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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박문자, 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이자 옛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3년 카나가와 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9살 때 외할아버지에게 입적되었고, 친할머니가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고모집에서 살았고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에 다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3·1만세 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감격하였다고 전해지며 1920년 도쿄에서 사회주의자와 교류하고 박열과 동거하며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22년 5월에서 1923년 3월까지 일본의 동경(東京)에서 박열(朴烈)과 함께 흑도회(黑濤會)의 기관지 『흑도(黑濤)』, 흑우회(黑友會)의 기관지 『태(太)ィ선인(鮮人)』·『현사회(現社會)』를 간행하여 무정부주의의 선전과 회원 규합에 노력하였다. 1923년 4월부터는 박열이 주도한 무정부주의 단체 ‘불령사(不逞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9월 3일 동경 대지진(大地震) 직후 체포되었다. 1924년 2월 15일 박열의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기소되어 1926년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우도궁형무소 회목지소(宇都宮刑務所栃木支所)]에 수감 중에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의 공적을 기리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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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선생상(양양초등학교)
남궁억(南宮檍)은 1905년 12월 26일 양양군수로 임명받고 1906년 2월에 부임하였다. 이것이 양양에 일찍이 신문화 교육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궁억은 근대의 대표적인 개화파 지식인으로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을 통하여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각과 교육을 통한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 인물이었다. 남궁억은 부임하자 학교를 세우기 위해 기부금을 모으기로 하였으나, 유교를 숭상하는 대부분의 지방 유림들은 비협조적 일수 밖에 없었다. 남궁억 군수는 국권 회복과 민족 부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본인의 사재(私財)와 문중을 설득하여 기부금을 모으니, 결국 유림에서도 1만량의 기금을 출연했고 이를 기본금으로 현산학교를 세웠다. 1906년 9월 8일 현산학교가 인가 되었고, 1910년 4월 1일 양양 공립보통학교로, 1951년 9월 1일 양양 국민학교로, 1996년 3월 1일 양양초등학교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계승한 영동지역의 초등교육의 산실인 것이다. 이렇게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현산학교를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였으나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 호별 방문을 통해 설득해 보았고, 자녀가 있는 집마다 의무적으로 한 명씩 학교에 강제로 보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고성과 강릉, 삼척 등 각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약 2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게 되었고, 학제는 3학년 과정으로 학생들의 나이는 17~8세까지 상투를 튼 학생도 있었다. 남궁억 군수는 학생들에게 직접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산수, 역사, 일어, 체조, 국문과 한문도 가르쳤다. 수업료는 없었고 공책과 연필을 무상으로 공급하였다. 국권갱생(國權更生)의 길은 오직 교육 밖에 없다며,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 시키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여 후일 양양 3·1만세운동의 큰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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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만세공원
횡성만세공원은 횡성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던 횡성 시장 터에 건립된 공원이다. 횡성 만세 시위는 3월 27일, 4월 1일과 4월 2일 3차에 걸쳐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이다. 강원도내 최초이자, 최대의 만세운동이다. 횡성천도교회 이채일과 이동구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전해졌고, 최종하, 신재근, 장동훈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수 백명의 군민이 읍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4월 1일에는 군민 1,300여명이 운집하여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고, 이어 2일까지 200여명이 일본 헌병분견소에 모여 대한민국의 독립과 체포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12일까지 각 면마다 거센 만세운동을 펼치던 중 하영현, 강달희, 전한국, 강성순 의사는 현장에서, 강만형 의사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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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추모비
김덕원(1876~1946)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동학에 입도 후 갑오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여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마을의 비석거리, 현 팔열각 일대)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지의 주민 수천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일본 헌병이 시위대열에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자 시위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고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물걸리 마을로 덮쳐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가재를 전소시키고 계속 추적하므로 3년간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일경의 검속에 체포되어 4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양 눈을 실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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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만세 암각유적
김덕원(1876~1946)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동학에 입도 후 갑오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여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마을의 비석거리, 현 팔열각 일대)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지의 주민 수천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일본 헌병이 시위대열에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자 시위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고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물걸리 마을로 덮쳐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가재를 전소시키고 계속 추적하므로 3년 간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일경의 검속에 체포되어 4년 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양 눈을 실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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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멸왜운동기념비
무인멸왜운동기념비는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중 하나이며, 임실 지역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최동안, 김정갑 등이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1983년 6월에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무인 멸왜 운동은 1930년대 후반 천도교 구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멸왜 기도 운동을 말한다. 1938년 무인년 일제가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운동이기 때문에 무인멸왜운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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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순절지(연곡사)
