삼칸 팔자 지붕의 한옥에는 백당의 옥중 저서인 우리나라 역사인정사, 도해삼일신고, 고려사절요, 대한사략운기 등 저서와 단군에 관련된 서적, 대한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도서, 백당선생 관련 신문 기사와 사진 및 도서를 전시하고 있다. 또한 주요 소장 도서들과 곡성 3.1운동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곡성군의 애국지사 23인, 호남의 양한묵 선생을 비롯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독립기념관에 의뢰해 자료를 제공받아 게시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 곡성읍(谷城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곡성 공립보통학교의 부훈도(副訓導)로 신·구(新舊) 학문을 널리 배웠으며, 또한 민족정신이 남달라 강하여 담양·장성(長城)에서 재직할 때는 훈도들의 복장인 금테모자에 칼을 차는 일본식 복장을 하지 않고, 우리 고유의 한복인 행전 매고 짚신을 신고 다녀 일본인의 미움과 감시를 받아왔다.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1919년 3월 중순, 곡성지방에는 아직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때에 보통학교 숙직실 뒤의 냇물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끓여먹고 있던 정래성(丁來聖)·김중호(金仲浩)·양성만(梁成滿)·박수창(朴秀昌)·김기섭(金基燮)·김태수(金泰洙) 등 청소년을 불러놓고, 각지에서 일어나고 잇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해주고, 곡성에서도 빨리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 청년들이 이에 찬성하자, 3월 26일 정래성의 집에 모이도록 하여 시위운동에 필요한 태극기와 격문(檄文)을 작성케 하는 등, 사전준비를 갖추게 하였으며, 곡성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김중호에게 『조선역사』책을 주고 거사 당일의 성공을 위하여 동료 훈도 및 마을 유지들에게 독립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역설하였다. 예정일인 3월 29일 보통학교 3·4년생과 동리 청년들 수십명이 장터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안을 시위행진하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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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모 의적비
양원모(1858-1942)는 전남 곡성 촌동면(村洞面)의 면장으로 의병들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인물이다. 1909년 8월 동면 선주산에 주둔하던 조규하(趙圭夏)의진에 군량을 조달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구례헌병대와의 전투에서 조규하의병장이 순국하자 그 의로운 시신을 수습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병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일병은 코에 물을 붓고 잔혹하게 구타하다가 실신하자 횃불로 전신을 지지는 등 금수같은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희들은 우리 나라의 원수이다. 힘이 없음을 한탄할 뿐이오 어찌 너희에게 보고하여 우리 선비의 기절(氣節)을 막겠느냐"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혹한 고문 끝에 일군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오인하여 물러갔으며, 그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의적비는 양원모의 항일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963년 3월 10일 수백 유림들이 면사무소앞 길가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