1907년 10월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곳에 세워진 기념비이다.1907년 10월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국한 곳이다.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1896년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에 참가하였다. 1906년 6월 최익현.임병찬 등이 일으킨 태인의병에 참여하려 했으나 태인의병이 해산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2월 양한규 의병과 함께 남원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양한규 의병이 일본군에 패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07년 중반 연곡사에 근거지를 두고 지리산에서 장기항전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17일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고광순은 순국하였고 의병도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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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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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식 공적 안내판
조우식(趙愚植)(1871~1937)은 전라남도 곡성 출신이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1월 전라북도 순창 구암사에서 전주 의병대 및 남원 의병대와 함께 적과 접전하였다. 음력 4월 13일(양력 6월 4일) 태인에서 구성한 면암의 의진은 정읍.순창.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돌아왔다. 조우식은 이즈음 면암의 의진에 합진하였다. 4월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황제의 칙지와 고시문을 전해왔다. 이때 읍의 동북쪽에서 일본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 임병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으나 진위대는 의진을 향하여 포화를 퍼부어 의진은 모두 흩어졌다. 이때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였다. 면암의 곁에는 조우식을 비롯한 12인의 문인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공격해 들어오던 관군에 의하여 이들은 모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조우식은 8월에 태 100도의 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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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희 기념비(서문교회)
배은희(1888∼1981)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출신의 목회자이다. 1919년 평양 신학 전문학교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전주 서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호남 지방 최초의 유치원인 전주 유치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전주 지회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복음 전도단을 결성하여 농촌 교회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시 체제기에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장로교 교단이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목회자들이 창씨개명을 강제했을 때,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목회 활동을 중단하였다. 배은희는 8·15 광복 후인 1945년 전라북도 치안 대책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뛰어들었고, 신탁 통치 반대 투쟁 위원회 경상북도 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1952년 2월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 이후에 공화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정계를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1955년 일한 도서 주식회사에서 출간한 『나는 왜 싸웠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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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선 기념관
일명 주남고(朱南皐). 경상남도 거창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9년 친구인 오형선(吳亨善)·조재룡(曺在龍)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어 거창읍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진주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한 뒤 거창읍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같은 해 3월 20일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12월 거창읍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경남노회의 추천으로 1920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거창 지방 독립운동 사실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뒤, 즉시 신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까닭에 1930년 3월에야 졸업하게 되었다. 그 해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거창읍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평생을 거창읍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반대하는 신앙노선을 뚜렷이 보였다. 거창을 중심으로 경남교회의 불참배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40년 7월 검속을 당하였다. 옥중에서 종래의 남고라는 이름을 남선(南善)으로 바꾸었다. 8·15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석방된 뒤, 이기선·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1개월 가량 부흥집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9월 거창으로 돌아와 11월 제47회 경남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뒤, 옥중에서 한상동 목사와 논의한 바 있었던 한국교회재건방침의 하나인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정식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경남노회에서 일제시대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장(金吉長) 목사가 노회장이 되고 주남선·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교회재건운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라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고려신학교 측은 노회를 탈퇴하여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함으로써 고려파라는 별개의 교단설립이 이루어졌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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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마을 소나무, 당산나무(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선포 지역)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손화중(1861~1895)은 전봉준과 함께 고부봉기를 보국안민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승화시키고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을 맡아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근간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승리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을 실천하던 중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1895년 11월 수강산 이씨 재실에서 은거하던 중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수강산 산당 이씨재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그의 동생 익중, 조카 영욱이 정읍에서 처형당하고 집안 조카 순경, 부경, 처남 유용수가 또다시 희생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손화중은 재실지기인 이봉우의 고발로 1904년 12월 11일 피체되어 195년 3월 30일 그의 나이 36세로 전봉중, 최경산,김덕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쳤다.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